페라리 이탈리아 본사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알렉산드로가 깁스턴 밸리에 있는 호텔 지하로 나를 포함한 국내 기자와 인플루언서들을 안내했다. 호텔 지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15석 정도의 프라이빗 영화관을 갖췄는데, 그곳에 앉아 있으니 꼭 페라리 오너가 된 기분이었다. 매번 그러하듯 주의 사항을 전달받고 시승 동의서에 서명했다. 모든 사람들이 서명을 끝마쳤을 때쯤 알렉산드로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이번 시승은 그동안의 시승을 잊을 만큼 최고의 드라이빙 경험을 선사할 겁니다. 호텔에 오면서 봤겠지만 뉴질랜드의 자연은 정말 장관이죠. 이건 시작에 불과해요. 내일 펼쳐질 세상은 정말 놀라울 겁니다. 그리고 ‘그 무엇과도 다른 차’ 페라리 푸로산게가 함께한다면 그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죠.”
‘그 무엇과도 다른 차’ 푸로산게는 페라리가 역사상 처음으로 출시한 4도어 4인승 모델이다. 사실 페라리에서 4도어 4인승 모델이 나온다고 했을 때 기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머리에 망치 한 대를 맞은 기분이었을 거다. 2011년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이탈리아 본사 세일즈 마케팅 담당 엔리코 갈리에라 수석 부사장은 “4도어와 SUV는 진정한 주행의 즐거움을 주는 차가 아니니 페라리 SUV는 절대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국내 시장뿐 아니라 해외시장에서도 최고급 럭셔리 SUV에 대한 고객의 니즈는 굉장히 높았고 페라리 이외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트렌드를 좇아 개발에 착수했기 때문에 페라리의 이런 선택이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1년 뒤, 푸로산게가 공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은 “페라리도 어쩔 수 없이 SUV를 만든다” “트렌드에 굴복했다”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페라리의 반응은 놀랍도록 태연했다. 푸로산게를 두고 그들은 SUV가 아닌 FUV, 즉 Ferrari Utility Vehicle이라며, 4도어 4인승 스포츠카라고 소개했다. ‘찰칵’. 스마트폰을 꺼내 푸로산게를 촬영하고 있는데 알렉산드로가 다가와 이야기했다. “기존의 페라리보다 높아졌다고 해서 SUV로 보지 말아주세요. 뉴질랜드의 멋진 경관과 함께 푸로산게를 있는 그대로 느껴주세요. 페라리가 푸로산게를 두고 FUV, 4도어 4인승 스포츠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요.” 이번 페라리 뉴질랜드 미디어 시승 행사는 총 다섯 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뉴질랜드 북섬에 있는 오클랜드부터 점점 아래로 내려와 남섬인 퀸스타운까지 지역을 다섯 개로 나눠 지정 도시를 거점으로 시승을 진행했는데, 우리는 마지막 다섯 번째인 퀸스타운 그룹이었다. 퀸스타운을 출발해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있는 테아나우 호수와 피오르드 해안에 위치한 밀퍼드 사운드를 거쳐 다시 퀸스타운으로 오는 코스다. 시승하는 거리만 730km에 달한다. 여느 시승 프로그램과 비교해도 상당히 고된 일정이다. 하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뉴질랜드 남섬의 절경을 보면서 오랜 시간 푸로산게 운전대를 손에 쥘 수 있기에 축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다음 날 아침, 남반구에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 아래 빨강과 파랑으로 옷을 입은 푸로산게가 근위병이 올라탄 말처럼 도열해 있었다. 잘 조각된 형태에 유선형의 역동적인 라인을 그려 넣은 덕분에 자태는 우아하고 실루엣은 농염하다. 기존의 페라리와 같은 디자인 언어를 공유하지만 높아진 높이 때문인지 느낌은 여전히 생경하다. 날카롭게 누운 A필러, 한층 치켜올린 윈도 라인과 좁은 창문, 게다가 와이퍼도 없는 뒷유리까지. SUV 형태에선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요즘 쿠페형 SUV라고 해서 SUV 쿠페형 루프 라인을 얹은 모델들이 있지만 궤가 다르다. 태생부터가 상이하다는 이야기다. 쿠페형 SUV는 SUV의 루프 라인에 기반해 만들었기에 완벽한 쿠페 라인을 설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푸로산게는 설계 때부터 지상고가 높은 스포츠카를 목표로 정했기에 완벽한 쿠페 라인을 구현할 수 있었다.
넋 놓고 바라보는 것도 잠시, 푸로산게에 오를 시간이 됐다. 목적지는 밀퍼드 사운드다. 푸로산게는 아직 국내 인증을 마치지 않아 보기만 했을 뿐 주행은 처음이었다. 시동을 켜자마자 V12 엔진이 고요한 아침의 침묵을 깼다. 그동안 봐왔던 페라리 V12 엔진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812 슈퍼패스트에 얹은 V12 엔진은 시동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맹렬하고 앙칼진 소리를 내는 반면, 푸로산게는 차분하고 귀족적인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소리마저 안으로 삼킨다. 실용적인 쓰임새에 알맞게 엔진을 세팅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 페라리 모델들의 주행 감각을 생각한다면 로마와 같은 GT 계열과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차의 움직임 자체가 상당히 잘 절제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나긋함을 잃지 않는다. 물론 높아진 최저 지상고나 무게 때문에 핸들링이 날카롭다고 할 수 없다. 태생에서 오는 한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료함은 살아 있다. 높아진 시트와 명료한 핸들링, 나긋나긋한 반응 덕분에 운전은 더욱 쉽다. 덕분에 앞, 옆 창문으로 펼쳐진 뉴질랜드 절경을 마음껏 즐기며 주행할 수 있었다.
뉴질랜드에서 멋진 절경만큼 놀라운 건 녹지의 양 떼다. 양이 정말 많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계속 걸린다. 하얀 털을 뒤집어쓴 듯한 모습이 귀엽지만 최근 뉴질랜드는 양의 개체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양이 배출하는 탄소가 환경오염 주범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뉴질랜드 정부는 농업 규제 방식을 놓고 농민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V12 엔진을 품은 푸로산게를 타고 도로 위를 달리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양의 신세나 V12 엔진의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고.
12기통 엔진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몇몇 브랜드에서는 단종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 푸로산게 출시 소식이 들렸을 때 8기통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페라리는 여전히 12기통을 고수한다. 친환경과 다운사이징 트렌드에 역행하는 일이지만 그들의 기술력을 동원해 최대한 연비 규제 조건을 충족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번 푸로산게에 들어간 V12 엔진은 흡기, 타이밍, 배기 시스템을 바꾸고 F1에서 가져온 보정 방식을 채택하는 등 연소 효율을 개선했다.
푸로산게의 엔진은 최고출력 725마력, 최대토크 73kg·m를 발휘한다. 특이한 건 812 슈퍼패스트에 들어간 엔진은 똑같지만 제원 수치가 다르다는 점이다. 812 슈퍼패스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2기통 엔진이 최고출력 800마력을 내뿜는다. 왜 다를까? 주행하면서 그 비밀을 풀 수 있었다. 페라리는 푸로산게의 다목적성을 고려해 실용 영역대에 가까운 낮은 회전수에도 최대토크를 낼 수 있도록 조율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초반 움직임이 가볍고 전체적인 움직임이 여유롭다. 페라리를 두고 실용과 여유를 논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운전대 위의 마네티노를 돌려 스포츠 모드로 바꾸면 여유는 온데간데없다. 엔진 반응이 빠르고 배기 소리는 앙칼지게 변한다. 앞이 뻥 뚫린 도로에서 속도를 올렸다. 에어로다이내믹을 얼마나 신중하게 다듬었는지 바람 소리가 실내로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차체가 살짝 바닥에 붙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 시간은 단 3.3초, 어지간한 고성능 스포츠카가 달성하기도 어려운 숫자다. 재미있는 건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푸로산게는 뒷바퀴 굴림 기반의 네바퀴 굴림 시스템이 적용됐는데, 급가속할 때 뒷바퀴를 빠르게 굴려 차체를 밀어낸 다음 앞바퀴를 함께 굴려 균형을 잡아 깔끔하게 움직인다. 뒷바퀴만 굴릴 땐 미끄러지는 느낌이 분명 있었는데 차체는 흔들림이 없다.
보통 시승은 인스트럭터가 선두에서 무리를 이끈다. 하지만 이번 푸로산게 시승은 자유롭다. 내비게이션에 따라 제 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된다. 사실 이런 시승 방식은 조금 위험하다. 특히나 페라리같이 값비싼 모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페라리는 자유 시승을 선택했다. “아시겠지만 뉴질랜드는 경치가 정말 좋습니다. 중간중간 포토 스폿 팻말이 보일 거예요. 도착 시간은 여유롭게 잡아놨으니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내려서 경치도 구경하고, 촬영도 하고 오세요.” 마음에 드는 곳이 있어 차를 세우고 촬영하려고 하니 한 픽업트럭에서 내린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푸로산게가 궁금한 듯 앞뒤를 살폈다. 식당 앞에선 경찰이 다가와 푸로산게에 대해 스태프들에게 묻고 있었다. 물론 이건 나만의 경험이 아니었다. 함께 시승했던 사람들도 한 번쯤 겪었다.
테아나우에서 밀퍼드 사운드로 들어가는 길은 왕복 2차선으로 대부분 좁고 코너가 짧고 급하다. 자칫 코너를 빠르게 진입하다간 차로를 침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코너를 한두 번 돌아 나가면서 페라리가 이 길을 푸로산게 시승 코스로 삼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특히 코너에서 푸로산게의 움직임이 인상적이다. 일반적으로 크고 높은 자동차를 과격하게 몰아붙이면 앞과 뒤가 따로 노는 느낌을 받는다. 푸로산게는 운전자와 한 몸이 돼 마치 스포츠카처럼 움직인다. 앞 타이어는 스티어링에 충실히 응답하고, 코너에서도 지체 없이 방향을 바꾸며 안정적으로 돌아 나간다. 또 하나 마음에 들었던 건 바로 스포츠 모드에서의 변속기 반응이다. 8단 듀얼클러치 변속기가 기어 변속 시간을 줄이는 것은 물론 운전자의 가속페달을 통해 치고 나갈 타이밍을 판단, 과감하게 기어를 내린다. 한두 단 정도가 아니다. 네 단을 한꺼번에 내리는 경우도 더러 있다. 기존에 페라리에서 느낄 수 있었던 시트에 몸이 파묻히는 경험을 푸로산게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8단 듀얼클러치 변속기만큼이나 눈길을 끈 게 또 있다. 바로 페라리 액티브 서스펜션. 페라리 액티브 서스펜션 덕분에 푸로산게 차체 크기와 높이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자세와 움직임이 가능하다. 다른 차체 제어 기능에 관여해 푸로산게의 최대 성능을 뽑아내 롤링, 피칭, 리바운드 등을 줄이고, 어떤 조건에서도 최대 접지력을 보장하기 때문. 푸로산게의 움직임에 대한 믿음은 과감한 코너 공략으로 이어졌다. 한계에 다다르는 과정도 생생하게 전달된다. 운전 실력이 그리 대단하지 않더라도 쉽게 한계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실수를 한다 해도 슬립 앵글 컨트롤 같은 페라리의 최신 고급 기술들이 운전자의 뒤를 든든하게 지킨다.
드디어 목적지인 밀퍼드 사운드에 도착했다. 뉴질랜드의 대표적인 피오르 해안이다. U자형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와 형성된 피오르 지형은 마지막 빙하기부터 현재의 모양을 만들어왔으니 족히 10만 년은 넘었을 거다. 바다가 15km 내륙 안으로 뻗어 들어와 있는데 바다 양쪽으로 1,200m 높이의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이 솟아 있다. ‘실제로 마주하면 아름다운 장관에 압도된다’는 문장의 의미를 깨달을 정도로 경치가 수려하다. 다들 밀퍼드 사운드를 배경으로 푸로산게를 촬영하기에 바빴다. 나 또한 평소엔 잘 쓰지도 않는 50년도 더 된 수동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찰칵’. 사진을 찍고 있는데 시승 전 알렉산드로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페라리가 푸로산게를 두고 FUV, 4도어 4인승 스포츠카라고 하는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요.’ 몸으로 느낀 건 분명 스포츠카였다. 역동적이고 맹렬하며 움직임 또한 가볍다. 하지만 350km가 넘는 거리를 달리면서도 피곤하지 않은 스포츠카라니. 역설적인 두 개념이 끊임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푸로산게는 ‘스포츠카는 낮고 가벼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델이면서 페라리 라인업의 확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델이다. 그래서 중요하다. 만약 페라리가 정의한 FUV로 일반 사람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푸로산게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페라리가 출시할 모델에서 명분을 찾을 수 없다. 시승을 한 우리는 FUV, 4도어 4인승 스포츠카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고객은 어떨까? 이미 푸로산게의 예약 판매는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더 이상 받지 못할 정도로 완판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페라리’라는 브랜드가 주는 믿음과 그동안 페라리가 선보인 모델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시작 가격만 약 6억원에 달하는 모델을 선택할 수 있을까? 부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단지 차가 주는 후광과 성능만을 위해서 차를 구매하지 않는다. 쓸모와 가치, 브랜드가 전하는 메시지 등 여러 가지 요소까지 복합적으로 판단해 자동차를 구매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라리의 순혈 푸로산게는 현재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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