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
극호와 불호의 사이
기사 제목을 ‘경차의 즐거움’이라고 썼으니 먼저 고백하는 편이 낫겠다. 마지막으로 레이를 탔을 때 ‘다시는 레이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제주도에 갈 일이 있어 2박 3일 동안 레이를 빌렸다. 처음에는 앞유리가 넓어 개방감이 좋았다. 컨버터블을 제외하면 제주도 풍경을 이만큼 담을 수 있는 차도 없겠군 싶었다. 문제는 한라산부터였다. 차가 너무 안 나갔다. 서울 시내에서 차를 운전하다 보면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을 일이 없다. 레이는 그걸 가능하게 한다. RPM이 레드존을 향해 치솟아도 시속 80km 위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다. 사실 제주도에서 레이를 빌린 건 동승자 P씨 때문이었다. P씨는 쉐보레 스파크 수동 모델의 차주로 열혈 레이 지지자다. 그때 생각이 나 전화를 걸었다. 그는 수화기 너머로 묘한 말을 건넸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차가 911과 레이입니다. 각각 재미, 실용성의 끝에 있는 차예요. 그 가치를 모른다면 사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음 날 나는 레이를 몰고 한강을 넘어 용산역으로 향했다.
레이에서는 우산을 펼 수 있다
1년 만에 본 레이는 얼굴이 달라져 있었다. 헤드램프는 세로로 길어졌고, 범퍼 하단에는 보호판을 적용해 더 단단해졌다. 엔진은 기존과 같은 76마력. 가속은 여전히 더뎠지만 서울 시내에서는 덜 갑갑했다. 하지만 이번에 중요한 건 P씨가 말한 실용성이었다. 레이 촬영날에는 비가 내렸다. 우산을 편 채 포토그래퍼와 계속 짐을 싣고 내렸다. 그때 깨달았다. 레이는 실내에서 우산을 펼칠 수 있다. 그만큼 넓다. 작은 편의점 우산이라도 뒷좌석에서는 우산을 편 채 내렸다. 레이 신봉자가 입 모아 호평하는 우측 슬라이딩 도어도 기대 이상이었다. 덕분에 좁은 골목에서 짐 싣고 나를 때 문이 벽에 찍히지 않는다. 슬라이딩 도어와 1열 도어를 함께 열면 차가 아닌 방에 들어가는 것 같다. 레이의 2열 시트는 뒤에 바짝 붙어 있다. 그만큼 트렁크 공간이 작아졌지만 2열 공간은 샤킬 오닐이 앉아도 모자랄 것 같지 않았다. 레이는 커스텀할 여지가 많은 차이기도 하다. 레이 정품 액세서리 중에는 차 측면에 설치하는 프로젝터 스크린, 타프, 전 좌석을 접고 위에 깔 수 있는 에어매트까지 있다. 하루 종일 레이를 들락날락하며 깨달았다. 제주도에서 한 달 동안 자동차 여행을 한다면 무조건 레이다.
한국 경차의 손익분기점
경차는 한국에서 혜택이 가장 많은 차종이다. 경차라는 이유 하나로 등록세 및 취득세 감면, 고속도로 통행료 50% 할인, 지하철 환승주차장 80% 할인, 공영 주차장 50% 할인, 차량 강제 10부제 제외가 적용된다. 이 정도면 온 세상이 경차를 타라고 응원해주는 느낌이다. 인천공항고속도로 통행료는 소형차 기준 6천6백원이다. 레이를 타고 요금소에 도착하면 3천3백원이 뜬다. 커피 한 잔 값 정도지만 ‘다른 차들의 반값으로 요금소를 통과하는 쾌감’은 3천3백원 이상이다. 실용성만 따지면 한국은 ‘경차 천국’ 일본보다 더 경차 타기 좋은 나라다. 일본의 경차 기준은 배기량 660cc 미만, 길이 3.4m, 폭 1.48m, 높이 2.0m다. 반면 한국은 엔진 배기량 1,000cc 이하, 길이 3.6m, 너비 1.6m, 높이 2.0m다. 한국에서는 일본 경차보다 더 출력이 높고 덩치도 큰 차가 경차 혜택을 누린다는 얘기다. 실제로 레이의 일부 스펙은 일본 도로법상 경차 기준을 넘어선다.
모델명 레이 1.0 가솔린 첫 출시 연도 2011년 시작 가격 1천3백90만원 전장×전폭×전고(mm) 3,595×1,595×1,700 엔진 배기량(cc) 998 최고출력(ps/rpm) 76/6,200 최대토크(kgf·m/rpm) 9.7/3,750 복합 연비(km/L) 13.0(14인치 타이어) 연료탱크 용량(L) 38 공차 중량(kg) 1,040
CASPER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
캐스퍼 시승차를 받기로 한 날에도 비가 많이 내렸다. 시승차를 받으러 가는 길 택시 안에서 영화 <그린 북>이 떠올랐다. <그린 북>은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의 운전수 토니 발레롱가가 하늘색 캐딜락을 타고 미국 남부 투어를 다닌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리는 날 차를 모는 장면이 나온다. ‘기왕이면 파란색 차였으면 좋겠군’ 생각하며 택시에서 내렸다. 시승차로 받은 캐스퍼는 진한 회색이었다. 일명 ‘티탄 그레이 메탈릭’. 나는 티탄 그레이 메탈릭 컬러의 캐스퍼를 타고 서울 시내로 돌아갔다. 시승차는 기본 옵션, 흔히 말하는 ‘깡통’이었다. 센터페시아 위에는 8인치 내비게이션 대신 아날로그식 버튼과 작은 화면으로 구성된 오디오가 있었다. 요즘 차들에서는 보기 힘든 요소다. 15년 전 쓰던 아이리버 MP3가 생각났다. 다행히 블루투스 연결은 됐다. 유튜브 뮤직으로 노래를 넘기다 보니 마이클 볼턴이 부른 ‘Georgia On My Mind’가 흘러나왔다. 마이클 볼턴의 황금색 곱슬머리와 조지아의 연간 강우량을 생각하며 촬영 장소로 약속한 남산으로 향했다.
바퀴 달린 동전 노래방
‘깡통’ 캐스퍼에는 스피커가 딱 2개 들어간다. 1열 도어 양쪽에 있는 스피커 2개가 전부다. 같은 현대자동차 집안의 최상위 모델 그랜저에는 보스 스피커가 14개 들어간다. 아무리 차가 훨씬 작아도 2:14의 차이는 크다. 중요한 건 그 모자람이 싫지 않다는 점이다. 캐스퍼는 좌석 높이와 전고가 높고 생각보다 실내도 넓다. 아주 작은 방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아는 스피커 2개 놓인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다. 동전 노래방이다. 누군가 ‘차 있어서 좋은 점’으로 ‘달리는 노래방’이라 했던 게 떠올랐다. 마이크 대신 바퀴가 달린 동전 노래방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박스형 차들이 그렇듯 캐스퍼도 주행 중 풍절음이 들렸다. 캐스퍼를 사면서 정숙성을 기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으니 밖으로 새는 소리만 잘 막아줬으면 했다. 나는 소월로를 오르내리는 내내 성대를 긁어가며 마이클 볼턴 창법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 다행히 신호등 앞에서 본 옆 차선 운전자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경차 아닌 척하는 경차
시승한 캐스퍼는 터보 모델이었다. 카파 1.0 터보 엔진은 스마트 스트림 가솔린 1.0 엔진보다 24마력 높은 100마력을 낸다. 지금 출시되는 국산 경차 중 가장 높은 출력이다. 기어비는 저속에서 더욱 힘을 내도록 세팅되었다. 서울 도시고속화도로의 제한 최고속도인 시속 80km까지 전혀 모자람이 없다. 차가 작으니 U턴도 쾌적하다. 요즘 고급차에 필수로 탑재되는 후륜 조향 시스템 없이도 차를 한 번에 돌릴 때의 쾌감이 있다. 캐스퍼를 안팎으로 보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생각보다 크다’였다. 캐스퍼의 전폭 및 전장은 모닝, 레이와 같지만 이상하게 커 보인다. 높게 설계된 보닛 포지션, 하늘을 향해 바짝 세운 A필러, 볼륨감을 키운 휠 아치는 이 차를 경차가 아닌 작은 SUV처럼 보이게 한다. 캐스퍼는 국산 경차 중 가장 많이 팔리는 차다. 지난해 국산차 시장에서는 10번째(4만8천2대)로 많이 팔렸다. 9위 쏘나타와는 차이는 3백6대뿐이다. 20세기의 대명사 티코가 ‘작은 차’를 슬로건으로 앞세웠다면, 21세기의 캐스퍼는 ‘작은 듯 큰 차, 큰 듯 작은 차’로 설득하는 차다.
모델명 캐스퍼 1.0 터보 가솔린 첫 출시 연도 2021년 시작 가격 1천4백80만원 전장×전폭×전고(mm) 3,595×1,595×1,575 엔진 배기량(cc) 998 최고출력(ps/rpm) 100/4,500~6,000 최대토크(kgf·m/rpm) 17.5/1,500~4,000 복합 연비(km/L) 12.8(15인치 휠) 연료탱크 용량(L) 35 공차 중량(kg) 1,030
MORNING
운전하긴 쉬운데 무서운 차
“모닝이요? 저는 도로에서 벤츠보다 모닝을 더 피합니다.” 모닝 시승차를 받은 날. 직장인 H씨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올해 서른을 넘긴 H씨는 2017년식 기아 스포티지 QL을 7년째 타고 있다.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인제양양터널이었어요. 정속 주행을 하다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뒤에서 쿵 소리가 나더라고요. 모닝이더라고요. 운전자분이 초보였어요. 도로 나가보세요. 유난히 모닝에 초보 딱지가 많습니다.” 다른 모닝 차주가 듣는다면 억울할 편견이 맞다. 하지만 H씨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으니 모닝에 대한 H씨의 편견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모닝 초보 운전’이라고 검색해보니 도시 괴담이 나오기도 했다. 모닝 뒤 유리창에는 바탕체로 적힌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저도 미치겠어요’, 손으로 쓴 ‘형님들 와이프 연수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쇼. 감사합니다’ 문구의 종이가 붙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H씨는 주차된 시승차를 보며 말했다. “이게 또 도로에서 볼 때랑 참 다른 차예요. 디자인 바뀌었네요? 좀 덜 미워졌어요.”
지붕 달린 고카트
모닝 주행 코스는 서울역에서 후암동을 지나 연세대학교를 찍고 오는 것으로 정했다. 좁은 골목과 가파른 언덕을 얼마나 잘 달릴 수 있을까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닝은 국산 경차 중에서 크기가 가장 작다. 전장, 전폭은 같지만 전고가 레이보다 약 20cm, 캐스퍼보다 약 10cm 낮다.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날렵했다. 모닝을 타면서 즐거웠던 요소 중 하나는 기어 레버였다. 모닝에는 게이트식 기어 레버가 들어간다. 요즘 자동차에는 사라진 요소다. 기아의 최신 전기차 EV9에는 칼럼식 기어가 들어간다. 레이와 캐스퍼도 게이트식 기어 레버를 쓰지만, 모닝 변속 레버에는 유일하게 1, 2, 3 숫자가 적혀 있다. 오른손에 기어 레버를 쥐고 변속하며 원하는 RPM을 쓰다 보니 옛날 수동변속기 차를 모는 기분이 들었다. 모닝 엔진 배기량은 998cc. 할리데이비슨 팻보이 엔진의 절반 수준이다. 엔진이 작다 보니 조금만 속도가 올라가도 금방 회전수 한계에 닿는다. 모닝은 낮은 한계치에서 조금씩 더 페달을 밟는 재미가 있는 차였다. 대배기량 차를 타고 빨리 달리는 것과는 다른 영역의 즐거움이다.
같은 차 다른 맛
모닝은 한국보다 유럽에서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름부터 다르다. ‘피칸토’. 피칸토는 스페인어로 맵다는 뜻의 ‘picante’에서 딴 이름이다. 매콤하고 야무진 차. 우리가 아는 모닝의 이미지와는 확실히 다른 이름이다. 모닝은 핫해치의 인기가 많은 유럽에서 스포티한 디자인을 강조한 GT 라인으로도 출시된다. 한국과 달리 5단 수동변속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2022년 모닝은 우리나라에서 총 2만9천3백80대가 팔렸다. 이듬해 영국에서는 2004년 출시 이후 19년 만에 누적 판매대수 25만 대를 넘었다. 흥미로운 점은 시작 가격이 1억원을 훌쩍 넘는 S-클래스가 작년 한국에서 1만3천2백4대 팔렸다는 점이다. ‘좋은 자동차 취향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는 숫자다. ‘작고 귀여운 자동차’가 모두에게 미덕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모닝을 타면서 느낀 점도 확실했다. 운전하기 쉬운 차. 그래서 더 재미있게 탈 수 있는 차.
모델명 모닝 1.0 가솔린 첫 출시 연도 2004년 시작 가격 1천3백15만원 전장×전폭×전고(mm) 3,595×1,595×1,485 엔진 배기량(cc) 998 최고출력(ps/rpm) 76/6,200 최대토크(kgf·m/rpm) 9.7/3,750 복합 연비(km/L) 15.1(14인치 타이어) 연료탱크 용량(L) 35 공차 중량(kg) 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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