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두 번씩 새로운 트렌드를 채집하고 다루지만 런웨이 위의 트렌드가 일상에 자리 잡고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하다. 때로는 현실에 흡수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는 일도 대다수. 내게는 남자들의 발레 슈즈가 그렇게 사라지고 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전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알라이아의 발레 슈즈를 신은 남자를 목격하곤 약간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쇼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중 알라이아의 크리스털 장식 플랫 슈즈에 눈길이 갔고 데님 팬츠와 깅엄 체크 재킷,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에 눈길이 닿았을 때 그가 남자임을 알아차렸다.
이제껏 남자들이 손쉽게 신을 수 없을 거라고 속단한 건 단순히 여성성과 남성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발등이 높거나 발볼이 넓으면 신기 불편하니까, 신체적인 특성상 대부분의 남자들이 쉽게 즐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렌시아가가 2023 여름 컬렉션에서 선보인 플랫 슈즈를 직접 보니 여성용 제품들보다 폭이 확연하게 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디자인이라면 남자들도 빠른 시일 내에 플랫 슈즈를 즐겨 신을 것만 같았다.
런웨이 위 남자들이 발레 슈즈를 신는 것이 새롭거나 생경한 일은 아니다.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디자인을 전개하는 시몬 로샤, 몰리 고다드 등 여성복을 기반으로 한 컬렉션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는 발렌시아가나 MM6 같은 브랜드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선택의 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건 명징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어떻게 신느냐가 제일 큰 문제. 가장 쉬운 스타일링은 길이가 길고 통이 넉넉한 바지와 매치하는 거다. 기다랗고 넓은 바짓단은 플랫 슈즈의 앞코만 슬쩍 드러낼 테고, 그러면 첫 만남의 어색함과 민망함을 약간은 덜어낼 수 있다. 쇼츠와의 궁합도 나쁘지 않은데, 이는 짧은 길이의 쇼츠에 귀여운 양말로 포인트를 더한 보디의 컬렉션이 좋은 길잡이가 돼줄 거다.
셔츠리스 수트와 매치한 MM6의 스타일링도 꽤 흥미롭다. 남자의 수트와 발레 슈즈는 자석의 양극처럼 저 멀리 떨어진 듯 보였는데, 이너를 제외한 수트와 매치하니 은밀하고 관능적인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렇듯 여러 컬렉션을 섭렵하니 발레 슈즈가 스타일의 분위기를 전환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은 낯설지만 남성용 발레 슈즈는 금세 휘발해버릴 시대의 유행이 아니라 남자 신발의 새로운 카테고리로 확장해나갈 수 있을 거라는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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