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환경청의 2022년 보고서를 보면 전 세계엔 13억대의 내연기관 자동차가 있고 전기차는 1천7백만 대다. 도깨비 방망이 뚝딱하듯 전 세계 자동차들이 순식간에 전기차로 바뀔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아직 멀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한 반도체 생산 차질로 전기차 보급 속도가 더딜 뿐만 아니라 유지 비용이 내연기관차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왔다. 그럼에도 내연기관차를 줄여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지구 환경보호와 지속 가능한 성장은 전 지구적인 과제가 된 지 오래된 까닭이다.
대부분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한 번 충전으로 누가 더 멀리 가느냐, 어떻게 하면 더 빨리 충전할 수 있는가에 몰두하는 동안 포르쉐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탄소중립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른바 ‘e퓨얼’, 즉 재생합성연료 개발에 뛰어든 것. 내연기관차를 재빠르게 교체하기 힘든 현실과 이 차들이 앞으로도 수십 년간 도로에 굴러다닐 것을 고려할 때 탄소배출 없는 대체연료 개발이 더 현실적이란 판단이었다. 이를 위해 포르쉐는 지난해 12월, 칠레에 하루 오니(Haru Oni) 파일럿 플랜트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수소에 이산화탄소를 더해 만든 연료로 911을 움직일 수 있다니. 심지어 그걸 포르쉐가 만들었다니. 출장길에 오르기 전부터 궁금한 것투성이었다.
바람의 나라, 칠레
포르쉐가 e퓨얼 공장을 세운 곳은 칠레에서도 최남단에 있는 푼타 아레나스다. 인천공항을 출발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보니 집 떠난 지 35시간이 넘었다. 하지만 목적지는 아직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접근이 쉽지 않다는 걸 예상한 포르쉐는 전세기까지 준비했다. 칠레에 뭐가 있길래 이 멀리까지 가서 공장을 짓나 하며 머릿속에 가득 찼던 물음표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 전세기가 푼타 아레나스에 가까워질 즈음, 느낌표로 변해갔다. 지상에 있는 풍력발전 터빈이 태풍이라도 들이닥치듯, 흰소리 조금 보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돈다. 저 바람을 이용하는구나 생각하며 마냥 바라보는데 50인승 비행기가 요동을 쳤다. 두 손이 자연스레 기도하는 모양으로 바뀌는 순간, 아래위로 휘청이던 기체가 바닥을 찍듯이 착륙했다. 장시간의 비행과 막판 곡예 덕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내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출입구가 열리고 활주로에 첫발을 딛자마자 손으로 끌던 기내 수하물이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입국서류가 날아갔다. 아뿔싸. 놀랄 틈도 없이 얼른 쫓아가 간신히 낚아챘는데 머리는 또 얼마나 헝클어졌는지 입국심사대 직원이 여권 사진을 보고 본인 맞느냐고 묻는다. 공항 주차장에는 여섯 대의 파나메라가 미디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앞사람의 말도 알아듣기 어려워 인사를 제대로 나눌 새도 없이 차에 오르는데 들이치는 바람에 문 여는 것조차 쉽지 않다. 차가 움직이는데 횡풍이 어찌나 강한지 똑바로 직진하기 어렵다.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하루 오니 파일럿 플랜트가 보였다. 착륙하기 직전 봤던 그 거대한 터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세를 더하며 돌았다.
하루 오니 플랜트
소규모 행사였던 만큼 포르쉐 관계자와의 인터뷰는 행사 내내 편하게 격의 없이 이뤄졌다. “칠레 남부는 1년 중 2백70일 이상 강한 바람이 붑니다. 세계 곳곳에서 가장 바람이 세게 부는 지역 중 하나죠. 덕분에 풍력발전 터빈을 최대 용량으로 돌릴 수 있어요. 게다가 푼타 아레나스는 바닷가에 바로 붙어 있어 항로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운송하기에도 편하죠. 이미 갖춰진 기반 시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요.” 왜 칠레인가라는 궁금증을 잘 안다는 듯이 칼 둠스가 인사를 나누자마자 말했다. 이번 하루 오니 파일럿 플랜트 프로젝트를 비롯해 e퓨얼 개발에 관련된 정치 및 정부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칼은 재생합성연료에 대해 막힘이 없었다.
현재 파일럿 플랜트에 설치한 터빈은 높이 81m에 블레이드 길이가 65m로 연간 3.4MW의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다. 풍속 4~90km에서 작동하는데 만약 유럽에서 똑같은 양의 에너지를 얻으려면 적어도 터빈을 6기 이상 세워야 한다. 푼타 아레나스에 부는 바람은 1년 평속이 15~20km/h지만 여름에 해당하는 12~2월에는 시속 120km/h에 달하는 강풍도 심심찮게 불어 오히려 터빈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이를 막기 위해 풍속이 91km/h를 넘어서면 블레이드를 90도 틀어 바람을 흘려보낸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남미의 끝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한 칼은 말을 이었다. “e퓨얼 생산 과정은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환경오염 없이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원, 즉 바람이나 태양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게 시작이죠. 두 번째는 이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해서 수소와 산소로 분리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수소에 합성합니다. e메탄올, e가솔린, e디젤, e항공유 모두 e퓨얼로 만들 수 있어요. 다만 e디젤은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화학식으로 메탄올은 CH3OH고 옥탄은 C8H18인 점을 생각해보세요. 그럼 이해가 쉬울 거예요.” 이렇게 간단명료할 줄이야. 고등학교 화학 시간이 떠올랐다. 사실 e퓨얼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1970년대에 액슨모빌에서 개발했지만 당시 리터당 1만원에 육박하는 생산 단가의 문제로 현실화되진 않았다. 반세기가 넘도록 후속 연구는 계속 이뤄졌고 하루 오니 파일럿 플랜트에서는 최신 기술이 적용됐다.
생산량은 얼마나 될까? “1년에 3백50톤의 e메탄올과 13만 리터의 e가솔린을 생산해낼 수 있어요. 이미 2021/2022 포르쉐 모빌 1 슈퍼컵 레이스에 하루 오니 플랜트에서 생산한 e가솔린이 쓰였습니다. 파일럿 플랜트인 만큼 2027년에 완공 예정인 실제 발전시설은 풍력 터빈을 60개 갖게 될 겁니다. 연간 300MW의 에너지를 만들고 25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6천4백35만2천 리터의 e퓨얼을 생산하는 게 목표입니다.”
“1년에 3백50톤의 e메탄올과 13만 리터의 e가솔린을 생산해낼 수 있어요.
이미 2021/2022 포르쉐 모빌 1 슈퍼컵 레이스에 하루 오니
플랜트에서 생산한 e가솔린이 쓰였습니다.”
파나메라 e퓨얼 테스트
이튿날이 밝았다. 화석연료와 구성 성분도 똑같고 성능도 완벽히 같다는 설명에도 게눈 뜬 미디어를 위해 포르쉐는 e퓨얼 테스트 드라이브를 준비했다. 주유한 연료를 평가한다는 게 독특했지만 칠레 파타고니아를 언제 또 달릴까? 그 어떤 신차 시승보다 들뜬 마음으로 사전 브리핑을 듣는데 파나메라 제품 라인을 총괄하는 토마스 프리무스 부사장이 한국 시장의 잠재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파나메라가 많이 팔리는 시장입니다. 1위, 2위가 중국과 북미인 걸 보면 정말 굉장하죠. 또 한국 시장에서 포르쉐 라인업 중 파나메라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무려 14.7%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독일은 5.4%, 대만은 3.1%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시장은 소비자의 소득 수준, 문화 수준이 높아 도전이 많은 시장입니다. 그럼에도 파나메라를 선택하는 소비자가 많다는 건 고무적입니다.”
애국심(?)을 느끼며 파나메라 운전석에 앉았는데 운전 주의 사항이 인상적이다. ‘길에서 흔하게 보이는 과나코 떼에게 먹이를 주지 말 것. 과나코 주변에는 퓨마가 있을 수도 있으니 차에서 내리지 말 것. 퓨마를 만나면 가만히 구경할 것. 영혼을 뺏어간다는 전설이 있으니 특별히 조심할 것. 콘도르는 칠레의 나라 새인 만큼 마주칠 경우 불경하게 굴지 말 것. 날개를 펼치면 폭이 3.3m에 달할 수 있으니 놀라지 말 것.’ 사람보다 야생동물을 더 조심해야 하는 시승 코스라니.
시동을 걸며 배기음을 들어보고 배기구에서 나는 냄새를 살피는데 칼이 다가왔다. 그에게 e퓨얼의 냄새와 색깔도 화석연료와 똑같으냐고 물었더니 “거의 같아요”라며 입술을 쭈뼛거린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캐물었더니 대답이 재밌다. “사실 e퓨얼은 색깔이 좀 더 맑습니다. 화석연료는 가공하면서 별도의 첨가제를 넣어 보통 휘발유는 황색, 고급 휘발유는 녹색을 띠죠. 냄새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얼마 전 회사에 재밌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세계적인 화학업체에서 e퓨얼에 향을 넣자며 몇 가지 샘플을 보냈어요. 자동차 연료 냄새에도 신경 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질문을 받고 보니 이왕 만드는 거 소비자가 좋아하는 냄새를 입히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700km가 넘는 거리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달렸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온통 컴퓨터 바탕화면 같은 풍경이다. 시승 전날 폭우가 쏟아져 도로에는 수많은 포트홀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자연은 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모든 순간을 눈에 담아 기록하고 싶은데 아쉬울 따름이다.
파나메라는 시종일관 즐거운 차였다. ‘네 자리 어디에 앉든 운전자가 느끼는 운전 재미를 그대로 전한다’는 콘셉트대로였다. 큰 덩치에 걸맞지 않게 날쌜 뿐만 아니라 안정적이었고 거주성도 나무랄 데 없다. 무엇보다 도로 대부분이 포장되지 않아 SUV나 트럭으로 다녀야 할 것 같은 험한 길을 파나메라로 아무렇지 않게 달렸다는 점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일이다. 우스갯소리지만 행사가 끝나고 토마스에게 911 다카르처럼 파나메라 다카르를 내놓으려고 이 험지에 파나메라를 가져온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웬걸. “그렇잖아도 911만큼이나 잘 달려서 걱정인데 다카르 버전까지 내놓으면 판매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해서 안 돼요”라며 웃는다.
아차, 그래서 e퓨얼이 일반 화석연료와 차이가 있느냐고? 아니, 만약 처음에 e퓨얼을 주유했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몰랐을 거다. 얼른 e퓨얼을 집어넣은 다른 포르쉐를 타볼 날이 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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