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작가님들께 늘 궁금했습니다. 원고를 작성할 때 어떤 소프트웨어를 사용합니까?
아래아한글이요. 단축키가 너무 익숙해서요. 몇 번 옮겨가려 했어요. MS워드, 워드패드로, 아예 메모장으로 옮기려고 한 적도 있고. 결국에는 단축키가 손에 딱 맞아서 아래아한글을 계속 써요. 그리고 솜노트라는 앱을 씁니다. 동기화가 잘되는 메모장 앱이에요. 제가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잘 안 갖고 다녀서요. 그 앱으로 원고지 7~8매까지도 써봤어요. 그다음에 굳이 또 하나 더 말씀드리면 클로바노트를 씁니다.
클로바노트가 저의 생산성에도 큰 역할을 합니다. 이외에도 작가님 책을 보며 많이 공감했어요. 저도 제 원고에 대해 양적으로 접근합니다. 생산량을 확인하고, 최적의 문단 글자수도 생각합니다. 일례로 제가 생각하는 최적의 문단 내 글자수는 3백 자 이내예요. 3백 자가 넘어가는 문단을 안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3천 자 원고는 3백 자짜리 문단 10개,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되게 동질감 느낍니다. 이런 얘기 계속해도 되죠? 저는 최근까지 어떤 강박이 있었어요. 아래아한글에서 늘 같은 설정을 해놓으면 대충 몇 줄이 몇 자인지 감이 와요. 저도 적당한 한 문단이 3백 자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걸 맞추는 게 강박인 것 같아 일부러 요즘은 버리려 하고 있어요. 한 문단이 5백 자가 돼도 그냥 그렇게 가려 합니다. 문단을 나누고 행갈이를 하는 게 가독성도 높고 긴장감이 생기긴 하죠. 바느질할 때 매듭을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비슷한 강박이 동어 반복을 피하려는 거예요. 어릴 때 그 생각을 너무 강하게 해서 똑같은 단어가 나오면 자꾸 거기서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제가 3백 자 단위로 문단을 나누려 한 이유도 가독성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원고의 가독성이 제일 중요해요. 제 원고의 목표는 마지막 문장까지 읽게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예를 들면 고기 구울 때 적당한 크기로 잘라야 한입에 들어가잖아요. 문단을 시각적 덩어리라 봤을 때 저의 비과학적인 느낌상 한 문단의 적당한 크기가 3백 자 분량 정도였습니다.
분량이 정해진 글을 써야 하는 사람의 압박인가 싶기도 해요. 저도 제 글이 가독성 있는 편이고, 좋은 가독성이 미덕이라고도 생각하고요.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고 있습니다. 제 작업들을 보니 제가 이미 가독성을 의식적으로 포기하고 다른 걸 추구하고 있더라고요.
루틴이 있나요? 하루에 정해둔 나의 원고 생산량이라든지?
특별한 루틴은 없어요. 아침 6시 반에 일어나려고 하고, 마감이 있으니까 눈뜨면 계속 글 씁니다. 제가 엑셀로 하루의 원고 양을 기록하니 매년 원고지 3천 매쯤 쓰더라고요. 그거를 들여다보니까 3천 매 중에 소설이 한 반쯤 됩니다. 나머지는 다른 원고들이에요. 그중에서도 신문 칼럼 같은 거는 모으면 책이 될 수도 있지만, 원고들도 많아요. 그렇다면 물리적인 능력을 키워서 1년에 3천 매를 넘게 쓰든지, 아니면 그 3천 매 안에서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원고 비중을 높이든지 해야겠더군요. 소설을 종일 몰두해서 쓰면 한 50매는 가능한 것 같아요. 저는 소설이 기사나 칼럼보다 조금 더 쉽게 써집니다. 압축 밀도가 높지 않기 때문이에요.
저는 소설을 써본 적은 없습니다만 소설 쓰기는 근육의 다른 부분을 쓰는 듯한 기분일까 싶어요. 서사와 취재가 있겠습니다만, 기사에 비하면 소설은 개념적으로 지어내는 이야기잖아요. 써오던 글을 쓸 때와 다른 방식의 피로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기사 문장은 너무 압축되어 있죠. 굉장히 문장을 깎아내고 함축하는 식으로. 별로 문학이랑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피로해하고 그렇게 정보를 많이 담아내는 게 소설의 목적도 아니니까요. 보통 기사라면 한 문장으로 쓸 걸 소설로는 서너 문장으로 써야 오히려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그런 리듬도 저만의 리듬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기사를 원고지 50매 정도 썼다면, 그게 가능한가 싶은데, 소설은 50매가 쉽지 않지만 가능은 해요. 매일매일 50매까지는 안 되더라도 한 30~40매 정도 쓰는 생활을 하고 싶어요. 그 시간을 잘 확보하지 못하는 거, 그래서 요즘 일을 줄이려고 해요.
장강명의 인생의 책 6권
<악령>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블랙 달리아> 제임스 엘로이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
<인생의 모든 의미> 존 메설리
저도 지금 논픽션을 쓰고 있어요. 앞으로도 하고 싶어요. 다만 그런 책의 시장성도 높지 않은 게 사실이라 잡지 에디터라는 일이 아주 소중해요. 제가 건강하게 생존하려면 다른 도움 안 받고 내 노동으로 돈을 벌어야 할 텐데, 하고 싶은 건 당장 수익이 안 나오니까 월급 나오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남는 시간에 책도 열심히 쓰려 합니다.
좋은 전략입니다. 저도 후배 기자들 만나면 이야기해요. 소속 매체가 타이틀 외의 영향력을 주지는 않을 거고, 소속 기자들의 노후를 보장하지도 못할 것이요, 소속 기자들을 스타로 만들어주지도 못할 거라고. 직업 저널리스트를 스타로 만들어주는 방법, 그나마 노후를 기대할 만한 방법, 그러면서도 보람이 있는 것, 그건 단행본 저술밖에 없어요. 강연 시장은 그 사람의 팔로워나 구독자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사람이 그 분야의 책을 세 권 내면 비공식적 강사 자격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주제로 책을 세 권 써보라고 후배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교양서인데 지적이면서 저널리스트만이 할 수 있는 생동감 등이 필요한 영역이 있어요. 한국이 그런 걸 많이 필요로 하거든요. 출판 시장에 감성 에세이가 많은 반면,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두루두루 읽을 만한 거리가 부족합니다. 여기에 저널리스트가 활동해야 하지 않을까, 가뜩이나 저널리즘도 망하는데. 이런 생각을 해요.
동감하는 동시에 고민도 계속했습니다. 기존 시장 경향도 있는데 내가 시장과 동떨어진 걸 자위하듯 만드나, 이런 고민을요. 그래서 작가님 책 보며 반성했어요. 논픽션을 냈는데 그 책이 현실에서 매출도 나왔으니까요.
제가 논픽션 두 편을 썼습니다. <당선, 합격, 계급>이랑 <팔과 다리의 가격>. 가성비로는 너무 낮더라고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논픽션 집필을 2순위로 두었습니까? 소설 집필이 1순위, 논픽션이 2순위, 에세이 저술이 3순위라고 적은 글을 봤어요.
수익 때문은 아니고요, 기본적으로 저 스스로 소설가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요. 제가 되게 감동한 책들이 있고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그 책들이 다 소설입니다. 제 아내가 ‘그믐’이라는 독서 모임 플랫폼을 만들었는데, 인생의 책을 올리게 되어 있어요. 제 인생의 책 여섯 권을 올렸는데, 네 권이 소설, 한 권이 에세이, 하나가 철학 개론서더라고요. 제가 평생에 쓰고 싶은 것, 극단적으로 지금 딱 하나만 쓰고 죽게 된다면 남기고 싶은 것도 소설입니다. 그와 별개로 논픽션이 가성비가 떨어지기도 하고요. 쓰는 품은 소설의 몇 배가 드는데 독자는 훨씬 적은 것 같아요. 그런데도 논픽션이 2순위, 에세이가 3순위인 건 논픽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에요. 에세이 쓰기는 소설보다 더 쉬운데, 그게 3순위로 밀리는 건 제가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예요. 다만 논픽션은 잘 쓰면 발언권 같은 걸 주는 것 같아요. 어떤 사회 이슈에 대해.
신간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은 관점에 따라 에세이이기도, 논픽션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반응은 어떤가요?
안 찾아봤습니다. 출판사에서 2쇄 찍는다고 해서 ‘그렇구나’ 했고 거기까지만 알아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직업 저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 거기서 느끼는 저술업 시스템의 특징, 그리고 개선 사항. 실제로 인세 관련 정산 시스템은 많이 선진화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네. 정확합니다. 많이 바뀌었죠. 정산 시스템이 아직 되게 만족스럽진 않은데 문체부나 출판사들도 이제 자체적으로 도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님께서 그런 선진화에 일익을 했다는 자각도 있습니까?
네. “저 아니었으면 도입이 안 됐을 겁니다”는 아닙니다만. 통합전산망 자체는 원래 계획도 있었고, 언제까지나 후진적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저 때문에 속도가 조금 빨라지긴 한 것 같아요. 그다음에는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알게 됐고, 작가들도 정산을 제대로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밖으로 알려지진 않았는데 물밑에서 바뀐 것도 좀 있어요. 제가 문제 제기를 한 후에 소액 인세를 지급한 곳들이 있어요. 계약금을 못 받았는데 받게 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고맙다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뿌듯합니다.
동시에 전업 작가의 삶에서 인세는 적은 수입이 되어버렸잖아요. 저는 지금 한국 소설가들이 일종의 IP 판매 수익으로 살고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이 와버렸나 싶어요.
와버렸죠. 기분이 이상하죠. 저는 스스로 IP 크리에이터라고는 생각하진 않거든요. 저는 문필가라고 소설가라고 생각하는데. ‘IP로 먹고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있는 한편, ‘이 덕분에 먹고살게 됐다’고 감사하는 마음도 있어요.
단적으로 책 1만 권 팔아야 세전 1천5백만원의 수익이 나는데 한국에서 1만 권 팔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하신 말씀이 무척 공감 갑니다. 저는 창작 서사물이 다 IP고, IP의 겉모습만 조금씩 달라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보는 분들이 있죠. 그래서 최근에 많이 생긴 출판사들이 속으로 자기들을 ip 회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특히 장르 소설 분야에서. 그 경우 비즈니스 모델 자체는 원작의 판권을 파는 것이고, 그래서 스토리 회사라고 하죠. ‘IP가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 중 영상은 제작 시간도 오래 걸리고 제작비도 많이 들고, 웹툰은 영상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그리는 작업 시간이 많이 걸리고, 텍스트는 되게 빨리 IP를 만들 수 있죠. 우리는 IP의 형태를 텍스트로 취할 뿐이야’라는 생각으로 운영되는 스토리 회사들이 있어요. 제가 아는 분들도 거기 많이 계시고요. 그걸 싫어하는 건 아닌데 저는 저 자신을 스토리 메이커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다른 사람들이 제 작품을 좋아해서 판권을 판매할 때, 저도 어쨌든 스토리로서 아니면 어떤 설정으로서 IP 판매를 하는 셈이니까요. 저는 텍스트 자체에 매력을 느껴서 거기에 빠져 있는데 IP 때문에 먹고살게 되어서. 그래도 예전처럼 창작자가 귀족의 후원을 받거나, 지금도 시니컬하게 이야기해서 한국 소설가 상당수가 국가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 그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요.
문화산업 자체가 인세라는 매출보다는 상당 부분 누군가의 후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IP산업이 출판에 미치는 영향이 되게 빠르기도 해요. 제가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을 채널예스에 연재할 때와 지금은 또 다릅니다. 제가 이 책을 쓸 때는 판권 관리 에이전시에 소속된 소설가가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꽤 많습니다. 출판사들도 대응을 할 수밖에 없게 됐고요. 그전에는 제 책의 2차 판권 수입을 출판사와 나누지 않았어요. 제 경우에 제 판권 수익과 관련된 모든 노력은 에이전시가 하니까요. 출판사도 수긍했고요.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출판사도 IP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해요. 근거가 무엇이든 간에. 주장하는 순간 출판사는 ‘우리는 단순한 출판사가 아니라 우리도 ip 관리하는 업체예요’라는 성격을 붙이게 되는 셈입니다. 성격을 이야기하고 붙인다기보다는 소유권을 갖고 싶다 보니까, 그리고 여기서 수익이 나니까요. 출판사도 그걸 알게 되니 주장을 하고, 그래서 이제 “우리 문학 출판사예요”라고 하던 곳도 “저희도 ip 하는 회사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습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네요.
되게 이상하죠. 제가 묘하게 그 시대의 첨단에 있기도 하고 그 흐름의 제일 끝에 있기도 해요. 이 흐름을 잘 타려면 CP 회사에 들어갔어야 합니다. ‘콘텐츠 프로바이더(CP)’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어요. 몇 년 전에는 글을 쓰지 말고 시나리오 개발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어요. 영화사, 방송사, 심지어 게임 회사 등에서 특이한 설정이나 플롯 혹은 세계관이 필요할 때 저와 같이하자고 하는 거예요. 제 작업에서는 제가 구상하는 파트가 있고 그걸 문장으로 쓰는 파트가 있습니다. 문장으로 쓰는 파트가 시간이 걸리죠. 그래서 구상만 해달라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편하기도 하고 사실 돈도 여기서 나오고요. 꽤 거액을 제시한 곳도 있었어요. 고민 끝에 거절했습니다.
왜 안 했나요?
글이 좋더라고요. 저의 꿈은 책을 남기는 건데 이것은 그럴 수 없으니까요. 갈등 많이 했죠. 아내는 하라고도 하고.
저라도 갈등할 것 같습니다. 일종의 절충안으로 ‘한 번만 해야지’라거나 할 수는 없었습니까?
지금도 그런 절충을 하는 셈이죠. 제가 강연이나 칼럼 쓰는 걸 굉장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칼럼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인지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하는 셈이고 강연은 수입이 꽤 되니까 하는 겁니다. 그거 하는 시간에도 소설을 쓰고 싶지만 강연이나 칼럼은 제 시간을 엄청 뺏어 먹지는 않아요. ip 개발에 들어가면 다른 거 안 하고 그것만 해야 돼요. 어떤 회사들은 그걸 요구하기도 합니다. 다른 작업하지 말라고.
나의 정체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군요.
관련되는 문제입니다. 강연이나 칼럼은 부업이지만 이건 직업을 바꾸는 거예요. 소설가에서 스토리 창작자로. 그건 하기 싫더라고요. 시대가 지나니까 제안도 바뀐 게, ‘플랫폼 작가들을 데리고 스토리를 공급하라’는 제안도 있었어요. 그게 버는 돈은 또 더 많이 벌기도 합니다. 모르겠어요. 이렇게 저널리즘이나 미디어 업계가 바뀔 때,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이라는 가치도 지키면서 그 흐름에도 뒤처지지 않길 원할 거예요.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시간당 최고 수익만 원한다면 고민의 여지가 없을 텐데, 정체성도 지켜야 하고 사회인으로서 수익도 내야 하고, 그 사이 어딘가 균형을 정하기가 힘들죠.
직업이 그런 것 같아요. 돈도 벌고 싶고 의미도 찾고 싶은 거잖아요. 의미는 됐고 최고 수익을 따른다면 하면 핀테크나 개발자 아니면 셀럽이 되겠죠. 제가 거기서 의미를 못 찾아서 의미 찾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고요.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해온 것 같지만 계속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선택하지 않은 기회에 대한 미련도 남고요. 웃긴 게,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돈을 한 푼도 못 벌면 의미도 사라지는 것 같아요. 한편으로 별 의미 없는 거라 생각하는데 돈을 많이 벌면 남들이 막 의미를 붙여줘요. 옆에서 보면 웃기기도 하고 세상이 참 얄팍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엄청난 대성공을 하면 아무도 우습게 보지 않고 그의 성공 비결, 혜안, 이런 것에 막 의미를 붙여주죠.
말하자면 스티브 잡스도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스티브 잡스는 별로 거북하지 않은데 영 앤 리치가 진정한 동경의 대상이 되는 걸 보면, ‘의미를 지키면서 돈을 번다’는 생각이 구닥다리 같기도 합니다.
여쭐까 말까 고민했습니다만,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의 담당 편집자 이지은 대표는 이 책의 출판을 둘러싼 일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해당 저서에는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입장이 짧게 언급되어 있었다. 원래 이 책을 발간할 예정이었던 미디어창비는 특정 문구의 수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담당 편집자 이지은은 이에 항의하고 퇴사했다. 퇴사 후 1인 출판사 ‘유유히’를 차렸다.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은 유유히 출판사의 첫 책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저는 저자 입장에서 담당 편집자가 이런 일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심적 부채감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많죠. 되게 많이 있죠. 그러니까 책도 이지은 편집자의 출판사에서 냈습니다. 이지은 편집자가 그때 사표를 내며 제게 “그 원고를 자기한테 줘도 되고, 다른 데 줘도 되고, 그냥 미디어창비에서 내도 된다”고 했어요. 저는 당연히 “당신이 차리는 출판사에서 내겠다”고 했고요.
책을 내본 저자 입장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제가 그렇다고 (이지은 편집자가 새로 차린) 유유히 출판사의 미래를 책임져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이 책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에세이집 하나 정도는 같이하려 이야기하는 건 있어요. 서로 부채감이 있고 또 의리도 있고, 막 서로 보증을 해주는 사이는 아니지만 같이 살아남으면 좋겠죠. 그 정도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문제가 된 신경숙 작가의 표절에 대한 원고와 그 원고 뒤에 붙은 작가님의 코멘트도 당연히 다 읽어보았습니다. 단순히 누가 맞고 틀리다를 넘어 작가님께서 자기도 모르게 어떤 거대한 무엇인가의 역린을 건드린 건가 싶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이게 그렇게 예민할 일인가, 문구 하나에 그렇게 크게 반응할 일인가 싶었습니다.
옳고 그른 거는 되게 명확하잖아요. 미디어창비의 대응이 몇 년째 되게 이상한 거고요. 누군가의 역린을 건드렸겠죠.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역린이 몇 개 있다고 하더라고요. 신경숙이나 중국에 대한 의견, 그에 대해서 다르게 쓰면 안 된다고.
소설가나 책을 여러 권 낸 사람들은 평생 한 주제에 집중한다고도 합니다. 소설가 장강명의 평생 주제도 있습니까? 작가님께서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인가요?
시스템의 존재나 구조 전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죠. 실제로 보면 별로 그렇지는 않아요. 늘 어떤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있어서 외부 세계가 나의 삶과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 그리고 세계가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나름의 규칙이랑 구조가 있더라고요. 저는 그걸 시스템이라 불러요. 그 시스템 안에서도 견고한 부분이 있고 계속 역동적으로 모양을 바꾸거나 새로 생기는 것도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하나의 시스템이죠. 제가 관심을 기울였던 문단도 시스템이고, 채용에도 역시 한국적 채용 방식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지금은 SF 소설집을 쓰고 있는데, 어떤 기술이 만들어내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 시스템을 이해하고 표현하기 위해서 취재는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아름다운 문장의 미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으면, 혹은 제 내부의 감정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취재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을 거예요. 그런데 일단 시스템이 저의 테마이니 취재는 필수 불가결합니다. 취재뿐 아니라 공부도 생각도 많이 해야 합니다만 취재는 굉장히 필요합니다.
취재할 분들은 어떻게 섭외하나요?
이런 적이 있어요. 미용실에서 머리 깎는데 미용사분이 옆 손님이랑 수다를 떨잖아요. 근데 그게 너무 재밌고 이 얘기가 필요하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머리 깎는 자리에서 명함 드리며 자기소개하고 길게 문자 보내서 취재한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지인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분을 소개받아서 취재를 한 적도 있고요. 저도 성격이 내성적이라 쉽지 않아요. 거절도 많이 당하죠. 하기로 했다가 안 하시는 분도 있고요. 별다른 방법은 없어요.
지금 취재 중인 소재는 무엇인가요?
제가 소설 <산 자들>을 썼는데, <산 자들> 2편을 쓰려고 그와 관련된 분들 취재를 합니다. 내일도 어느 한 분 인터뷰를 하기로 했어요. 항공사에 근무하는 분입니다. 코로나 기간에 항공업계도 타격을 받았고, 그때 그분이 하셨던 일도 있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행업계 관계자도 지난번에 두 번 만나 취재했고, 게임업계 종사자분도 취재했어요. 다 <산 자들> 작업 관련입니다. 클로바노트로 열심히 취재하고 있습니다.
장강명이 뽑은 자신의 책 5권
<재수사>
<산 자들>
<당선, 합격, 계급>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열광금지, 에바로드>
장강명의 디바이스
HP 파빌리온 15-cb080TX
갤럭시 A23
*2023년 3월 16일 기준
소설가 장강명의 일이 마냥 정적인 일은 아니네요.
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동적인 일들도 있어요. 소설가 장강명의 일이 아닌 강연업자의 일이 그렇습니다. 그 일을 다 빼고 소설가의 일만 남긴다고 해도 동적인 부분이 있어요. 그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 같아요. 취재를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취재를 하시겠습니다.
<산 자들>을 처음 쓸 때도 너무 부담되더라고요. 맨땅에 헤딩하면서 뭘 찾아야 되고, 그리고 이제 <산 자들 2>를 쓰려니까 제가 그사이에 나이도 들고 엉덩이도 무거워졌어요. ‘하기 싫은데 그래도 해야겠다. 이걸 안 할 수는 없다’ 생각합니다. 저도 판타지나 SF를 쓰면 취재 안 하고 할 수 있을 텐데, 제가 그걸 그렇게 못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래도 억지로 밀어붙입니다. 아이러니하게 <산 자들>이 소설 중에는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았는데도요.
한국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별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드라마 보면 별에서 왔든지 환생을 하든지 이런 것 같습니다. 그런 콘텐츠에서 대리만족 같은 거를 느끼고 싶어 하고요.
현실이 힘드니까 그렇게 판타지적인 뭔가를 좋아하는 걸까요. 이해가 되면서도 저는 판타지에 기대는 게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이런 경향이 안타까운 한편 와닿기도 합니다.
<산 자들>은 논픽션과 비슷해요. 이건 판권 팔린 게 아니거든요. 그냥 하죠. 저에게 의미가 있어서요. 제가 나중에 죽으면 뭔가로 기억되고 싶은데, <산 자들>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제가 쓰고 싶은 작품이 있고 그걸 잘 쓰면 도스토옙스키 하면 <악령>이 떠오르듯 기억되겠죠. 그런 작품을 못 남기면, 그런 급이 못 되면 <산 자들> 연작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산 자들>을 10권쯤 쓰면 성실성으로, <산 자들> 연작을 쓴 사람으로 어딘가에 남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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