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자칫 헷갈릴 수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영역이다. 대개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 사이 교집합이 클수록, 남들보다 빠르게 성공할 가능성은 커진다. 두 살 때 처음 골프채를 잡고 20대 초반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대표적이다. 반면 잘하고 싶은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이 중복되지 않을 때 방황의 시기를 보낼 수도 있다. 돌연 야구 배트를 잡고 마이너리그에 들어갔다 돌아와 NBA 파이널 우승 총합 6회를 달성한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그렇다. 물론 열정과 재능의 벤다이어그램 속 밸런스를 잘 맞춰 두 가지 모두를 근사하게 해내는 사람도 있다.
셀린느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 슬리먼은 오늘날 럭셔리 패션계에서 성공한 인물 중 하나다. 하지만 에디 슬리먼이 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 한 인터뷰에서 에디 슬리먼은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일 중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사진”이라고 말했다. 1968년 파리에서 태어난 에디 슬리먼은 11세 때 처음 사진을 찍었다. 처음 구입한 카메라는 13번째 생일, 파리의 한 빈티지 숍에서 발견한 니콘 FM. 당시 에디 슬리먼은 자신이 찍었던 사진들의 유일한 주제는 ‘지루함’이라고 고백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에디 슬리먼은 버려진 집과 부러진 나뭇가지 따위를 뷰파인더에 담았다.
세계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어서도 에디 슬리먼은 여전히 사진을 찍는다. 그간 찍어온 사진을 모아둔 아카이빙 사이트 ‘에디 슬리먼 다이어리’도 운영 중이다. 에디 슬리먼의 오랜 팬이라면 한번쯤 들어가 봤을 것이다. BTS의 뷔는 ‘에디 슬리먼 다이어리’를 오마주해 ‘베디 슬리먼 다이어리’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촬영한 흑백사진을 트위터에서 공개하기도 했다.
‘에디 슬리먼 다이어리’에 올라온 사진 옆에는 날짜가 적혀 있다. 그중 가장 오래된 날짜는 2006년 7월 9일. 그 왼편 흑백사진 속에는 소매를 걷은 사람의 팔목이 담겨 있고, 그 위에는 두 줄의 문구가 타투로 자리 잡고 있다.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쓴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추어 서서’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을 때 따라오는 부수적인 장점 중 하나는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많아진다는 점이다. 수십 년 전 거리의 지루함을 찍었던 그는 이제 세계적 거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에디 슬리먼의 ‘Portrait Of’ 시리즈 최신작에 등장한 인물은 놀랍게도 밥 딜런이다. 밥 딜런은 누구인가. 가수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밥 딜런에 대해 미합중국 제44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
2022년 12월, 에디 슬리먼은 밥 딜런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직접 캘리포니아 말리부로 향했다. 평소 밥 딜런은 화보는커녕, 콘서트 무대를 제외하면 카메라 앞에 잘 서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밥 딜런을 에디 슬리먼은 용케도 카메라 앞에 세웠다. 올해로 만 81세가 된 거장은 자신의 몸채만 한 깁슨 할로우바디 일렉기타를 품고 있다. 나무로 지어진 어두운 방,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기타의 헤드를 들어 올린 밥 딜런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다른 사진 속 밥 딜런은 선글라스를 쓴 채 어쿠스틱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2023년 밥 딜런에게 가죽 재킷을 입히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에디 슬리먼이 촬영한 밥 딜런의 사진은 분명 가치 있다. 2023년의 에디 슬리먼은 17년 전 자신의 사진 속 문구처럼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을 제대로 걸어나가고 있다고 생각할까? 자그마한 뷰파인더를 통해 밥 딜런을 바라보면서 에디 슬리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원고를 다듬던 중, 유튜브 뮤직에서 ‘밥 딜런 대표곡 메들리’로 검색해 틀어둔 노래에서 이런 가사가 나왔다.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결에 흩날리고 있다네 / 그 답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있다네(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 T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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