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itag
그리고 스위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과의 만남
취리히를 시작으로 6일간 취리히-바젤-베른-로잔- 제네바 등 5개 도시를 잇는 디자인 투어가 시작되었다. 얼핏 비가 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F13 톱 캣(TOP CAT)’을 메고 ‘프라이탁(Freitag)’ 본사를 방문했다. 한국에서도 이미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를 이룬 프라이탁은 지속가능성과 디자인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유일한 브랜드로 꼽힌다.
1993년 마르크스, 다니엘 프라이탁 형제는 버려진 화물차 방수 덮개를 재활용해 가방을 만들었다. 가방끈은 폐자동차 안전벨트를, 가방의 모서리는 자전거 고무 튜브를 가죽 대신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이들은 폐재료들을 재봉틀로 박음질해 첫 프라이탁 가방을 생산했다. 이것이 바로 프라이탁을 대표하는 메신저백 ‘F13 톱 캣(TOP CAT)’의 시작이다. 이 모든 작업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수작업으로만 진행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폐재료의 각 부분을 잘라서 가방을 만들기에 원칙적으로 똑같은 가방은 없다. 비가 자주 오는 특유의 날씨 탓에 자전거를 많이 타는 취리히에서 방수 가방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흔히 패션 관련 산업, 특히 패스트 패션 산업은 제3세계 저임금 노동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이탁은 처음부터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인건비가 싼 지역이나 공장을 찾는 대신, 세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인 취리히에 기반을 두었고,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재생 콘크리트를 활용해 건물 자체가 리사이클링을 상징하는 이상적인 본사를 건축했다.
현장 안내를 맡은 엘리자베스 이제네거(Elisabeth Isenegger) 마케팅총괄책임자(PR Lead)는 공장 마당 바닥의 배수구 뚜껑을 열어 지하로 우리를 안내했다. 바로 프라이탁의 빗물 저장소다. 프라이탁 취리히 공장은 5년 이상 된 방수천을 세탁하는 데 드는 물의 30%를 빗물을 모아 사용한다.
이처럼 프라이탁은 방수포를 모으고, 세척한 후 재단하는 등 가방 만드는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진행한다. 프라이탁에서는 방수포를 자르는 단계부터가 중요한 디자인 과정이라고 강조한다. 색 조합, 새겨진 숫자나 글자 등 다양한 요소를 어떻게 활용할지 방수포 재단부터 염두에 두고 작업해야 한다는 것이다. 폐재료를 사용하면서도 탁월한 디자인의 제품이 가능한 이유다.
이번 투어에서는 스위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들과도 교류할 기회가 많았다. 특히 스위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디자이너 니나 윤(Nina Yunn)과의 만남은 특별했다. 한국 패션계의 전설 이신우 디자이너의 손녀 니나 윤은 한국적인 무심함을 녹여낸 모던한 디자인으로 여유로운 우아함과 그녀만의 캐릭터를 창작한다. 한국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그녀만의 섬세한 시각이 곧 다각도로 선보이길 기대해본다.
이후 건축과 예술의 대표 도시 바젤에 도착했다. 독일, 프랑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미술관 대부분이 세계적인 건축 거장의 작품이라 단언컨대 ‘예술의 도시’로 손꼽히는 바젤. 재료의 연금술사 자크 헤르조그와 피에르 드뫼롱이 1978년 설립한 세계적인 건축 사무소 헤르조그 앤 드뫼롱(Herzog&de Meuron)이 있다. 정교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을 반영한 건물 외면을 창조하고 재료의 물성을 잘 활용하는 대표적인 건축 사무소답게 세계 35개국에서 온 건축가가 약 6백여 명 일하고 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 2008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홍콩 M+미술관, 그리고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송은 아트 스페이스를 만들었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아트 바젤’이 시작된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은 스위스의 미술품 거래상,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와 힐디 바이엘러(Hildy Beyeler) 부부가 설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바젤의 한 서점에서 구입한 판화를 시작으로 50여 년간 수집한 미술품을 바젤시에 기증하였으나 전시할 공간이 없어 직접 미술관을 지었고, 그렇게 2000년 문을 연 곳이 바로 바이엘러 미술관이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초 피아노의 장인정신이 담긴 공간은 얕은 언덕 경사를 따라 건물이 층을 이루도록 설계되었고, 미술관 남쪽에는 작은 연못을 두고 수련을 심어놓았다. 각기 크기도 다르고 전면을 유리로 설계한 서쪽 전시실 등, 작품과 어우러지는 조화로움에서 독보적인 아트 수도 바젤의 건축 미학을 엿볼 수 있다.
USM
그리고 스위스 디자인의 힘
최근 한국에서도 인기가 치솟고 모던하고 세련된 외양 때문에 USM을 최근에 생긴 가구 브랜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스위스의 가구 브랜드 USM은 무려 1885년에 세워진 가족 기업이다. USM은 바젤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소도시 뮌징엔에 본사가 있다. 저 멀리 만년설에 뒤덮인 알프스 봉우리를 배경으로, 모던한 형태의 건물이 위치해 있다.
USM은 원래 철강 하드웨어를 만들던 회사였다. 튼튼한 자물쇠, 경첩, 창호가 유명했다. 1961년 3대 경영자 파울 셰러(Paul Schärer)가 경영권을 승계하며 사업 확장을 도모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분기점이 발생한다. 스위스의 유명 건축가 프리츠 할러(Fritz Haller)에게 새로운 본사 건물 설계를 의뢰했는데, 그가 바로 모듈 형태의 건물을 고안해낸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것을 가구에도 적용해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모듈 형태의 모던한 건물에 기존의 무거운 나무 가구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른바 할러 시스템(Haller System)이다. 사무실을 새롭게 설계하다가 본업이 바뀐 기막힌 터닝 포인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 단순하면서도 명쾌하고, 디자인적이면서도 실용적인 가구는 1969년 파리에 있는 로스차일드 은행이 사무실의 워크스테이션으로 6백 개를 주문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Villa Le Lac
꿈에 그리던 르코르뷔지에실무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와 파리에서 보냈지만, 스위스의 호수와 연결된 작은 집, 하얀 집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스위스는 르코르뷔지에의 나라이기도 하다. 빌라 르 락(Villa Le Lac)은 르코르뷔지에가 부모님을 위해 지은 집이다. 1924년부터 그의 부모가 이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아버지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살았지만 어머니는 1백 세가 되던 해인 1960년까지 서른여섯 해 동안 집을 가꾸며 여생을 보냈고, 형인 알베르 잔느레도 1973년까지 함께 했다. 64m², 기껏해야 19평이 조금 넘는 집은, 과연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한다. 사람의 동선, 꼭 필요한 기능, 그럼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집. 천장을 통해 반사되는 물빛의 일렁임이 채우던 실내와 어머니가 키우던 고양이도 함께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난간까지. 넘쳐나는 감동과 감성. 르코르뷔지에의 빌라 르 락은 2016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PLATEFOMRE 10
다섯 번째 공식 언어, 디자인
한국에는 올림픽이 열렸던 도시로 알려진 로잔은 스위스의 예술과 디자인의 중추이자 힘을 상징한다. 플랫폼10(PLATEFOMRE 10)과 로잔예술대학교(ÉCAL)이 대표적이다. 플랫폼 10은 3개의 주립 박물관(스위스예술박물관, 엘리제박물관, 현대디자인응용예술박물관)을 한곳에 모았다. 이곳은 열차 격납고 부지에 있다. 자생적으로 혁신적인 예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스위스 디자인, 예술의 메카인 것이다. 견고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건물의 전시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공간의 특징과 장점을 결합한 현대적인 예술 공간으로 회자된다.
로잔예술대학교(ÉCAL)는 스위스 예술과 디자인의 뿌리라 할 수 있다. 1821년에 창립된 이 학교에서 학생들은 철저하게 실무 중심으로 실력을 기른다.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포진한 교수진과 함께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이수한 학생들은 독자적인 시각으로 자신만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해 실제로 석사 심화 과정인 디자인 포 럭셔리 앤드 크래프트맨십(Design for Luxury & Craftsmanship)을 진행하는 한국인 학생들과도 만남을 가졌다.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하는 르코르뷔지에실무 위주 프로그램을 통해 현장 감각을 익히는 로잔예술대학교만의 독보적인 디자인 언어를 엿볼 수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 디자인의 규칙, 타이포그래피 중심의 레거시. 올해 한국-스위스 수교 60주년의 로고를 디자인한 발머 할렌 스튜디오(Balmer Hahlen Studio)의 프리실라 발머를 만났다. 이보 헬렌과 프리실라 발머가 2013년 설립한 이곳은 4명으로 구성되어 있어 큰 규모는 아니다. 디자이너,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그래픽, 인쇄 관련 업체 등과 협업을 해왔고, 섬유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 디자인 실험이 주목받고 있다.
여전히 알프스와 호수, 버킷 리스트로 꼽히는 여행지이자 낯선 나라일지도 모르는 스위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같은 언어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위스의 다섯 번째 언어는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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