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TTI WAY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피렌체는 1월과 6월이 되면 조용한 소란에 휩싸인다. 바로 1972년에 처음 열린,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남성복 박람회 피티 워모가 개최되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공백이 잠깐 있었지만 이번에는 예년보다 훨씬 더 많은 브랜드와 바이어, 프레스들이 참여해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이번이 첫 참석인데, 피렌체의 옛 요새였던 포르테차 다 바소 안을 가득 채운 다채로운 브랜드의 부스들과 비범한 패션을 뽐내는 참석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나니 비로소 피티 워모에 온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빼곡하게 늘어선 부스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지레 겁먹었는데 침착하게 관심 있는 브랜드를 향해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날만을 고대하고 준비했을 사람들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시즌의 주제는 ‘피티 웨이(PITTI WAY)’로, 총괄 디렉터 아도노스티노 폴레토는 이에 대해 ”우리가 삶에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선택지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번 전시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새로운 경로를 탐색할 수 있는 나침반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걸맞게 박람회는 다양한 모양의 화살표와 이정표를 가득 채워 역동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작년보다 더 많은 브랜드가 참석한 만큼 이들을 나누는 섹션도 다시금 확장됐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자연과 스포츠에 대한 열망을 확인한 사람들을 위해 ‘I GO OUT’ 섹션이 부활했으며, 지속가능한 패션 브랜드를 한데 모은 ‘S|Style’ 섹션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들을 소개하는 ‘the SIGN’, 반려동물들을 위한 ‘PITTIPETS’도 새롭게 생겨난 프로젝트 중 하나다.
피티 워모에는 수트 입은 남자들이 가득할 것만 같다는 막연한 상상과는 달리 실제로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옷차림은 캐주얼하고 다채로웠다. 클래식과 스트리트, 캐주얼, 빈티지 등을 넘나드는 믹스 앤 매치 스타일을 눈으로 담으며 젊은 감각으로 다시 태어난 피티 워모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PRECIOUS GUEST
Jan-Jan Van Essche
디자이너 프로젝트 부문에선 벨기에 디자이너 얀 얀 반 에쉐가 초대돼 첫 런웨이 데뷔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피티 워모의 디렉터 라포 치안키는 그를 “성별의 구분을 넘어 우아함과 자연스러움을 매번 다른 버전으로 창조하고, 자유에 대한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디자이너”라고 설명했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과 인접한 회랑에서 열린 이번 쇼는 우아한 발레 공연과 함께 진행됐다. 울, 캐시미어 같은 편안한 소재를 사용한 것은 물론 볼륨감 있거나 흐르는 듯한 실루엣의 튜닉 셔츠, 품이 넉넉한 수트 등의 옷들을 주로 선보여 실용성에 무게중심을 둔 태도가 엿보였다. 또한 자연스럽고 차분한 컬러를 주로 사용했는데, 숨 가쁘게 변화하는 유행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나아가는 디자이너의 단단한 결기가 느껴졌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피렌체와 벨기에의 문화가 일시적으로 공존했던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Martine Rose
피티 워모 103의 게스트 디자이너는 바로 관능적이고 유머러스한 디자인으로 강력한 팬덤을 이끌어가는 마틴 로즈였다. 처음으로 런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컬렉션을 선보인 그는 이탈리아 문화와 역사에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적절히 버무렸다. 하위문화와 관련된 주제를 곧잘 다루는 성향은 피렌체에서도 여전했는데, 이번엔 런던의 하드코어 음악과 이탈리아의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이탈로 디스코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강렬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또한 실루엣의 변형과 낯선 것을 조화롭게 재조합하는 장기를 살려 이탈리아 패션의 핵심인 테일러링에 마틴 로즈 스타일을 가미해 완벽한 하이브리드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를테면 셋업 수트를 하나로 합친 오버올, 펄럭이는 프린지 장식을 더한 웨스턴 스타일의 코트 같은 것들 말이다. 이외에도 땅에 끌릴 듯 길게 늘어진 벨트, 다양한 크기의 쇼핑백 모양 가방 등으로 특유의 위트 있는 감성을 주입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하나 더 흥미로웠던 점은 바로 독특한 개성을 지닌 모델들이었다. 피렌체의 거리, 술집, 식당 등지에서 데려온 모델들은 국적도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는데, 여러 갈래로 흩어진 런웨이를 전위적으로 행진해 쇼에 감칠맛을 더했다.
THE FANTASTIC MAN
혁신적이고 현대적인 형태의 클래식 스타일을 선보이는 ‘FANTASTIC CLASSIC’에 들어서면 피티 워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브랜드, 브루넬로 쿠치넬리를 만날 수 있다. 브루넬로 쿠치넬리는 피티 워모의 첫날, 새로운 컬렉션을 선보인 후 밤이 되면 언제나 성대한 디너 행사를 열어 축배를 들곤 한다. 이번 컬렉션은 와인 블렌드에서 영감받아 풍부한 버건디 색조를 사용했으며, 장인정신과 고급스러운 소재가 돋보이는 브랜드답게 자세히 들여다보고 만져봐야 그 진가를 더 깊이 알 수 있다. 이곳에선 이탈리아 아우터웨어의 대명사라고도 칭할 수 있는 에르노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남성의 라이프스타일에서 모자와 신발 같은 새로운 액세서리까지 아우르는 컬렉션은 혁신과 전통, 그리고 소재와 스타일을 중요시하는 브랜드의 특성을 고루 담았다. 에르노의 아카이브를 재해석한 이번 시즌엔 미니멀한 디자인의 아우터부터 대담한 컬러를 사용한 팝한 아이템들을 고루 구성했다.
The New Wave
이번 시즌에는 남성복이라는 범주를 넘어 라이프스타일까지 확장된 두 가지 섹션이 새롭게 생겼다. 코로나19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인테리어 제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고, 그에 부응하기 위해 새로운 가구와 오브제들을 두루 소개하는 ‘the SIGN’을 선보였다. 단지 디자인에 치중한 브랜드들을 모으기보단 장인정신을 고수하거나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작하는 브랜드를 소개하는 세심함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처음으로 반려동물을 위한 액세서리와 라이프스타일 제품들을 소개하기 위해 ‘PITTIPETS’ 공간도 따로 마련했다. 반려동물의 건강과 스타일을 위한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이는 15개 브랜드를 선정했으며 쿠션, 의류, 화려한 장식을 더한 하니스 등과 같은 다양한 제품들로 구성했다. 이를 통해 이제는 입는 옷뿐만 아니라 우리가 머무는 곳, 함께하는 소중한 것들까지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피티 워모의 새로운 물결이 의미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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