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요리하는 작가, 김송
2005년부터 본격적으로 만화를 세상에 선보인 김송 작가는 요리 웹툰 <미슐랭스타>로 만화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국내 요리 웹툰의 전성기를 이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역동적이고 생생한 요리 작화와 직접 취재하고 만들어 먹는 전문성까지 갖췄다. 이후 <볍신을 부탁해>에서는 전과 다른 작화로 화풍을 확장했다. 양식과 한식을 넘나드는 김송 작가가 만화를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은 하나다. 희열이다.
작가님이 좋아했던 만화와 작가, 화풍이 궁금하군요.
어릴 땐 일본 만화 많이 봤죠. <드래곤볼> <북두신권> <슬램덩크>. 딱 그 세대예요. 당시 친형이 부산 깡통시장에서 <북두신권> 일본판을 사왔을 땐 충격이었습니다. 내장이 날아다니고 피의 향연이더군요. 한국판으로 수입되면서 자극적인 작화들이 글자로 모두 지워졌습니다. <드래곤볼>의 초반부 야한 장면이 한국판에선 먹으로 지워졌고요. <아이큐 점프>는 창간호부터 모았어요. 허영만 선생님 <망치>와 이현세 선생님 <아마게돈>이 연재돼서 모았죠. <소년 점프>는 <슬램덩크> 보려고 모았고요. <아이큐 점프> <소년 점프>를 접했을 때 국내에도 그림 잘하는 작가님들이 하나둘 보이더라고요. 대표적인 그림이 이명진 작가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과 양경일 작가의 <소마신화전기>였죠. 그리고 ‘넘사벽’이라고 느낀 그림이 있습니다. <소년챔프>에 <레인보우> 연재했던 김재환 작가. 형민우 작가는 중간에 화풍을 바꿨는데 완벽한 변신을 이루어냈죠.
요즘 웹툰은 화풍이 비슷한 느낌이라는 피드백도 들리더라고요.
그 부분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화풍은 자기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이지만, 대중에게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해요. 꽤 중요한 점이죠. 화풍을 똑같다고 느낀다면, 옛날 만화를 보아도 동일하게 느낄 거예요. 옛날에도 국내 작가들이 일본 만화 특유의 ‘모에’한 느낌을 따라 한다는 말을 들었죠. <붉은 매>도 <드래곤볼>을 따라 그렸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는 <붉은 매>가 <드래곤볼>의 영향을 받은 건 맞지만 작가님이 자기 스타일로 바꿔 아주 공들여 그린 만화라고 생각하거든요. 획일화된 그림체에도 디테일이 저마다 다른 형태로 살아 있어요. 비슷해 보여도 어떤 작가는 얼굴을 크게 그리면서 45도 반측면 라인에 집중하는 반면, 상반신만 나오는 하프 컷 위주로 그리면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작가가 있죠. 만일 독자가 요즘 그림이 획일화됐다고 느낀다면, 그건 작가가 독자들이 좋아하거나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둔 그림체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화는 작가의 선택 문제죠.
<미슐랭스타>는 요리 만화입니다. 요리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한 계기는 언제였나요?
제가 술을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술 사 먹는 돈이 너무 아까운 겁니다. 술집 가서 저렴한 안주 한두 개 시켜놓고 마셔도 5만원 정도 나오는데, 가락시장에서 신선한 생선회 한 접시 먹으면 2만5천원 정도거든요. 매운탕까지 먹으려면 5천원만 더 내면 되죠. 너무 좋잖아요. 적은 돈으로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그때부터 미식에 눈을 떠 레스토랑을 다녀보고 나름대로 맛의 기준을 정립하기 시작했죠. 그런 과정 끝에 미식에 대한 웹툰을 그려보자 결심했습니다.
요리 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당연히 요리지만, 만화에서 표현하는 요리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요리법엔 공식이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요리는 사람이 먹는 것이고, 만화에는 계속 새로운 사람이 등장하죠.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를 한층 풍성하게 만드는 게 요리의 비주얼이죠. 요리를 먹고 느끼면서 등장인물이 함께 얽혀 싸우고 갈등하는 게 진짜 만화이고 드라마죠.
요리 만화에 등장하는 요리를 묘사할 때 중요한 건요?
무조건 질감이에요. 이를테면 기름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비주얼이 확 달라지니까. 그다음 중요한 게 색감, 그리고 온도 표현입니다. 뜨거운 요리에서 피어나는 연기, 얼음의 시린 느낌을 잘 구현해야 하죠.
실제 요리를 정밀하게 묘사하면서 성장한 부분이나 배운 것도 있을 것 같아요.
전에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됐죠. 예를 들면 마늘 손질할 때 편마늘로 자르는 것과 으깨는 것의 차이점, 고기에 소금을 미리 뿌려 재운 경우와 굽기 직전 뿌린 경우. 이러한 경우가 요리의 맛에 차이를 만들더라고요. 요리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깨달았어요. 셰프들은 참 대단해요. 특히 파인 다이닝은 조미료를 이기는 맛을 내기 위해 기본적인 재료들로 요리하잖아요. 손도 많이 가고 모양 만들 때도 핀셋을 사용하는 만큼 섬세해야 하죠.
<볍신을 부탁해>에서는 작화 스타일이 달라졌더라고요. 선이 굵고 둥글둥글하다고 느꼈어요.
완전 간결하게 그렸죠. 일부러 힘을 뺐거든요. <미슐랭스타> 시즌 3 때까지도 제 그림은 선이 날카로웠어요. 선을 간격에 정확히 맞추거나 형태를 완벽하게 따라가도록 그었죠. 그래서 그림이 경직되게 표현됐어요. 갈수록 그런 강박을 놓고 싶더라고요. 선이 살짝 어긋나거나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더라도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죠. 대신 배경을 정확하게 그리려 했고, 인물 그림은 편하게 풀린 상태로 그렸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이 <미슐랭스타> 시즌 4에도 영향을 줬어요. <볍신을 부탁해>보다는 정제된 스타일이긴 하지만 시즌 3보다는 풀린 느낌이죠.
강박을 푸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요.
놓지 못하는 걸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저만의 아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예를 들면, 비율이라든지, 선에 끊어진 곳이 절대 없어야 하거나. 이러한 강박에 그만 집착하고 싶었죠. 딱딱했던 그림이 자연스러워지길 바랐거든요. 동작을 연필, 펜으로 슥 그린 느낌으로 그릴 때 더 예뻐지는 경우도 있음을 알게 되면서 더 다양한 발견을 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편해져서 문제죠.
<미슐랭스타>를 구상하기 전 초기 작화는 어떤 형태였나요?
요리 만화 시작하기 전 제 그림은 무거운 스타일이었어요. 그러다 요리 만화를 처음 기획할 때, 5화까지 만들어 이현세 작가님께 찾아갔어요. 작가님이 제 선생님 중 한 분이거든요. 그림을 들고 갔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셨어요. “야, 네가 그린 요리 만화를 보고 사람들이 맛있어 하겠냐? 전부 새카맣게 그려서 꼭 탄 음식처럼 보이는데.” 그 말씀을 듣고 스타일을 바꿨어요. 훨씬 더 밝고 가볍게요. 가벼워지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나거든요. 특히 일상적인 장면을 표현할 때보다 더 쉬웠죠. 그전에는 액션, 누아르 만화처럼 찢고, 썰고, 피 터지는 그림에 최적화되었던 사람인데, 요리 만화 하면서 많이 밝아졌습니다. 살도 쪘죠.(웃음)
디지털로 작업하는 것보다 연필로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게 훨씬 와닿기도 하나요?
작가 스스로 만족도가 높은 것 같아요. 편리한 건 디지털이지만, 연필로 끄적거리며 그리는 게 훨씬 매력적이거든요. 디지털보다 손 그림이 진척이 더 빠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일부러 콘티도 연필로 직접 그립니다.
요리 만화의 매력은 뭘까요?
사람 간의 즐거움인 것 같아요. 30대 초반까지도 먹는 행위의 즐거움을 몰랐는데, 만화 그리면서 알게 됐어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이건 제가 만화에서도 쓴 대사인데, ‘식욕은 하루에 세 번 합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쾌락 중 하나다.’ 되게 괜찮은 말 같아요. 요리는 삶을 담기에 좋은 소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이렇게 기자님과 대화만 하면 딱딱하지만 요리를 먹으며 대화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훨씬 역동적인 대화가 이뤄질 수 있죠. 따뜻한 분위기가 만들어질 수도, 긴장감이 형성될 수도 있어요. 단 몇 마디로 화해할 수도 있고요. 요리, 식사가 이끌어내는 힘은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최근에 그림 그리는 AI가 등장했지만, 저는 인간이 고민하고 그린 그림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질 거라 믿거든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작화의 힘은 무엇인가요?
눈길을 잡아끄는 것이죠. 사람들을 한 방에 끌어당기는 역할. 그 역할이 발현되는 부분은 굉장히 다양하다고 생각하는데, 기본적으로 퀄리티에서 결정 납니다. 얼마나 열심히 그렸느냐가 보이거든요. 그런 만화는 쉽게 지나치기 어렵죠. 이상규 작가님의 <호랑이형님>을 처음 봤을 때 ‘미친 거 아니야!’ 했어요. 엄청난 정성과 퀄리티가 보였고 끝까지 읽고 싶은 작품이었어요. 중반부에 힘이 풀리거나 흐지부지 그려내는 작가들도 있는데 <호랑이형님>은 전혀 그렇지 않았죠. 그래서 초창기에 거대한 팬덤을 형성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독자를 끌어들이고 독자가 내용을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곧 작화의 힘이죠. 똑같은 대본이라도 어떤 작가가 어떤 개성으로 그려내느냐에 따라 그 맛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마지막으로, 만화가로서의 삶은 어떤가요? 창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듯해요. 하지만 그게 썩 나쁘지 않죠. 공감하나요?
정말 힘들죠. 그럼에도 못 놓죠. 중독성이 어마어마하거든요. 마감 당일에 해야 할 건 많고 힘들어 죽겠는데 속으로는 웃고 있습니다. ‘나 조금 이따 할 건데?’ 하면서 막 희열을 느껴요. 그 희열이 너무 강렬해서 일상생활에서 자극을 못 느끼는 걸 수도 있어요. 매주 수요일 때문에 정말 미치겠지만, 결국 매번 해내는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빠져버리죠. 주변 사람들에겐 회사에서 월급 받고 다니라고, 힘든 길 택하지 말라고 하지만 속으론 웃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만 이 재미를 느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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