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국 공으로 회귀한다. 둥근 축구공은 어디로든 굴러가고 누구나 굴릴 수 있다. 축구 얘기를 할 때면 우리는 잠시 괴로움을 잊는다. 축구팀에 대해 떠들다 보면 하락한 주식, 상승한 물가, 남의 집 살이, 취업난, 슬픔, 절망 언저리에 있는 문제들을 우리 삶에서 아주 잠깐 떼어놓을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축구를 이야기하게 된다. 누구나 ‘맨유’를 비난하고, 누구나 ‘나폴리’를 칭송할 수 있다. 축구는 계급이 없고, 경계가 없으며 모두에게 열려 있다.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는 다시 축구를 생각한다. 우리가 축구를 얘기할 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대한민국에서 축구를 가장 사랑하는 축구 팬을 만나고, 축구를 시작해서 인생이 달라진 사람, 프로리그에서 선수로 활약하는 사람, 축구로 먹고사는 사람을 만났다. 그들 모두 축구를 사랑한다 말했다.
“이곳은 개인 서재 같은 공간이에요. 사방이 빨개서 누군가는 눈 아프다 할 수도 있을 텐데, 저는 이게 가장 편안해요.” 조승훈 디렉터는 2020년 이전까지 연남동에서 영국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펍이자, 자신의 또 하나의 이름 ‘굿넥’을 운영했고, 그의 집 한편에 그가 서재라 말하는 공간은 굿넥을 압축한 듯 했다.
“굿넥 인테리어에 빨간색을 많이 썼거든요.” 빨강은 맨유의 상징적인 색이기도, 우리 붉은 악마의 색이기도 하다. “이곳 파주 헤이리로 이사 온 것도 오래전부터 계획한 거예요. 파주 축구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거든요.”
조승훈은 축구 팬이다. 축구 펍을 운영했고, 러시아 월드컵 관련 다큐멘터리 <LOUD&PROUD>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21세기에 열린 모든 월드컵을 개최 기간 꽉 채워 다녀온 그에게 팬이라는 말은 부족해 보이지만, 그만큼 정확한 수식도 없다. 그런 그가 축구에 빠지게 된 계기는 뭘까?
“가장 어려운 질문이에요. 축구에 지난 15년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봤어요. 어렸을 때 쓴 일기장을 봐도 축구 얘기밖에 없더라고요. ‘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을 끝까지 응원할 거야’ 같은 말을 엄청 써놨을 만큼요. 특정한 사건이라면, 온 국민이 열광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아닐까 해요. 당시 저는 고교 1학년이었는데, 교복 바지에 ‘Be The Reds’라고 쓰인 한국 응원복을 입고, ‘꿈은 이루어진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한국과 독일 4강전을 직관하러 혼자 갔어요. 그런데 하필 그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졌어요. 어린 나이에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갔죠. 피켓에 쓰인 문구와 다르게 꿈이 무너진 것 같았달까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응원하는 대상이 항상 승리할 순 없고, 언제나 승리의 희열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님을 깨달았어요.”
어찌 보면 그의 축구 인생은 한국의 4강전 패배로부터 멋지게 펼쳐진 셈이다. 이후 조승훈은 축구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았고, 2007년에는 호날두 선수를 만나 극적인 순간을 맞기도 했다. “호날두가 내한했을 때, 수많은 관중 사이에 있는 저를 콕 집어 ‘Good neck’이라 외쳐줬거든요. 당시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던 그가 제 목걸이가 멋지다는 말을 그렇게 한 거죠. 가장 좋아하는 선수인 호날두가 6만 명의 관중 중 1명인 저를 짚어서 한 말이었어요. 1초 만에 결심했어요. 앞으로 굿넥이란 이름으로 살겠다고.”
이후 굿넥은 조승훈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 됐고, 그의 축구 인생은 본격적으로 출발했다. “축구 팬으로서 자신 있게 말할 게 있어요. 세계인을 통틀어 제가 21세기에 열린 월드컵 전문가 중 한 명이라는 거예요. 개막 3일 전부터 폐막 3일 뒤까지 경험했거든요. 개최국에서 월드컵과 관련한 가장 많은 장소를 다녔고, 가능한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가장 잠을 덜 잔 사람은 저일 거예요. 러시아 월드컵 때는 각국의 축구 팬들이 모인 클럽에서 다른 나라 축구 팬과 술로 경쟁하다 기절해서 병원에 실려간 적도 있어요. 개막전이었는데, 시작부터 짐 다 털리고 말았죠.(웃음)”
그의 축구 열정은 다큐멘터리 <LOUD&PROUD>로 이어졌다. 러시아 월드컵 기간 동안 그가 본 축구 경기와 팬에 대한 내용이자, 월드컵이라는 세계적인 축제를 대하는 조승훈 본인의 이야기를 담았다. “촬영과 편집은 마쳤고,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선보일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그는 다가올 카타르 월드컵도 찾아갈 예정이며, 그곳에서 상영할 생각도 있다고 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다국적 축구 팬들에게 <LOUD&PROUD>를 공개하며 축구를 좋아하는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응원하는 대상은 달라도 마음만큼은 모두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축구 팬이라면 처음 봐도 통하는 게 있고, 같은 팀을 응원하는 사람이라면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교하는 기준이 사라지는데, 그게 참 아름다운 것 같거든요. 제게 주제와도 같은 문장이 있어요. ‘Football is nothing without fans.’ 선수는 은퇴하고 팬으로 돌아오지만, 팬은 은퇴가 없으니까요.”
조승훈은 이제 다가올 카타르 월드컵도 갈 예정이다. <LOUD&PROUD> 상영 계획과 별개로 축구 팬의 열정에 다시 불을 지필 예정이다. “카타르 월드컵 주최 측이 문제가 많아요. 공사를 하다 6천5백 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기도 했고요. 말하자면 긴데, 카타르 월드컵의 문제점을 (과장 보태서) 5만 가지는 짚을 수 있어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모르겠지만, 카타르에서도 촬영은 할 거예요.” 그는 오늘 촬영을 위해 월드컵 공식 주최사인 FIFA(피파)를 향한 메시지를 담은 티셔츠를 입고 왔다고 했다.
열광하는 축구에 삶을 바치기도, 영화를 만들기도 한 그의 다음 계획은 뭘까? “호날두가 은퇴하기 전에 다시 한번 그를 만나고 싶어요.”
이유는 뭘까? “그를 다시 만나러 가는 제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준비 중이거든요. 제 인생에 방점을 찍어준 선수이자, 제게 새 이름을 선물해준 그를 만나 그에게 ‘say again goodneck!’이라 외치고,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굿넥이라는 말을 들을 거예요. 축구에 바친 제 지난 15년을 그렇게 상징적으로 마무리하는 거죠. 한편으로는 제게 따라붙는 축구라는 타이틀이 지겹기도 해요. 그 프레임을 직접 만든 거고, 떠나는 것도 제 마음이라, 이제는 응원하는 팀을 위해 열광하기보다는 그런 팬들을 관찰자로서 담고 창작하는 게 더 적성에 맞다고 느껴요.”
그는 자신의 삶에서 축구는 중요한 키워드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했다. “축구를 향한 마음은 제 삶에서 이 방 정도를 차지해요. 집의 4분의 1 정도고요.” 조승훈의 의견과 별개로, 그의 집과 삶이 남다르게 멋진 건, 4분의 1에 해당하는 이 붉은 방이 몹시 근사하게 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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