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의 순간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떠올린다
방금 전에도 책상에 놓여 있는 타코를 먹을지 말지 고민했다. 결국 먹었지만 몇 분 뒤 다시 생각했다. 그 타코를 먹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더 쾌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까.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는 생각이다. 예민한 기질 탓에 선택 앞에서 스스로를 갉아먹는 고민을 놓지 못한다. 내겐 사소한 선택도 후회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선택의 순간은 내게 끝없는 미로를 헤매는 기분이나 마찬가지다. 공허한 미로를 헤매던 중에 지금의 내가 되었고, 아직 도착지를 찾지 못했다. (도착지란 스스로 꽤나 만족스러운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을 갉아먹으며 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너의 선택이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든 그건 너의 운명이다.”
나는 운명론을 믿는다. 하지만 그 믿음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방어기제일 뿐이다. 그래서 저 말에 공감하긴 어려웠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나’는 ‘리처드 메든 대위’로부터 ‘내’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식의 전화를 받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죽게 된단 말인가?’ 그렇게 도망자의 삶이 시작되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나’는 한 정원을 마주한다. 그 정원을 돌면서 ‘나’는 A와 B의 순간을 곱씹으며 다양한 결과를 상상한다. 그러다 ‘알버트 박사’가 있는 공간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알버트 박사가 읽어주는 ‘취팽’의 편지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다양한 미래들에게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남긴다.” 알버트 박사는 ‘다양한 미래들’이라는 구절에서 공간이 아니라 시간의 무한한 갈라짐을 떠올리고, 취팽이 말한 정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셀 수 없이 많은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두 갈래로 갈라지거든요. 그 미래들 중의 하나에서 저는 당신의 적입니다.”
나는 수많은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한 끝에 지금 일을 하고 있다. 아주 옛날을 돌이켜보면, 나는 에디터를 꿈꿨다. 거의 12년에 걸쳐. 하지만 막연하게 느껴졌던 직업이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홍콩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먹고살지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어떤 일 하고 싶어?” 누가 물었고, 나는 “공공기관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5초 뒤 “아니, 사실 잡지를 만들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꿈을 이뤘지만, 이룬 후 직면한 갈림길은 꿈을 좇던 당시보다 훨씬 많이 갈라져 있다. 그러니까 더 가혹하다고 느껴질 만큼 잔인한 선택과 고민의 순간이 이어지고 있다.
어느 날 지인이 책을 손에 들고 말했다. “이걸 누가 읽을까. 요즘 시대에 읽기는 할까.” 그 당시 나는, 이 일에 피로와 회의를 느끼며 의미를 찾지 못할 때라, 그 문장이 꽤 자극적으로 들렸다. 내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나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 선배들은 경험이 많아 생각도 정립되어 있고, 다룰 수 있는 단어, 문장, 주제를 많이 확보하고 있지만 나는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생각이 불완전하고 얕다. 그 얕은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도 체득하지 못한 상태다. 이 모든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어차피 사람들은 짧고 유쾌한 영상에만 집중하는 것 같고, 나도 그렇다. 그러니 나도 주류를 따라가야 하지 않을까. 그게 고민이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으로 다시 돌아와, 알버트 박사가 취팽의 소설에 대해 논하던 중 이런 말을 한다. “시간에 대한 것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이라는 소설에서 나타나지 않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심지어 그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취팽의 정원을 설명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취팽은 시간 개념을 삭제하고 모든 현재가 무한히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들 속에서 여러 가지 다른 미래들이 존재하고, 한쪽의 길이 아닌 두 가지 모두의 상황들이 존재한다. A를 택하면 B는 사라지고, A에 따른 결과를 얻어버리면 B에 대한 결과는 영영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 구절을 읽자 작가 보르헤스가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라고 말하듯 머리가 댕 울렸다. 주류에 따라봤자 어차피 또 다른 고민이 생기겠지.
얼마 전, 한 래퍼를 만났다. 꽤 어린 친구였는데 힙합 문화의 문제를 이야기하다 이런 말을 했다. “랩은 힙합 하는 사람들만 들어요. 대중이 찾아 듣지 않으니까요. 항상 듣는 사람만 들으니까 주류에 들기 힘들고, 고여 있게 되는 거죠. 그 자리에서 돌고 돌아요.” 그런가. 종이 콘텐츠도 마찬 가지일까. 사람들은 디지털 콘텐츠에 열광한다.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라지만, 종이 콘텐츠가 잊히면 어쩌지? 고민이 또 앞선다.
“취팽의 작품에서는 이런 모든 결말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각 결말은 또 다른 갈라짐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미로의 길들이 모이게 됩니다.” 알버트 박사의 말이다. 그래, 맞아. 앞에서도 언급했듯 취팽은, 그리고 작가 보르헤스는 다른 미래들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종이책은 더 이상 대중이 자주 찾는 문화가 아니라는 말, ‘누가 읽기는 할까’라는 그 지인의 말은 결말이 될 수 없다. 종이에 인쇄된 글을 누군가는 찾아 읽을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건, 과거의 선택이다. 이 일은 에디터를 갈망했던 내가 내린 결정이다. 거기엔 분명 이유가 있었고, 여전히 선택한 것에 욕심 갖고 임하는 중이다. 욕심과 열망으로 어지러운 미로를 헤매는 게 고되지만, 행복하다. 이 일의 목적은 재미다.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다. ‘만일 내가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또 다른 상황이 생겼겠지. 어쩌면 다른 선택을 내렸더라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이 이어지든, 이 일에서 어떤 선택과 고민의 순간이 생기든,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정해진 결말이 아니다. 가능성이 있건 말건 나는 내 일을 한다. 그렇게 하고 싶다. 힙합이 고인 물이 될까 두렵다는 그 래퍼도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도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라고.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