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강화 : snowdrop>(이하 <설강화>) 촬영을 마친 지 1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설강화> 이후 바로 이제훈 감독님의 <언프레임드>를 촬영했어요. 그러고 나서 미이케 다카시 감독님과 <커넥트> 촬영에 돌입했고요. 그사이 공개된 작품이 없어서 공백이 생겼는데, 저는 계속 촬영이 이어지다 보니 공백을 못 느꼈어요. 팬과 시청자가 많이 기다리실 것 같아요.
맞아요. 정해인은 매년 꼬박꼬박 작품을 발표하던 배우니까요.
어쩌면 올해 <커넥트>가 공개될 수도 있어요. 아니면 내년 초가 될 수도 있고요.
<커넥트>는 웹툰 원작이죠. 웹툰 원작 드라마가 많고, 원작이 알려진 경우도 꽤 돼요. 그래서 시청자가 캐릭터의 전사를 알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커넥트 >를 살짝 소개하자면, 초능력 설정이 재밌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데드풀> 느낌이 있죠. 신체 일부를 상대와 공유하게 되면서 사건이 일어나요. 일반적인 서스펜스 스릴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에요. 음, 다크 히어로라고 해야 할까요? 마냥 정의로운 영웅과는 결이 달라요.
히어로물의 변주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요. 평면적인 히어로 캐릭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도 있고요. 게다가 미이케 다카시 감독님 스타일도 예사롭지 않죠.
감독님이 새로운 시도를 정말 많이 해요. 워낙 영화를 많이 만드신 대가셔서 저도 기대가 큽니다. 얼마 전 후시 녹음하면서 일부 장면을 봤는데요. 무척 잘 나온 것 같습니다.(웃음) 관계자분들도 결과물이 잘 나왔다고 해서 내심 기대하고 있습니다.
배우가 영역을 확장하는 건 언제나 기대됩니다. 특히 해인 씨는 로맨스에 최적화된 배우라는 이미지를 완만하게 극복했어요.
그렇죠.저의 주연 작품은 주로 로맨틱과 멜로 장르였어요. 조연으로도 많이 출연했는데 <슬기로운 감빵생활>도 있어요. 데뷔 이후로 계속 새로운 시도를 해왔어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는 게 낯설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캐릭터에 도전한다는 인상도 받았어요. 새로운 장르, 새로운 연기에 도전한다고요.
매 순간이 도전이에요. 데뷔 이후 도전의 연속이었어요. 아이돌, 호위 무사, 군인, 경찰, 막내아들, 뱀파이어를 연구하는 학자도 했고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연기에 대한 욕심보다는 작품이 다르기에 캐릭터도 다른 거죠. 캐릭터에 이야기가 잘 녹아들고, 연출자가 저의 새로운 모습,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 걸 보면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또 저의 그런 면을 찾아주셔서 감사하고요.
연기가 도전이라면, 작품을 선택하는 명확한 기준이 있나요?
기준이 명확하지는 않아요.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정확히 선 긋지는 않아요. 가능성을 열어두고 유연하게 생각해요. 제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아직 명확하지 않아요. 연기를 좀 더 해봐야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기 경력이 이제 9년밖에 안 됐어요.
9년이면 오래된 거 아닙니까. 회사로 치면 과장급인데요.
(웃음) 얼마 전 데뷔 9주년이었어요. 팬분들이 이벤트도 해주시고, 꽃다발도 보내주셔서 무척 감사했어요. 선물 중에 반팔 티셔츠가 있었는데, 등판 부분에 제가 출연한 작품들을 나열해놓았어요. 세어보니 24편이더군요.
9년 동안 24편이면 굉장히 성실했네요.
저는 작품 수를 세어본 적 없거든요. 그런데 티셔츠에 나열된 작품 목록을 보니 진짜 열심히 했다고 다시 한번 느꼈어요. 감회가 새로웠죠. 심지어 작품명이 영어로 적혀 있어서 신선했어요.
작품 제목을 보면 촬영하던 순간들이 떠오르겠죠?
그럼요. 그 당시 촬영 현장과 함께 일했던 파트너들, 감독님들 다 떠오르죠.
배우는 연기한 캐릭터가 어떤 형태로든 몸에 남을 것 같아요. 그것이 경력이고 흔적이겠죠. 또 그런 흔적이 일상에서 문득 나타날 때도 있을 것 같고요.
사실 저는 안 그래요. 캐릭터에 깊이 빠져서 생활하는 편은 아니에요. 연기가 직업인 사람이잖아요. 연기는 직업일 뿐, 제가 그 인물은 아니죠. 물론 촬영 기간에는 저만의 바이브, 생각, 가치관을 캐릭터에 맞출 때도 있는데, 촬영이 끝나면 정해인으로 다시 돌아와요. 작품과 캐릭터에 깊게 함몰되지는 않아요. 정해인이라는 사람과 캐릭터는 별개로 구분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게 건강한 삶인 것 같아요.
일과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아요. 특히 연기는 작중 인물로서 행동하는 창작 행위잖아요.
연기에 자신의 가치관이 투영될 수도 있고요.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아닌 캐릭터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하니 더 깊이 그 인물에 다가서야 할 테고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첫 번째 단계예요. 제가 그 캐릭터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캐릭터를 완벽히 알 수는 없어요.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죠. 캐릭터와 가치관이 다를 수 있죠. 예를 들어 사이코패스 살인마 캐릭터를 가치관이 맞지 않아서 고사한다면, 가치관이 맞는 캐릭터만 연기해야 하잖아요. 그럼 할 수 있는 장르와 캐릭터가 한정되겠죠. 그러니 캐릭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유연하게 사고해야 해요. 사고가 얽매이지 않아야 해요. 관념에 정답은 없죠.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해요.
도전에 대해 더 이야기해보죠. 새로운 인물에 도전할 때, 과감한 변신을 시도할 때, 그래도 이것만큼은 유지해야겠다는 것이 있나요?
건강을 잃으면서까지는 안 하려고 해요. 최대한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어차피 작품은 힘들어요. 이왕 힘든 거 조금이라도 즐겁게 일하고 싶어요. 현장에 있는 스태프들, 동료 배우들 모두 고생하세요. 일이 힘든데 사람한테서 스트레스 받으면 더 힘들 거예요. 고통이 가중되지 않도록 스트레스는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노력해요.
스트레스를 안 만드는 해인 씨만의 방법이 있나요? 현장에서는 사람들 생각이 달라서 서로 부딪칠 수도 있잖아요.
생각은 다를 수 있죠. 그런데 생각이 다른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다름을 인정하고, 양보할 건 양보하며 조율하죠. 저는 의견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의사전달을 하지 않아요.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할 말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게 중요해요.
24편의 작품 현장에서 그렇게 조율해온 건가요?
매 순간이 그런 작업의 연습이었죠.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 기억나요? 돌이켜보면 바뀐 게 있겠죠. 세상을 보는 관점도요.
어마어마하게 많이 변했죠.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세상을 보는 관점도 바뀌었고, 주변에서 저를 보는 시각도 변했어요.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아요.
필모그래피에는 공백이 거의 없어요. 공백이 있다고 한들 그 기간에 촬영하고, 작업했죠. 너무 열심히 살았어요. 번아웃 겪은 적 있나요?
번아웃을 겪는 선배님들이 많아요. 배우나 연예인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번아웃을 겪고 있어요.
번아웃을 이겨내는 해인 씨만의 방법이 있습니까?
네, 저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가족이에요. 저에게 안식처이자 휴식처가 되어줘요. 감사할 따름이에요. 또 취미 생활에서도 찾았어요. 운동을 좋아하는데, 최근에는 골프에 푹 빠졌어요. 지금도 골프 연습장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골프가 너무 좋더라고요. 골프를 왜 치는지 몰랐는데, 부모님 모시고 라운드해보고 알았어요. 부모님과 할 수 있는 취미 생활이 흔치 않은데,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장점입니다.
아들과 함께 라운드하면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셨겠어요.
(웃음) 특히 아버지가 좋아하시더라고요. 평소 저는 집 밖에 잘 안 나가요. 그런데 요즘에는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해요. 사람도 좀 만나고요.
왜 외출을 자주 안 해요? 집이 그렇게 좋은가요?
집이 편하고, 나가기 귀찮고 그래요. 누가 찾아오면 말리지는 않지만 일단 편해요.(웃음) 그리고 이제 라운드 다니는 게 세상 밖으로 나가는 거죠.
뜬금없지만 해인 씨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뭐예요?
자유가 큰 것 같아요. 건강하지 못하면 자유가 주어져도 자유롭지 못하겠죠. 그런 점에선 건강이 제일 중요하네요. 건강해야 일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여행도 다니고, 가족과 시간도 보내고, 팬분들도 만나고요. 작품도 할 수 있고요. 자유는 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죠.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고민해야 하죠. 자유는 책임이기도 한데, 자유에 대한 책임을 안 지면 문제가 발생하죠.
그럼, 이슈는요? 지금 관심 있는 이슈는 무엇인가요?
지금 장마와 폭염이 심각해요. 그래서 날씨에 예민한 상태고요. 지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생각에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 외에도 정치면, 사회면, 경제면 다 찾아 보고요. 특히 글로벌 이슈에 관심이 많아요. 경제, 전쟁 등 세계정세가 심상치 않아서 걱정됩니다.
맞습니다. 세상이 평화로웠으면 좋겠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아쉽네요. 그나저나 지금 30대 중반이에요. 서른다섯. 무엇을 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건강하다면 열심히 일해야죠. 일하려면 건강해야 하고요. 저는 몸이 재산이라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촬영에 지장을 주면, 수십 명의 스태프들 스케줄에 폐를 끼치게 돼요. 작품에 들어가면 제 몸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건강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고, 열심히 일도 해야 할 나이고요.
작품을 계속 이어오고 있어요. 작품과 작품 사이 준비 기간도 짧고요.
작품 텀은 짧으면 한 달, 길면 3개월 정도예요. <커넥트> 촬영이 2월에 끝났고, <D.P.> 시즌2 촬영 전까지는 꽤 쉬었어요.
<D.P.>의 안준호는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캐릭터입니다. 진짜 군대 후임을 보는 듯했거든요.
감사합니다.
연기한 인물 중 가장 애정 가는 캐릭터를 한 명만 꼽아보죠.
한 명 꼽기는 너무 힘든데, 제가 지금 <D.P.> 촬영을 하고 있으니 안준호를 꼽겠습니다. 물론 촬영 때문만은 아니에요. <D.P.>가 시즌제로 진행될지 몰랐어요. 시즌 1 촬영 끝나고, 이 작품이 잘될지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스태프와 관계자들에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우리 이대로 다시 만나서 못다 한 뒷이야기 더했으면 좋겠다고요. 근데 그게 현실이 됐어요.
축하합니다. 그럼 시즌 2로 제작진 재회했을 때 다들 상기됐겠어요.
그렇죠. 1년 반 만에 다시 만났는데,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서너 달 못 본 느낌이었죠. 현장 분위기가 정말 좋아서, 몸은 힘들지만 재밌고 보람 있었어요.
그리고 <D.P.>는 배우들과의 케미도 빼놓을 수 없어요.
너무 좋죠. 교환이 형, 석구 형, 성균이 형과도 좋았고요. 시즌 2에 새로 참여하신 선배님들도 있어요. 아직 그 선배님들과 촬영을 못 했는데, 무척 설렙니다. 새로운 캐릭터도 기대되고요.
<D.P.>는 디테일이 생생해 군필자들의 공감을 일으켰어요.
아, 시즌 2에서는 더 공감되실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웃음)
군복 입으니까 옛날 생각 좀 나죠?
저는 개구리 군복 세대여서, 디지털 군복은 처음 입어봤어요. 그럼에도 군 생활이 꽤 생각나더군요. 운전병이었거든요. 부대 밖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군복무 기간에도 사회를 구경할 수 있었죠.
세월이 많이 지나도 군 시절은 늘 엊그제 같습니다. 시간은 빠르고, 시대는 무정하게 변하는 것 같아요. 연기 활동을 하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느끼나요?
그럼요. 제가 하는 일은 사회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분야예요. 대중문화산업은 시대 분위기, 경제 상황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죠. 그래서 뉴스를 많이 보게 되기도 하고요. 또 경기가 침체되면 문화생활에 투자하는 게 어려워요. 자연재해나 코로나 등의 영향도 많이 받고요.
그래도 K-콘텐츠는 2020년대인 지금이 정점이지 않을까 싶네요.
K-팝, K-드라마가 많아졌는데요. 좋기도 하지만 불안하기도 해요. 그러니까 저는 행복하면 불안하거든요. 항상 좋을 수만은 없잖아요. 올라가면 내려가기 마련이고, 내려가면 올라갈 준비를 해야 될 테고요.
배우 입장에서는 K-콘텐츠가 절정의 인기를 끌고,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작품 생산이 증가해서 출연 기회도 늘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런 이유로 배우에게는 지금이 봄날이 아닐까요?
매출에 연연하지 않는 OTT는 없을 거예요. 모든 제작사, 감독, 배우도 마찬가지고요. 트렌드에 구애받지 않고, 소비층이 다양해지고, 니즈가 세분화된 건 사실이에요. OTT 채널이 늘어나면서 제작자나 감독님, 배우들이 일할 기회가 많아진 것도 분명한 장점이죠. 그런데 작품이 많아졌기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기는 쉽지 않아졌어요. 경쟁이 더 치열해진 거죠.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로서 기대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만족에 대해 생각해요. 스스로에 대한 만족도 있을 것이고, 저를 보여주는 직업이니 시청자에게도 만족을 줘야 된다는 생각도 있고요. 일종의 서비스업이라는 생각도 해요. 저와 저를 보는 이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잘 조절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균형감은 주연 배우의 책임감 같은 건가요?
네, 비슷해요. 만족에는 제 삶의 행복, 제 삶의 구심축 같은 것도 포함되거든요. 일적으로 만족감도 있고요. 사람 정해인으로서 만족하는 삶을 살고, 배우로서도 만족하고 만족시키는 일을 해야 해요. 둘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문제가 생기거든요.
균형을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해인 씨는 성실하고 꿋꿋하게 잘해낼 것 같습니다. 그런 든든함이 느껴져요.
저도 쉽지는 않아요. 주변 사람들 도움을 많이 받기도 하고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으니까요. 그 와중에 다행인 점은 저는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편은 아니라는 거죠. 집에 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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