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은 자신만의 인장을 확고히 지니고 있으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감독님께서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개척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 번 있었지요. <친절한 금자씨>를 만들면서 강한 여성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을 때,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면서 건조하고 미니멀하고 하드보일드한 세계를 탐험했을 때, 종교인을 주인공 삼아 뱀파이어로 만든 영화 <박쥐>를 연출했을 때, <리틀 드러머 걸>로 첫 TV 시리즈에 도전했을 때, 처음으로 영어 영화인 <스토커 >를 연출했을 때 늘 도전의 연속이었네요.
<친절한 금자씨>는 잔혹한 복수를 기획하는 센 여성 주인공이 리스크였군요?
맞아요. 그럴 때 스타라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용감한 기획을 할 때 필요한 수준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럴 때 스타들이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보다도 이영애 씨가 어떤 시선에도 위축되지 않고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죠.
<박쥐> 때도 종교인을 뱀파이어로 그려낸 데 대한 우려가 있었나요?
그냥 그때쯤에는 ‘저 감독은 그렇구나’ 했습니다.(웃음)
<스토커>를 찍으실 땐 감독님과 정정훈 촬영감독님을 제외한 사람 모두가 외국인이었지요. 그야말로 달을 처음 밟은 우주인의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요.
저, 촬영감독, 통역 셋이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곳에 딱 떨어졌죠. 우리나라에서 영화 찍는 일은 너무 익숙했는데, 미국에 던져지니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우선 대화도 통역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도 걸리고, 정확하게 의미가 전달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죠. 내 생각이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스태프들이 하는 일을 지켜봐야 하고요. 이런 것이 힘들었지만 창작자로서는 그 힘듦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 같기도 합니다. <스토커>는 지금 생각해도 내 영화 중에서도 유난히 긴장이 느껴지는 예민하고 날 선 영화입니다. 사춘기 소녀라는 소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촬영 당시 제 정신 상태가 반영된 영화가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면 반대에 부딪혔던 작업을 감독님만의 비전을 가지고 뛰어든 적이 있습니까?
의외겠지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인간미 있게 묘사한다는 것은 금기였고 위험한 일이었죠. 그런 소재로 큰돈 들여 영화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어요. 최악의 경우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잡혀갈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하자고 제작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을 만큼이요. 하지만 한국 사회답게 짧은 시간 안에 변화가 빠르게 일어났어요. 막상 개봉 때 되니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고 오히려 분위기에 편승하는 영악한 기획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었죠.(웃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경비구역 JSA>를 밀어붙여야겠다는 확신을 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이 영화는 체제의 반대로서 개인의 휴머니즘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켕기는 게 없었죠. 자신이 있었습니다.
여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 <아가씨 >가 4백28만까지 관객이 들 거라고 예상하셨는지도 궁금해지네요.
<아가씨>는 엎치락뒤치락하는 반전과 음모 속에서 사랑의 승리를 그려낸 영화니까 충분히 상업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정도 예산을 투자사에게 요청할 수 있었고 투자사도 동의한 것이죠. 동성애에 대한 대중의 생각도 많이 바뀌던 시점이었어요.
감독님에게 용기를 주는 것들은 굉장히 합리적인 이유군요.
그렇죠. 저는 마구 샘솟는 영감과 불굴의 의지로 가득한 타입이 아니잖아요.(웃음) 전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내가 이런 게 재미있다, 이런 게 해볼 만하다고 느꼈을 때 ‘나만 그런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은 잘 안 해요. 나도 한 명의 보통 관객으로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으로 하는 거죠.
감독님께서도 두려울 때가 있습니까?
경계하는 것은 있어요. 영화는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정서경 작가부터 제가 늘 함께하는 크루, 그리고 배우, 연출부 막내까지 나이도 배경도 취향도 다양한 사람들에게 많이 물어봐야 해요. 그럴 때 제가 조심하는 건 ‘답정너’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자꾸 그렇게 되죠. 내심 나는 이게 좋으면서도 “어떤 게 좋아?”라고 물어볼 때 이게 좋다는 사람 말만 듣는 걸 경계해요. 중요한 건, 사람들이 내가 선호하지 않는 것을 좋다고 말할 때 양자택일의 길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제3의 길을 찾으려고 해요. 그럴 때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고요.
영화엔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 보는 시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구안을 가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입니까?
홀로 서재에 앉아서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지 말아야겠죠. 평소에도 여러 사람들과 많이 얘기하고 다양한 채널로 여러 작품을 관찰할 필요가 있어요. 전 만나는 사람들에게 “요즘 재미있는 거 뭐 있냐”고 자꾸 물어봐요. (그는 에디터에게도 “요즘 무슨 영화를 재미있게 봤냐”고 물었다.)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취미나 고정된 취향에만 너무 깊게 빠져들어선 안 됩니다.
감독님에게 모험을 시도한다는 것이란 어떤 의미인가요?
작품이 성공하면 안주하고 싶어지게 마련이죠. 이건 먹힌다는 검증된 결과가 있으면 더 그렇게 하고 싶어져요. 영화 한 편 만들려면 2, 3년이 걸리고 백억대의 돈이 들어가니까 그런 유혹을 느끼죠. 하지만 그것이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을 것 같아요. 거꾸로 말하면, 내 인생에서 2, 3년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시도가 있어야 바짝 긴장하게 되고, 그만한 에너지를 분출할 수 있죠. 그런 긴장을 만들려면 항상 모험적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험이란 제게 에너지를 지니고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창작의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은 어떤가요?
<헤어질 결심>에서는 정훈희와 송창식의 ‘안개’를 들었던 순간이죠. 그렇게 특정한 순간이 있을 때도 있고, 여러 가지 원천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숙성되고 섞이면서 천천히 모습을 갖춰가기도 합니다. 확실한 건, 다음 작품 뭘 쓰지 하고 책상에 앉아 쥐어짜낸다고 되는 일은 없어요. 조금씩 숙성해나가야 하는 것이죠.
우주에 대한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 영화를 제작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습니까?
사춘기 이후로 SF 문학 팬이었기 때문에 많은 작품과 SF 영화를 접했지만, 영화로서는 다루기 어려운 편에 속하는 장르예요. 세계관 설정을 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할뿐더러 설명적이 되기 쉽죠. 어쨌거나 저의 SF에 대한 애호는 낯선 세계에 대한 애호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내가 SF 영화를 만든다면 외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일 먼저 생각할 것 같네요. 달은 인류에게 가장 친숙한 외계 공간이고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곳이면서도 낯설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런 이중성을 탐험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룬 것이 많은 감독님에게 여전히 야심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획한 것들 중 아직 만들지 않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헤쳐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서부극도,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작품도 있는데요. 일본 라이트 노벨 <학살기관>이 원작인 영화로 국제분쟁과 인종 말살이라는 현재적인 이슈를 다루는 이야기죠. 내가 꿈꾸는 건 미지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해결하고 싶은 기획이 산적해 있고, 그 서랍을 하나씩 비우고 싶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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