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콜롬보
출연료는 명탐정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추리 장르 영화나 시리즈에서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편법 중 하나다. 시리즈 추리물에 등장한 범인이 누구인가 쉽게 간파하기 위한 묘수 중에는 현실 세계에서 출연료를 얼마나 많이 받는지 따져보는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사건을 일으키고 범죄를 숨기려고 애쓰는 범인이 중요한 인물이기 마련이다. 이런 배역에는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이 있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기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탐정을 제외하고 배우들 중에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는 배우는 범인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배우가 등장하느냐만으로 누가 범인인지 벌써 티가 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본가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궁리해왔다. 그중에서 가장 화끈한 방법이 바로 1970년대 TV 시리즈 <형사 콜롬보>에서 시도한 수법이다. 아예 대놓고 시작하자마자 범인이 누구인지 보여준다!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들고, 범인의 정체를 밝히며 깜짝 놀라게 하는 재미를 아예 시작부터 포기한다.
<형사 콜롬보>는 형사가 과연 어떤 단서를 이용하고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범인을 밝히는지 풀이 과정에 집중한다. 추리물에서 범인은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여러 가지 속임수를 사용하고 거짓말로 딱 잡아뗀다. 뛰어난 범인은 밝히기 어려운 정교한 속임수와 거짓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속임수와 거짓말을 어떤 추리로 깨뜨릴 수 있는가를 수수께끼로 제시하고 그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형사 콜롬보>의 재미다.
게다가 <형사 콜롬보>는 ‘출연료는 명탐정’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을 넘어서서, 그 특징을 이야기의 재밋거리로 적극 활용한다. 시작하자마자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미 공개했으므로, 범인을 숨길 것 없이 그냥 범인의 심리, 감정, 행동, 죄책감, 초조함, 두려움 등을 자세하게 드러내어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가면, 탐정 역할인 콜롬보가 서서히 범인을 추적해오는데, 그때 범인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이나, 신경질적인 감정의 변화도 잘 보여준다.
<형사 콜롬보>에서는 주인공 콜롬보를 볼품없고 꾀죄죄하고 어리숙한 인물로 그려냈다. 범인 역할은 정교한 속임수를 꾸밀 만한 지적인 전문직 종사자, 부유한 사업가, 명망 높은 유명 인사인 경우가 많다. 그런 범인의 모습을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가 거창하게 표현하도록 해두었다. 시청자는 저절로 겉모습이 평범한 콜롬보와 같은 입장에 서고, 그의 입장에서 범인의 화려한 인생을 구경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같은 사회의 거물이 허름해 보이지만 성실하게 조사해나가는 콜롬보에게 점차 무너져가는 모습이 드러날 때, 극적인 긴장감도 더욱 강해진다.
소설가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 큰 문제가 있고, 단점이 많은 출발이라고 느낄 때, 나는 종종 그 단점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풀어가는 법도 생각해본다. 콜롬보 덕택이다. 소설을 쓰다가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너무 진부하다’ 또는 ‘이런 소재의 이야기는 내가 잘 모른다’ 싶은 생각이 들 때, 나는 <형사 콜롬보>가 ‘출연료는 명탐정’ 문제를 받아들이고 아예 뒤집어 활용한 것을 본받아, 내가 문제라고 생각한 것을 뒤집어서 장점으로 활용하는 이야기를 개발해낼 수 있을지 고민해본다. 또한 이상한 사건이나 특이하고 신선한 배경을 던지면서도 독자가 쉽게 공감해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를 구상할 때도, 나는 종종 콜롬보의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초라한 행색을 떠올려보곤 한다. 말하자면, 콜롬보는 문제의 답보다도 풀이 과정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탐정이다.
Words 곽재식(작가)
루 아처
살면서 지금까지 몇 개의 명함을 지녔다. 직함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회장이나 사장을 원한 건 아니다. 어린 시절 한동네에 살던 사기꾼 아저씨들과 감옥을 들락거리는 돈 많은 아저씨들의 직함 역시 회장 아니면 사장이 아니었던가. 몇 년 전부터 내가 가지고 싶던 직함은 오로지 이거였다. 소설가 겸 사립 탐정. 나는 로스 맥도널드가 창조한 ‘루 아처’ 같은 사립 탐정이 되고 싶었다. 사건이 없을 때는 사무실에서 파리를 벗 삼아 소설을 쓰기도 하는 루 아처는 여자들의 호감을 제법 살 수 있는 외모에, 180cm가 넘는 키와 다부진 체격을 지녔다. 군 정보부에서 근무했고, 경찰로 일한 적도 있다. 똑똑하고, 위협에 맞설 근력과 단서를 끈질기게 찾아다니는 인내심도 있다. 이런 외적 조건은 갖췄지만, 그는 여타의 하드보일드 소설 속 사립 탐정처럼 거친 편은 아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차분히 질문하는 사립 탐정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내게 여느 사립 탐정 못지않게 박력 있는 사람이다. 그 박력의 원척 역시 질문이다. 그의 질문은 에두르지 않고, 어설픈 곳에서 멈추지도 않는다.
루 아처는 <블랙 머니>에서 자신을 프랑스인이라 밝힌 용의자를 의심하여 다섯 가지 문제를 낸다. “프랑스 문화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육받은 프랑스인이라면 답할 수 있을 거라고 들었어요. (중략) 하나. <위험한 관계>의 원작을 쓴 사람은 누구이며 현대 영화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답변자가 그의 불어 발음을 비웃으며 답해도 그는 굴하지 않고 또 묻는다.
“데카르트는 신체의 어느 부위에 영혼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는가?” 용의자가 나머지 질문에도 모두 답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묻는다. “한 가지만 더 대답해주시죠, 이렇게 잘 답해주셨으니. 당신은 누구고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자신만만했던 용의자는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루 아처에 비해 키가 작고, 근력이 적고, 인내심이 부족하다. 쓰다 보니 사립 탐정보다는 용의자에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가진 자질 중 한 가지는 지녔다. 이는 루 아처와 소설가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둘 다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소설가가 엉망인 세상을 향해 질문하는 사람이라면(“차별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사립 탐정은 범죄자와 용의자에게 질문한다(“그날 밤, 어디 있었어요?”). 영화 <올드보이>의 대사처럼 질문이 잘못되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다. 정확한 질문은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바꾸는 힘이 있고, 실종자와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고 붙잡을 수도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공인된 탐정제도가 없다. 대선 기간 중 한 후보가 탐정제도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는 낙선했지만 좋은 공약은 얼마든지 갖다 써도 된다. 우리에게 ‘탐정업’을 허하라!
Words 김기창(소설가)
쉬유이 형사
대표적인 중화권 추리소설 작가 중 한 명인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속 인물을 소개한다. 이중적인 캐릭터 설정 덕에 대단히 매력적인 작품이 탄생했다. 초중반까지의 설정은 기억을 잃은 형사가 마치 타임슬립한 것처럼 사건 현장으로부터 6년이 지난 시점에 눈을 뜨며 전개된다. 그런데 중후반에 주인공의 과거가 밝혀진다. 그가 명탐정 역할을 하면서 후반 이후의 전개가 뒤집히는데 여기서부터 놀라운 흡입력을 일으킨다. 도입부에서 시체가 ‘수고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넨 장면이 환상성으로 읽혔는데 진상이 모두 드러난 뒤 리얼한 현장 묘사였다는 등 여기저기 배치된 반전도 놀랍다. 다채로운 설정과 개성 있게 변모한 인물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이었다.
변화하는 인물이 좋다. 다소 남성적인 색깔이 뚜렷한 추리 미스터리 플롯 속에서 세상 나쁜 놈이었던 형사가 사건을 해결한 뒤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는 풍경도 좋다. 뚝심 있게 하나의 가치를 밀고 가는 사람도 좋지만 어제와 오늘이 평행 세계를 오가듯 달라지는 세상 속에서 어떤 뚝심은 불통이 된다. 사람이 변하는 건 당연할 테지만 요는 어떤 변화일지가 관건이다. 나는 우리의 주인공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밀고 나가길 원한다. 그러다 어떻게든 변모하길 바란다.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최근 화제라는 미스터리 작품들을 읽다 실망했다. 무리하게 독자의 뒤통수를 치려는 시도가 보였다. 어떤 작품에선 탐정이 다중인격이기도 했고 때론 범인이었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려다 최소한의 개연성과 도덕성마저 무시하는 작품도 있었다. 사건 해결 당사자가 사이코패스이거나 트릭을 위해 살인이나 자살까지 감행했다. 이런 전개에 놀라기는 해도 마음을 뺏기진 않는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미스터리에 정의가 빠지면 아무리 영민한 두뇌 게임이 펼쳐져도 그뿐이다. 플롯조차 영 기억에 남질 않는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답이 없는 세상일수록 가치를 놓치지 않으면 변화해가는 인물이 마음을 끈다. 제 삶에 작은 변화를 만들어낸 순간, 그 뒤에 수없이 갈등한 무수한 질문에 대한 답이 묵직하게 묻어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 우리 현실만은 호러로 만들 순 없으니까. 나도 변하려고 한다. 세계와 이웃에 대한 성찰을 새로 시작해야겠다. 때때로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들이 벌어지나 수없이 질문한 뒤 내 삶으로, 또 글로 답을 내놓아야겠지.
Words 황모과(SF 소설가)
필립 말로
사도의 뜻은 ‘거룩한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이고, 대중문화를 즐기는 우리는 이런 사도 캐릭터를 많이 알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 기꺼이 위험을 감내하고 이웃을 지킨다. 하지만 능력이 악당을 압도할 만큼은 아니어서 항상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이겨낸다. 모든 정의의 사도는 자신의 능력에 걸맞은 적을 맞이한다. 배트맨은 자신과 같은 인간 범죄자들과 대결한다. 사도들은 매번 죽기 직전까지 가면서 평화를 지켜내기에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 몇 년 전 뉴욕에 갔을 때 맨해튼 대로변에 배트맨을 실존 인물처럼 기리는 박물관이 있어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고담시 못지않은 대도시면서 범죄의 소굴인 도시로는 할리우드가 있다. 밤마다 누군가 손발이 잘리고 자동차에 깔리고 돈을 강탈당하고 살해된다. 추리소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탐정 ‘필립 말로’가 활동하는 무대다. 탐정 말로는 “짓눌리고 공허로 가득 차 있는” 할리우드에서 아무도 바라지 않는 진실 하나를 캐기 위해 목숨을 건다. 어쩌다 알게 된 술친구 레녹스가 멕시코로 도망가는 데 도움을 주고 나서는 그의 아내가 무참하게 살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레녹스도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자살을 한다. 말로가 의혹을 캐기 시작하자 경찰부터 살해된 아내의 가족, 레녹스의 깡패 친구들까지 나서 말로를 압박한다. 그들 모두가 원하는 건 사건을 그만 묻자는 것. 한편 다른 사건들이 이어진다. 레녹스 부부와 묵은 관계가 있는 웨이드 부부가 또 차례로 목숨을 잃는다.
필립 말로는 배트맨만도 못한 캐릭터다. 배경도 없고 돈도 없다. 말로는 고아원에서 성장해 탐정이 됐고 “돈도 없고 가족도 없고 장래도 없”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졸때기”다. 하지만 그는 시궁창에서 한 조각 진실을 찾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거창한 사명감은 없을지라도. 자신이 왜 얻어터지고 유치장에 갇히면서도 탐정 일을 계속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더러운 세속 도시 할리우드에는 “무슨 일이든 곤란한 지경에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사연은 저마다 달라도 경찰에는 부탁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에게 도움을 청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능력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게 눈에 보이는 완력이나 초능력이 아닐 뿐이다. 필립 말로에게는 집요함과 추리 능력이 있다. <기나긴 이별>에서 별 상관 없어 보이는 사건과 인물들을 꿰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하나의 범죄로 엮어내는 말로의 지성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고담시의 배트맨이 자신의 평범함을 배트수트와 모빌로 극복했듯이, 탐정 말로는 자신의 평범함을 집요함과 추리력으로 극복한다. 배트맨이 악당들과 주먹으로 싸운다면 말로는 말발로 싸운다. 사실 탐정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말이다.
Words 백민석(소설가)
셜록 홈스
명탐정 하면 셜록 홈스. 셜록 홈스 하면 명탐정. 코넌 도일이 창조한 이 괴짜 천재 사립 탐정은 이론의 여지없이 현대 추리소설 속 온갖 ‘명탐정’들의 원형이다. 하지만 정작 그가 소설 속에서 펼쳐 보인 추리가 전부 명탐정의 이름값에 부합하는지 묻는다면, 다소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홈스의 추리가 미심쩍었던 사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으론 <얼룩무늬 끈>을 꼽을 수 있다. <얼룩무늬 끈>은 코넌 도일 자신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은 걸작이지만, 정작 후대의 독자들로부터는 내용이 터무니없다는 비판을 지속해서 받아왔다. “인도에서 가장 치명적인 독사”라고 소개된 ‘늪살무사’는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 뱀인 데다가, 녀석이 지팡이에 얻어맞아 환풍구로 되돌아갔다는 설명도 뒤로 기어갈 수 없는 뱀의 신체 구조와는 모순되니까. 홈스가 정녕 명탐정이었다면 충실한 조수 왓슨 앞에서 이런 오류투성이 설명을 늘어놓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만일 이것이 오류가 아니었다면? 1948년 파충류학자 로런스 클로버는 홈스가 읽었을 법한 당대의 파충류학 연구 자료를 샅샅이 살핀 끝에, 홈스가 말한 ‘늪살무사’가 사실은 인도코브라와 독도마뱀의 인위적인 잡종이라고 주장했다. 홈스는 힌두스탄어로 뱀을 뜻하는 ‘샘프(Samp)’와 독도마뱀의 분류학적 명칭인 ‘헤로덤(Heloderm)’을 섞어 ‘샘프-애덤(Sampaderm)’ 이라고 말했는데, 이를 왓슨이 ‘늪살무사(Swamp Adder)’로 알아들었으리라는 것이 클로버의 주장이다. 코브라의 독니를 지닌 도마뱀이라면 밧줄을 타고 뒤로 기어 올라갈 수도 있었을 테니 홈스의 추리는 정확했던 셈이다.
“모든 불가능한 선택지를 제거한 뒤에 남은 건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사실”이란 말로 대표되는 홈스의 추리 비법은 범접 불가능한 천재성이 아닌 보편적 논리이다. 누구라도 사실을 바탕으로 논리를 올바르게 쌓아 올린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과학에 밝지 못했던 18세기 영국인 남성이 쓴 오류투성이 소설의 주인공보다도 더 정확히 진실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누구나 홈스와 같은, 나아가 홈스 이상의 명탐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불완전한 명탐정이 독자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영감의 본질이 아닐까.
Words 이산화(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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