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어디 뒀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혼란한 시국에 2년 만에 밀란 컬렉션을 가려니, 그 전에 미리 치러야 할 마감은 버겁고, 각 나라에서 요구하는 증명서는 오만 가지. 정신없는 와중에 이것저것 신청하다 보니, 그래서 지금 내가 작성하는 이 서류가 뭘 위한 거였더라 헷갈렸지만 그래도 어떤 블로그에서 해야 된다 했으니까 일단 했다. 그 와중에 여권 없이도 손이 저절로 여권번호를 적어 넣는데, 2년이 지나도 여전히 살아 있는 손맛이 참 짜릿하구만 싶었다가 문득 설마 내 여권 유효 기간이 지난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왜 아니겠나. 이미 작년에 만료. 2월호 커버 촬영 가는 길에 용산구청 내 사진관에서 사진 찍고 여권 발급 신청하는 데까지 30분 컷. 며칠 후 다시 이런저런 증명서 신청 현황들을 살피며 익숙지 않은 새 여권 번호로 한 자 한 자 바꿔 넣었다.
아무도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도 이렇다 할 깔끔한 안내를 해주진 못한다. 모든 건 현지에 가서 직접 겪어보기 전엔 모를 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선 호텔을 비롯한 공공시설 이용 및 출입을 위해선 EU 디지털 인증서인 그린패스(Green Pass Rafforzato) 제출이 의무였다. 한국의 백신 증명 QR 코드 같은 건데, 백신 접종 완료자뿐 아니라 코로나 완치자, 48시간 이내 코로나 테스트 음성 결과를 소지한 사람에게도 발급된다는 것. 사전에 미리 그린 코드를 발급받을 수 있으면 참 편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EU 시민이 아닌 단기 체류자에겐 쉽게 발급해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아무리 온라인 신청을 등록해도 도통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후기들을 찾아본 바론 발급 확률이 낮다고. 그나마 기대를 품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감감 무소식. 한국에서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를 발급받아 가긴 할 테지만, 과연 이 서류가 현지에서 통하는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결국 현지에 머물며 이틀에 한 번씩 항원 검사를 통한 음성 확인서를 사용해야겠다 싶었는데, 문제는 슈퍼 그린패스. 이건 또 뭐냐면, 백신 접종 완료자와 코로나 완치자에게만 발급되는 한 단계 높은 방역패스인데, 프라다에선 슈퍼 그린패스가 없으면 입장이 안 된다는 거다. 그러니까 아무리 항원 검사를 백 번, 천 번 한다 해도 프라다 쇼는 볼 수 없다는 것. 사실상 나는 2차 백신 접종까지 완료한 상태였기 때문에, 프라다 쇼에 당당히 입장할 수 있는 슈퍼 그린패스급 자격 요건이 충분했지만, 한국에서 발급받은 백신 증명서가 효력이 있을지에 대해서 끝까지 확답받지 못했다.
출발을 코앞에 두고 조금이라도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스위스의 제네바패스는 상대적으로 발급이 쉽고 EU 국가 안에선 모두 유효하다고. 운 좋으면 일주일 이내 발급될 수도 있다니까, 일단 그것도 신청했다. 이제 출발 전 실물 프린트로 챙겨야 할 출국 3종 세트를 체크.
첫 번째 제발 슈퍼 그린패스의 대안이 되었으면 싶은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 가끔 제출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니까 10장 정도 넉넉히 프린트해뒀다. 두 번째는 디지털 승객 위치 정보 서식인 dPLF 서류. 이건 사전에 EU dPLF 사이트에 접속해 등록해두어야 한다. 최종 목적지의 숙소는 물론 도착할 때 이용하는 모든 항공기에 대한 정보와 좌석 번호까지 세세히 입력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코로나 음성 확인서. 이탈리아의 경우 48시간 내 검사 결과가 있으면 되지만 하필이면 난 폴란드를 경유하게 되어, 폴란드 입국 기준으로 24시간 내 음성 확인서가 필요했다. 오전 11시 비행기였으니 가장 빠른 오전 7시에 공항 내 검사소에서 안티젠 항원 검사 후 한 시간쯤 대기했다가 음성 결과가 나오면 그 증명서를 인쇄하여 구비해야 비로소 ‘코시국 출장 세트’ 완성.
설명만으로도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은 것들을 다 했다. ‘출발하기도 전에 질린다’는 얘길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공항은 한산한 데 비해 이런 저런 서류 검사로 각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는 것도 평소보다 몇 곱절은 오래 걸리고. 결과적으로 밀란에 도착하는 데 체감상 24간이 꼬박 걸린 거 같다. 도착도 전에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란.
예상은 했지만, 밀란은 패션 위크 분위기랄 게 없었다. 쇼 장 앞은 전에 없이 한산했고, 요란 법석한 중국 에디터들도 보이질 않으니 왠지 허전하기도. 출발 직전에야 오프라인 쇼가 확정되기도 하고, 또 현지에 도착해 디지털 진행으로 바뀌기도, 극소수 관계자만 허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 빅 쇼는 펜디였는데, 조명 가득한 쇼장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쿵쿵, 발을 동동 굴렀다. 왜 갑자기 설레고 그러는지.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등 굵직한 브랜드들의 화려한 런웨이 쇼들이 모두 하나같이 소중하고 짜릿해! 말펜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메간 폭스의 필립플레인 광고를 보며 ‘범블비 언니 엄청 오랜만이네’라고 얘기 했었는데 곧장 돌체앤가바나 쇼에서 머신 건 캘리와 함께 과감한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 그리고 프라다 쇼에 참석했던 프랭크 오션을 폰다지오네 프라다의 카페 로쉐에서 마주쳤을 땐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이런 게 패션 위크의 에너지.
결과적으로 왜 이렇게까지 걱정했나 싶을 정도로, 한국에서 발급받은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가 위력을 발했다. 백신 접종 날짜와 백신 종류만 확인되면 문제없었다. 10장도 필요 없이 고작 한 장을 마르고 닳도록 알뜰하게 사용했다. 보통 때처럼 끼니도 못 챙길 만큼 일정이 바쁘지도 않았지만, 조심스럽기도 하고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여러 모로 여유롭진 않았다. 돌아오기 이틀 전엔 귀국을 위한 PCR 검사, 하루 전날 폴란드 경유를 위한 안티젠 항원 검사 예약·대기·결과까지 체크 완료해야 했으니, 결국 체류하는 내내 숙소 근처에 발이 묶인 신세였다.
이 여정과 관련한 ‘TMI’를 나열하자면, 2년 만의 컬렉션 출장을 위해 신청하거나 작성한 코로나 19 관련 서류은 10가지. 그린패스, 제네바패스,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 EU dPLF, 한국과 이탈리아의 안티젠 항원 검사 음성 증명서, PCR 검사 음성 증명서, 시설 격리 동의서, 입원/격리 통지서, 격리 통지서 수령증. 글쎄 닥치는 대로 모아놨던 서류와 기억을 되새긴 거라, 중간에 뭔가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서류를 하도 많이 작성하다 보니, 새 여권 번호를 완벽하게 외우게 됐다. 공식적인 코로나 검사는 총 5회. 각 나라 코로나 검사를 비교해보자면, 한국이 월등하게 청결하고 훨씬 깊고 아프게 찌른다. 이탈리아는 너무 설렁설렁해서 오히려 불안하다. 입국 절차, 방역 수준 모두 비교 못 할 만큼 한국이 높다.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로 입장 거부당한 건 단 1회, 의외로 그저 그런 동네 카페였다. 긴 여정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집에 돌아와 격리할 때. 거실 창가에 앉아 큼직한 햇살 맞으며 일할 때 너무 평화로웠다. 격리 기간 중 제네바패스가 발급되었다. 호텔 주소를 잘못 적어 두 번 신청했는데, 그래서 제네바패스가 두 개. 이제 유럽이라면 어디든 편히 갈 수 있다. 그리고 막상 돌아오니,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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