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 하계올림픽은 정말 이상했다. 모든 종목에서 톱 클래스들이 자웅을 겨루는데 관중석이 텅 비었다. 금메달 순간에서도 들리는 현장 소리라곤 관계자들의 작은 쾌재뿐이었다. 포디엄 위에 선 메달리스트들의 인생 순간은 마스크에 가린 채 박제되었다. 한반도에서 도쿄올림픽 분위기는 더 썰렁했다. 반일 감정과 맞물렸다. 한국 사회는 도쿄올림픽을 일본의 흠결을 밝혀낼 청문회로 삼았다. 국내 언론은 연일 주최 측을 씹어 ‘국뽕 에너지’로 재생산했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 올림픽이 이렇게 혐오 포르노로 변질될 줄은 미처 몰랐다.
도쿄올림픽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대단한 착각이었다. 7개월 뒤 열린 베이징 동계올림픽은 설상가상이다. 텅 빈 관중석이 주는 시각적 이질감이 반복되었다. 올림픽 밖에서 강대국들이 유치한 기 싸움을 벌였다. 미국은 영혼까지 끌어모아 재를 뿌렸다. 정부 대표 참석 보이콧은 차라리 약과였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 올림픽 공식 후원 기업들을 대상으로 사상 검증을 했다.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에 대한 기업의 입장을 밝힐 용의가 있는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미국의 ‘꼰대’ 정치와 중국의 거대 시장 사이에 낀 올림픽 파트너들은 결국 침묵을 선택했다. 올림픽 파트너들은 이례적으로 조용히 올림픽을 보낸다. 곳곳에 설치되어야 할 마케팅 부스는 찾아볼 수 없다. 올림픽 광고는커녕 브랜드의 소셜미디어 채널에서조차 베이징올림픽을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코카콜라 혼자 중국 안에서만 올림픽 광고를 내보내는 중이다. 삼성전자의 마케팅 활동은 그 흔한 보도자료도 없이 선수촌 입촌자를 대상으로 한 신제품 제공이 전부다. 올림픽 공식 ‘타임 키퍼’ 브랜드인 오메가는 “우리는 후원사가 아니라 단순히 시간 및 데이터를 관리하는 업체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 민폐는 가히 ‘역대급’이다.
국내에서 베이징올림픽 분위기를 최악으로 만드는 주범은 언론이다. 도쿄올림픽에서 혐오로 재미를 본 한국 언론은 노선을 변경할 용의가 도무지 없어 보인다. 개막식부터 ‘껀수’를 포착했다.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의 고유 의상 가운데에 한복을 입은 조선족 소녀가 등장했다. 국내 언론은 한복을 중국의 도발로 규정했다. 낚시질 전문 매체뿐 아니라 지상파 채널까지 중국이 한복을 도둑질한다며 난리를 쳤다. 조선족이 민족 교육을 보장받는 ‘국가 공인 소수민족’이며 그들의 민족의상이 한복이라는 팩트가 반중 정서 장사에 한껏 취한 국내 언론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게 중국의 뻔뻔한 문화 강탈이라면 도대체 이 소녀는 어떤 옷차림으로 개막식에 참가해야 했을까? 엇나간 반중 정서가 우리 동포인 조선족의 존재를 부정하고 폭력을 휘두른 셈이다. 실제로 중국 내 교민과 조선족 사회는 이번 한국의 반응에 크게 상심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쇼트트랙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남자 1000m 종목에서 한국 선수들이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탈락했고, 판정의 득을 본 중국 선수들은 금메달과 은메달을 휩쓸었다. 피해자로서는 화가 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심판진의 중국 봐주기만큼 우리가 보이는 반응도 비이성적이었다. 종목 특성상 쇼트트랙은 판정 시비가 잦다. 매번 피해자가 발생한다. 이번 피해자는 한국과 헝가리였다. 팬들이야 얼마든지 화를 낼 수 있겠지만, 속사정을 뻔히 아는 언론의 혐오 부추김은 정말 실망스럽다. 해당 종목의 메달 가능성이 낮다는 게 대표팀의 자체 평가였다. 판정 체계가 불완전하고 홈어드밴티지가 상존한다는 사실도 언론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내 언론은 대중의 과열된 반응 장단에 맞춰 춤출 뿐이었다. 2월 8일 한국은 이번 올림픽의 첫 메달을 땄다. 그런데 당일 KBS 9시 뉴스의 첫 소식은 김민석의 동메달이 아니라 쇼트트랙 판정 논란이었다. 공영방송부터 스포츠 보도보다 반중 혐오 ‘껀수’에 집중하는 게 말인가 방귀인가.
인접국 조롱에만 몰두하기에 올림픽은 너무 아까운 이벤트다. 축구를 제외한 모든 종목에서 올림픽은 최고 권위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종목마다 개최되는 세계선수권대회도 올림픽 앞에선 마이너일 뿐이다. 참가 인원, 경기장 시설, 운영 인력, 중계 장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올림픽이 압도적이다. 올림픽은 출전 자체가 영광이다. 올림픽 메달은 모든 운동선수의 꿈이다. 개막식에 참가하는 각국 선수들의 표정에서 알 수 있다. 올림픽은 특별한 경험이다. 세계 곳곳에서 싸움질을 멈추지 않는 인류가 만든 몇 안 되는 평화의 장이다.
베이징올림픽 대회 3일 차, 겐팅 스노파크 H&S 스타디움에서 여자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 결승전이 열렸다. 마지막 주자였던 뉴질랜드의 조이 사도스키 시노트가 스타트를 끊었다. 마지막 점프에서 그는 고난도 기술에 성공했다. 경쟁자들인 미국의 줄리아 마리노, 호주의 테스 코디가 가장 먼저 달려갔다. 세 선수는 눈밭 위에서 함께 구르며 서로 축하했다. 판정이 끝나 금은동의 주인공이 모두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결선 출전자 전원이 다 함께 펄쩍펄쩍 뛰면서 자신들의 빛나는 레이스를 자축했다. 4년 전, 평창에서 우리는 한 장면에서 큰 감동을 선물받았다. 일본 금메달리스트 고다이라 나오가 현역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이상화를 격려하는 순간이었다. 올림픽은 승자의 금메달 포효만큼 아름다운 스포츠맨십 순간을 연출한다. 이게 올림픽이다. 우리가 올림픽을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베이징올림픽과 반중 정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감정적으로 쉽지 않지만, 2022년 대한민국은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사회 아닌가? 무조건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1970년대식 엘리트 체육 시대는 끝났다. 4년 만에 찾아오는 최대 스포츠 이벤트를 혐오 배설구 용도로 써먹는 사회적 분위기는 너무나 후진적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물질적·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건너와 있다. 누군가를 헐뜯지 않아도 국가 자부심 정도는 가볍게 챙길 수 있다. 어려운 길을 돌아온 컬링 여자 대표팀 ‘팀킴’, 2010년 밴쿠버부터 올림픽에만 4회 연속 출전하는 알파인 스키 대표 정동현 등 격려할 우리 선수가 많다. 평창의 깜짝 스타 클로이 킴이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스노보드 레전드 숀 화이트가 올림픽 라스트 댄스를 펼친다. 여자 아이스하키가 대격전을 벌인다. 동계올림픽의 꽃 여자 피겨 개인전은 변함없이 스포츠와 예술의 하모니를 재현할 것이다. 베이징올림픽에는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친다. 누군가를 혐오할 시간이 없다. 지금 열리는 올림픽을 즐기자. 올림픽은 어 하는 순간 끝나버린다. 그러면 또 4년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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