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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서요

세상 모든 처음은 아름답다는 말을 연애에 대입해도 맞을까? 여덟 명의 청춘이 보내온 생애 가장 독특한 첫 만남에 대하여.

UpdatedOn January 0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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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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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임마

숨가쁘게 바쁜 마감 중 일탈이랄까. 친구가 여자를 소개시켜준단 말을 듣고 후다닥 일을 마무리한 뒤 엔도르핀 넘치는 상태로 한남동에 갔다. 친구와 함께한 낯선 여성과의 자리는 어느덧 단둘만 남았고, 본분(?)을 잊은 채 흥에 겨운 그녀와 나는 이태원 클럽으로 향했다. 열심히 놀고 있던 그때, 그녀는 얼마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와 우연찮게 마주쳤다. 내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와 언쟁하고 있었다. 달려가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에게 한마디 했다. “내 여자친구 기분 안 좋게 하지 말고 꺼져.” 상황이 정리된 뒤 그녀는 내게 마음이 열렸는지, 그날 밤을 우리는 바짝 붙어서 길게 보냈다. 이후로도 한동안 우리는 긴 밤과 오랜 낮을 보내는 사이가 됐다.
WORDS 돌직구남, 30대, 스타일리스트

농구, 섹시

대학을 졸업하고 필리핀의 작은 도시로 짧은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거기서 (구)남친, (현)남편을 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영어 공부가 절실한 취준생이었고, 나보다 한 살 어렸던 남편은 군대를 갓 전역하고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준비 중이던 대학생이었다. 우리는 학원 내 같은 조가 되어 친구가 되었다. 누나 동생으로 지내기를 한 달, 내가 처음 반한 순간은 당시 수업이 끝나고 휴식 시간이면 농구를 하던 남편의 땀에 젖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모습이 그땐 왜 그리 멋있어 보였는지 모르겠다. 주책맞은 나는 “난 네가 농구하면서 사귀자고 하면 사귈 것 같아”라며 남편에게 여러 번 농담을 던졌다. 평소에는 모범생 같은 얼굴의 남편이 농구공만 쥐면 터프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달 후 우리는 공부하러 온 필리핀에서 눈이 맞아, 결국 5년이 지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만일 농구가 아니고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이었어도 내가 반했을까? 뜨거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부딪치고, 드리블하고, 점프하는 모습. 내게는 지구상 모든 스포츠 중 농구가 가장 섹시하다. 거기서 괜히 <슬램덩크>나 <마지막 승부> 같은 게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고. 농구를 잘하던 그의 처음은 참 섹시했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WORDS 농구왕 와이프, 30대, 영화 마케터

너, 존잼

처음 보는 사람에게 관심(흥미)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무심한 내가 처음 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건 엄청난 일이고 손에 꼽는 드문 일이다. 우연히 좋아하는 숍에 가서 스치듯 마주친 사람에게 ‘나 저 사람이랑 잘 맞을 것 같아, 알아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건 운명이다. 첫인상 하나로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면 ‘금사빠’라 불러도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스치듯 헤어진 사람을 어떻게 찾나 싶었지만 인스타그램으로 쉽게 찾아낸 뒤엔 내가 가진 숨은 능력이 있구나 싶었다. 용기를 내서 SNS 계정을 팔로하고, 당당하다라고 하기엔 주절주절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면 어쩌나 신경을 써서 정성스러운 메시지를 보냈다. 알고 보니 걸어서 1분 거리에 사는 이웃이었고, 오고 가며 마주친 적이 없던 게 신기할 정도로 생활 반경이 가까웠다. 그렇게 메시지만 주고받다 자연스럽게 집 앞 카페에서 만난 첫날 우리는 48시간 동안 헤어지지 않았고, 밤낮을 함께 보내며 수많은 대화와 감정을 나눴다. 그 이후 결말은 해피엔딩은 아니고 그냥 그렇게 지나가버린 인연에 불과한데… 지금 생각하면 꿈인가 싶지만 낭만 없고 ‘노잼 라이프’인 내게는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다.
WORDS 노잼녀, 20대, 에디터

홍콩, 쏘주

사랑은 꾸준한 만남으로 싹트는 것인 줄만 알았다. 적어도 한두 달은 봐야 호감이라는 감정이 솔솔 피어나는 줄 알았다. 2019년 1월 전까지는 그랬다. 당시의 기억은 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이야기는 홍콩 센트럴 한복판에서 시작된다. 클럽이 즐비한 란콰이펑에는 유명한 루프톱 바가 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 손에 이끌려 간 그곳은 센트럴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루프톱에서 취기를 날린 뒤 아래층에 자리한 곳으로 내려왔다. 독한 칵테일 한잔을 홀짝이고 있던 그때, 누군가 다가왔고 그는 잊을 수 없는 말을 건넸다. “쏘주?” 그렇게 물꼬가 트여 한 시간을 대화했다. 꽤 심오한 내용의 대화였다. 꿈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 대화를 마치고 불 꺼진 센트럴 도로를 해 뜰 때까지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홍콩의 야경이 주는 낭만과 초면이라는 극적인 상황이 주는 설렘일까? 10년을 알고 지낸 사람과의 대화보다 더 편하고 행복했다. 번호 교환으로 만남을 마무리 지었고, 이후 우린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우린 서로 나이도, 사는 곳도, 이름도 모른다. 번호도 이름이 아닌 이모지로 저장했으니까. 그러니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그 추억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그날 일은 첫눈에 반한다는 환상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해주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달콤하지만 쉽게 사라져버려 아쉬운 게 첫 경험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그날을 추억하며 오늘도 첫눈에 반하는 상상을 한다.
WORDS 술고래녀, 20대, 에디터

태국, 누워

어느 해 12월 태국에서 열린 페스티벌 3일 차 마지막 밤, 나는 3일 내내 열심히 노느라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딱 한 잔만 더 해야지 싶어서 칵테일을 사다가 A를 만났다. 여기 가볼까요, 저기 가볼까요, 어색한 대화를 나누며 춤을 추고 술을 더 마셨다. 마침내 메인 스테이지만 남기고 거대한 페스티벌 사이트의 모든 조명이 꺼졌을 때, 우리는 멀찌감치 잔디밭에 뒤통수를 대고 누웠다. 헤드라이너 크레이그 리처드(Craig Richards)의 ‘트리피’한 롱셋이 절정을 향해 갈 무렵이었다. 시커먼 하늘에 드리운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멀리서 차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겨울의 여름, 밤의 아침, 테크노 속 나뭇잎 소리, 영어와 태국어가 뒤섞인 무척 비현실적인 시간이었다. 그런 기분으로 음악이 꺼지고 모든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음악과 미래와 서울과 방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하루만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려나. 몸을 일으키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A는 곧장 방콕으로 떠났다. 그 후 1년 정도 종종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다시 만난 적은 없다.
WORDS 기력남, 30대, DJ

상하이, 뒤엉켜

처음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그 감정은 어떤 것보다 설레고 좋다. 하지만 이걸 단번에 깨는 일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언제인지 기억이 잘 나지만 중국 유학 시절이다. 요상하고 이상한 그곳에서 일이 벌어졌다. 하우스 음악에 흠뻑 빠져 내 몸이 부서져라 흔들며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던 그때.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앞으로 지나갔다. 무슨 향수인지 여전히 궁금할 만큼 특이한 향을 온몸에 휘감고 있었고, 왠지 모르게 뒷모습이 무척 끌렸다. 귀신에게 홀린 듯 그녀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다 결국 말을 걸었고,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긴 요상하고 이상한 곳이니까 대수롭지 않았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 춤을 췄고, 그녀가 나를 리드하며 진한 스킨십을 나눴다. 한참을 뒤엉키다 아직 그녀의 이름도, 국적도, 나이도 모른다는 사실이 스친다. 뭐 어때, 밤은 길고, 우리는 젊다. 두 시간쯤 더 지났을까. 해가 떠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 됐고, 더 이상 술을 마셨다간 그 자리에서 쓰러질 것 같았다. “바람 쐬러 갈래요?” 끄덕끄덕. “저희 집 테라스가 넓고 시원한데.” 초면에, 이국에서,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집으로 가는 일. 어쨌든 우리는 함께 탄 택시에서도, 집에서도, 한참을 뒤엉켜 있었다.
WORDS 한국 남자, 30대, 비주얼 디렉터

개, 냄새

처음부터 “00 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게 간지럽다면,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는 만남으로 시작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나는 그를 그의 반려견 모카(강아지 가명) 아빠라 부르며 알아갔다. 작년 여름 남산 둘레길에서 처음 만났다. 모카가 나를 좋아했던 건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늦은 밤 산책을 하고 있던 내 앞에서 유난히도 오래 코를 킁킁거렸던 건 우연이었다. 흰색 무지 티에 그 당시 유행으로 따지면 이해할 수 없는 루스한 핏의 청바지를 입고 있던 모카 아빠는 넌지시 “걔가 여자를 좀 좋아해요. 좋은 냄새가 나서 그런가 봐요”라며 첫 마디를 뗐고, 그렇게 우리는 남산 초입 편의점부터 해방촌 입구까지 나란히 걸었다. 모카는 대화가 어색해질 때쯤, 적절한 미드필더 역할을 해줬다. 그리고 반려견의 보호자라는 신분이, 처음 보는 남자에게는 꽤나 낯을 가리는 내 경계심을 풀어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모카의 걸음걸이가 느려질 때쯤 우리는 연락처를 주고받고 헤어졌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모카 아빠를 대신해 모카를 산책시켜주고 왔다.
WORDS 개 산책녀, 20대, 음악 프로듀서

좋아, 아파

“만날래요?” 별안간 메시지가 왔다. 발신자는 모른다. 가상의 인물인가?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나온 사진을 더러 포스팅해뒀지만, 신뢰할 수 없다. 프로필에 배우라고 써 있지만, 내가 아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를 본 적은 없다. 누구지? 세상에는 별 일이 다 있고, 나 또한 귀한 집 자식이라 겁이 많다. “오늘 밤 어때요?” 첫 문자에 적당한 답장을 고르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던 때, 하나의 메시지가 더 쌓였다. 나는 그를 모른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하지만 밤은 기니까, 만나서 알아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어디서?”라고 보낸 답장은 소심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격이었다. “그리로 가도 돼요?”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집에 침대 있죠?” 강속구가 날아왔다.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투 스트라이크. 어쩐지 이런 만남을 거절하면 동시대적이지 못한 사람 같다는 판단. “도착하면 전화해요.” 주소와 함께 보냈다. “문 좀 열어줄래요?” 한 손에 든 하얀 비닐 봉투에는 맥주 몇 캔이 들어 있다. 저건 뭐지? “아, 저는 콘돔 없으면 안 하거든요.” 점화. 만난 지 1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 우리는 뒤엉켰고, 밤을 적셨다. 이름보다 성적 취향을 먼저 알아간 첫 번째 경험. 동이 틀 때까지 우리는 말하기보다는 입을 맞췄고, 입밖으로 꺼낸 단어는 “좋아” 혹은 “아파” 정도가 전부였다.
WORDS 귀한 집 자식, 30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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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CONTRIBUTING EDITOR 양보연
COOPERATION 게티이미지뱅크

2022년 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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