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짧게 잘랐네요?
<크라임 퍼즐>에서 수감자로 나와요. 범죄자처럼 보이고 싶었어요. 머리가 짧으면 에너지가 드러나잖아요. 에너지를 표현하려 삭발을 강행했지요. 삭발하면 좀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특별해 보이는 것 같아요. 감추지 못하는 그 사람의 민낯이 보인달까.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캐릭터일까요?
그렇죠. 드라마는 여자친구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수하고 스스로 잡혀 들어가는 이야기부터 시작돼요. 근데 이상하잖아요. 갑자기 여자친구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본래 긴 머리였는데, 사건이 발생하고 삭발한 모습으로 등장해요. 그게 첫 장면인데, 도입부에 임팩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범죄도시>에서 장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나왔을 때 괴기스러운 특별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런 효과를 연출하고 싶어서 머리를 싹 밀었죠.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게끔 여러 시도를 했어요.
장르 드라마가 주류로 자리 잡았어요. 신선한 장르 드라마들을 보면 창작자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렇게 많은데,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크라임 퍼즐>도 과거 공중파 드라마와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점에선 자유로워요. 그 자유로움은 OTT의 힘에서 비롯되죠. OTT에선 시청자들이 작품을 쉽게 선택해 볼 수 있고, TV 드라마의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없어요. 무엇보다 시나리오만으로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배우 입장에서는 검증된 작품을 하는 느낌을 받아요. 예전에는 어느 배우가 어느 시간대에 편성된 어느 방송국의 드라마를 하는 게 투자의 요건이었다면, 지금은 달라요. OTT가 작품을 투자한 상태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와요. 그래서 제작 상황이 안정된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게 돼요. 또 연기 제작 환경과 이야기의 다양성도 장점이죠.
흥미로운 설정이 많죠.
작업할 때도 열려 있어요. 일단 찍어보자는 취지예요. 그리고 주제에 맞게 조율할 수 있는 부분들을 더 찍으면서 완성도를 높이는 거죠. 결과적으로 사실적인 연출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배우도 이렇다 치자가 아니라 명확한 표현이 가능해요. 더 디테일한 연기를 하게 되죠.
과거에는 배우가 드라마 촬영하며 시청률을 의식했고, 그 부담이 연기에 영향을 끼쳤다는 거죠?
네, 그건 너무너무 힘들어요. 예전에는 제작과 방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시스템이었어요. 오늘 촬영한 신이 다음 주에 방영되고, 내일 방영될 때도 있었죠. 촬영하다 시청률 반응이 좋지 않으면 힘이 떨어져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자책하기도 하고. 연기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쫓기는 기분이에요.
다시 장르물로 돌아가면, 배우 입장에서는 흥 돋는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자극적인 장면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도 있을 테고, 독특한 캐릭터를 만날 수도 있겠죠.
네, 그리고 앞서 말씀하셨듯 주제가 다양해졌어요. 장르물이라고 하면 타임루프가 주였는데, 이제는 거기에 사이코패스가 시공간을 넘나드는 설정이 추가되기도 하고요. 정말 재밌어요. 상상해서 연기할 수밖에 없는 설정들이에요. 과거에는 캐릭터 연기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직업군을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지금은 우주를 넘나드는 상황이라 희한하죠. 배우로선 너무 재밌어요.
시청자 입장에서는 다르기도 해요. OTT의 작품들 중에는 설정은 흥미로우나 서사나 연출이 못 따라줄 때가 있어서, 선택하는 데 애먹기도 하거든요. 작품을 객관적으로 컨트롤해줄 제작자들이 필요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모든 사람들의 호흡이 딱 맞아야 진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뛰어난 배우와 뛰어난 연출가가 만나도 호흡이 안 맞으면 당연히 삐걱거리는 부분이 생기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면 참여자들이 호흡을 맞추는 시도를 계속해야 해요.
<크라임 퍼즐>은 최종길 작가와 김상훈 연출이 참여하셨어요. 그리고 윤계상이 연기하고요. 기대 안 할 수 없는데요.
아, 너무 기대 안 해주셔도 됩니다!(웃음) 그냥 가벼운 드라마예요. 정말 가볍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요즘 드라마 수준이 너무 높아져서, 이제는 뭐 어떤 게 나와야 할지 모를 정도예요. 그냥 최선을 다하지만 우리나라 제작 여건상 한계가 있어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자동차 추격 신을 보다 한국 영화의 자동차 추격 신을 보면 왜 차가 몇 대 안 나오지? 그런 자본의 차이도 있고요. 그래서 너무 큰 기대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해요. 한국 드라마는 좋은 주제를 가지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힘인 것 같아요.
한국 드라마가 미드에 맞먹는 영향력을 갖게 됐어요. 상상도 못 했던 일이죠.
진짜 희한한 세상이 된 것 같아요.
여전히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한국 드라마도 그와 비슷한 영향을 세계에 끼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거죠. <크라임 퍼즐>에서 삭발한 수감자도 이제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겠고요.
하하하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가볍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퍼즐을 맞추는 두뇌 싸움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정말 재밌는 드라마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유체이탈자>도 궁금해요. 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고, 수상도 많이 했어요. 액션이 인상적이라는 평이었고요. <유체이탈자>의 액션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본 시리즈’를 잇는 액션물이에요. 타격감이 강하고, 굉장히 센세이션한 부분을 가졌어요. 해외 액션 영화에선 총기가 나오는 반면, 한국 배경인 영화라 몸 쓰는 액션이 많아요.
액션 신 하면 많이 다친다고 들었어요. 개봉이 미뤄져서 아쉽습니다.
그럼요. 아쉬워요. 더군다나 투자한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마음이 아픕니다. 소규모 영화가 아닌지라 걱정이에요.
한국 영화의 액션 수준이 굉장히 높아요. 액션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무술 감독님들이 정말 연구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컷을 세밀하게 다 나누세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연구하셨는지 느껴져요. 그리고 항상 새로운 액션을 시도해요. <악녀> 봤을 때 충격받았어요. 그 액션 신들 너무 잘 찍었잖아요.
바이크 신은 정말….
어우 예술이죠.
최고의 액션 영화를 뭐라고 생각해요?
저는 당연히 ‘본 시리즈’죠.
타격감 강한 액션을 선호하나요?
네, 예전에는 타격감 있는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본 시리즈를 접하고 나선 저도 한번 저런 액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대니얼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도 빼놓을 수 없죠. 실제 같은 액션을 좋아해요.
액션 영화를 기대하는 배우들이 많아요.
그러니까요. 저도 <유체이탈자>가 개봉하고, 결과가 잘 됐으면 또 액션 영화에 캐스팅되었을지 누가 알아요. 그런데 이제 <유체이탈자>가 제 나이 환갑에 개봉하고 그러면….(웃음)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윤계상도 액션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근데 더 나이가 들면 액션을 못 하지 않을까요.
아직 한 10년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 절대 아닙니다. 안 돼요. 배우들은 몸 관리를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그런데도 나이가 있으니까 힘들어요.
만약 벌크업을 해야 하는 역이 들어오면 하실 건가요?
당연히 해야죠. 기다리고 있다고 써주세요. 하하.
지난여름 결혼 발표를 했어요. 어때요, 결혼하고 체감되는 변화가 있나요?
네,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다, 혼자가 아니고 둘이니까 더 열심히 살아야죠. 그리고 생각보다 결혼 축하를 많이 받고 있어요. 책임감이 강해졌어요. 배우자도 제 영향을 받을 테니까. 제가 더 열심히 좋은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정말 진심으로.
저도 결혼 전에는 제 기록이나 작업을 수집하는 데 주력했어요. 결혼하니 그것들이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더군요. 내 흔적을 모으는 것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게 돼요. 그런 점에서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고요.
저랑 정말 비슷한 것 같아요. 저도 욕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배우로서 욕심이 많다고 하면 제가 조금 다쳐도 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아요. 너무 지독하게 하지는 않으려고요. 곁에 있는 사람이 너무 걱정하니까요. 더 신중해지고,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결혼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결혼이라는 거 막연하잖아요. 둘이 있으면 좋을까? 좋지요. 그런데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게 확 느껴지죠. 결혼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걸.
새로운 캐릭터를 만났을 때나, 촬영 현장에서나 스스로 변했다고 느낄 때가 있나요?
연기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어요. 이 정도 되면 오케스트라의 연주자처럼 연기에 제 느낌을 자유자재로 담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아, 정말 너무 어려워요. 지금은 만들어가는 과정이에요. NG가 나는 것도 여러 이유가 있죠. 컨디션이 별로거나, 내 리듬이 잘 안 맞거나. 그래도 연기에는 내 생각이 고스란히 표현돼야 하는데, 표현이 안 될 때 정말 너무 힘들어요. 아직 한참 멀었어요. 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될까. 그런 생각이 한 번씩 찾아오면 힘들어요.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계속 그 과정에 있는 기분이에요. 어쩌다 드라마나 작품이 잘 됐을 때 배우로서 만족감이 있겠죠. 이건 내가 노리고 한 연기다, 내가 연출해본 거다, 말할 수 있지만 그건 한 10%밖에 안 되고, 전부 우연히 표현된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면 가끔 한 번씩 좋은 연기가 나올 때가 있어요. 제 스스로가 너무 부족하고,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채워지질 않아요.
연기 기준이 너무 높은 거 아닌가요?
모르겠어요. 내 기준이 높은 건가? 혹은 내가 너무 못 하는 건 아닌가? 매번 그런 생각을 하죠.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어요. 연기는 제가 너무 좋아하는 일이니까. 지독하게 힘들면서 좋기도 하고.
넘기 어려운 벽을 만났을 때 돌파구를 발견한 적 있나요?
예전에는 제 취약점을 숨기려고 했어요. 근데 취약한 부분을 드러내면 편해져요. 그래서 이제는 솔직해지려고 해요. 연기할 때 안 되면 안 된다고 표현하고,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요. 그러다 보면 무슨 에너지가 조금씩 끼어드는 것 같아요. 감독이든 다른 배우든 그들의 영향을 받아요.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그 순간만큼은 좋아지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하는 거죠. 제가 부족한 걸 솔직하게 드러내고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건 어려운 일이죠. 남들에게 치부를 드러내는 건 더 어렵고요.
너무 힘들었어요. 근데 그게 에너지인 것 같아요. 작품이 잘 되는 게 중요해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한때는 연기를 잘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들이 가진 재능을 갖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제가 그런 재능이 있는 배우인가? 되물으면 부족한 것 같았어요. 그렇다면 그만둘 것인가? 못 그만두겠더군요. 방법이 뭘까 생각해보니 협업이었어요. 의논하고, 얘기도 나누고, 나를 내려놓자. 내가 돋보이지 못하면 다른 배우에게 흐름 좋은 에너지가 들어갈 수 있게끔 열어주자. 그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어요. 어떤 부분에선 창피하기도 해요. 저도 얼마나 노력을 하겠어요. 그런데 현장의 느낌이 안 맞거나, 무언가 거슬리는 부분이 생기면 연기할 때 많이 대사를 헤매요. 그때는 그냥 제 상황이 이렇다고, 도와달라고 해요. 그럼 주변에서 거뜬히 도와줘요. 예전에는 혼자 덩그러니 무대에 놓인 배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저는 이 작품이 잘 되게 하려는 일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에요.
윤계상 출연 영화에는 좋은 댓글이 많던데요. 배우 윤계상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야박하진 않아 보여요. 연기는 힘들고 괴롭지만 좋아서 포기할 수 없는 거죠. 연기의 매력은 뭔가요?
태생적으로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연기가 좋아요. 너무 설레고, 연기하는 상상을 하면 좋아요. 그 긴장감도요. 애쓰고 에너지를 모으는 것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습니다. 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통틀어서 설명하는 게 연기인 것 같고요. 좋아하는 건 둘도 없어요. 연기 하나밖에 없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건 축복이죠.
정말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포기할 수 없어요. 연기 못 한다고 해도 뭐 어떡해요. 그냥 할 수밖에 없지.
배우들은 자신의 시간을 기록물로 갖기도 해요. 10년 전 출연한 영화를 다시 보며, 당시의 내 에너지를 가늠하고 마주한다는 것도 이 직업의 장점이겠죠.
처음에는 솔직하게 연기했다고 생각해요. 멋모르고 <발레교습소>를 시작했고,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은 고스란히 당시 윤계상의 모습이었어요. 작품마다 그 시기 윤계상의 모습이 담겨요. 작품을 똑똑하게 선택한 것도 아니에요. 캐릭터가 나 같으면 선택했던 것 같아요. 주인공이 나랑 같은 마음이거나 공감되는 작품들을 선택했어요. 그 작품을 다시 돌려보지는 않아요. 창피하니까. 근데 짤 같은 게 올라오잖아요. 유튜브에서 가끔 제 이름을 검색해볼 때가 있잖아요. 그럼 그때의 윤계상을 마주하는 것 같아 뭉클해져요. 그때 나의 모습. 너무 잘 되고 싶은 마음이나 불안감, 이런 성장의 모습이 다 보여요. 그걸 볼 수 있다는 게 참 축복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비스티 보이즈>에는 연기를 잘하고 싶어서 충돌하고 헤딩하고 그랬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 액션을 너무 하고 싶었을 때 <풍산개>를 만났고요. 좋은 기록물이자 제 역사가 가득한 결과물이죠.
유튜브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사람들이 온라인에 글을 쓰고 창작물을 올리는 건 나를 보여주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해요. 배우들은 이미 연기로 나를 보였으니 욕구가 해결되어서일까요. 윤계상 배우는 SNS도 유튜브도 안 해요.
맞아요.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많이 고민했어요. 배우는 극에서 맡은 역할처럼 보여야 하잖아요. 저는 철저하게 윤계상을 지우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저는 이미지가 잡혀 있던 사람이기 때문에 작품에서 맡은 인물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god 윤계상의 모습이 강했으니까요. 이제는 저를 좋아해주셨던 분들이 자식을 키우고, 삶이 고된 나이가 됐어요. 그래서 새로운 세대는 제가 가수인지 배운지 잘 모르게 됐죠. 지금 SNS를 안 하는 이유는 배우로서 깨끗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에요. 이미지 노출이 덜 되면 사람들이 잊어버려요. 그냥 툭 작품으로 만나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윤계상이라는 이름보다 작품에 존재하는 캐릭터가 되길 꿈꿔요.
의도가 성공한 것 같네요. 인터뷰 준비하면서 배우 윤계상을 생각해봤지만, 선뜻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렇죠!(웃음) 너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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