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YOSUKE YAMASHITA Pit-Inn
야마시타 요스케의 공연을 보고 싶어서 일본에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가 공연을 아주 안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은 거의 공연을 하지 않지만, 그래도 1년에 몇 번은 도쿄 내에 있는 공연장에서 연주를 선보이는 편이었다. 그는 1942년생, 한국 나이로 치면 현재 80세다. 고령의 연주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만날 기회가 줄어들다 보니,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일본에 갔다. 피트인(PIT-INN)이라는 도쿄에 있는 공연장은 무려 1966년에 문을 연 곳이다. 비록 한 차례 자리를 옮기기는 했지만 ‘선라(Sun Ra)’와 같은 세계적인 거장들도 왔다 갔고, 이곳에서 녹음한 라이브를 앨범으로 내기도 했다. 재즈 역사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 공간에서 위대한 음악가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야마시타 요스케는 1960년대 일본에서 처음으로 프리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를 선보인 사람이다. 재즈 본토에 해당하는 미국과 거의 동시에 프리 재즈를 선보였고, 영미권에서도 그를 주목해 결국 뉴욕과 유럽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일본 프리 재즈의 선구자이며 ‘세실 맥비(Cecil McBee)’, ‘피로안 아클라프(Pheeroan akLaff)’와 같은 이들을 세션으로 두고 활동했으니 해외에서도 그의 입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게다가 나이 들어서는 늘 젊은 음악가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가능성 있는 연주자들을 서포트하고 소개하기까지 하니 얼마나 대단한가. 소설도 쓰고 한때는 퍼포먼스 아트에도 참여한 바 있으니 얼마나 멋진 음악가인가. 그의 공연은 타건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함께 공연한 젊은 연주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야마시타 요스케의 에너지가 가장 크게 느껴졌고, 그는 여전히 대담한 연주를 선보였다. 예전처럼 팔꿈치로 피아노를 치는 과격한 퍼포먼스는 없었지만, 공격적이고 힘 있는 타건은 물론 연주의 흐름을 통해 공간의 공기를 자유자재로 바꿔놓았다. 공연장을 나오면서도 여운은 컸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의 연주를 쳐다본 기억만 남았다. 재즈 공연이야 많고, 위대한 연주자도 많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프리 재즈를 선보인 야마시타 요스케는 독보적이다. 그의 공연을 본 한국인도 적지 않으리라 자부한다.
WORDS 블록(대중음악 평론가)
1997 DREAM FACTORY TOUR
평론가로서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난 콘서트에 대한 기억을 많이 갖고 있지 못하다. 다른 음악 애호가들처럼 공연장을 부지런히 찾아다니지 않는 적극적이지 못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공연장에서 생동감을 느끼고 아티스트에게 환호를 보내는 것보다는 음반을 모으고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연주를 차분히 감상하는 것을 음악 생활의 더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개인적인 성격 혹은 성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콘서트의 추억은 있다. 1997년. 대학생이 된 지 1년도 채 안 돼 한창 문화생활에 빠져 있을 때다. 한편으로는 ‘팬질(실은 팬질을 가장한 친목질)’에도 열을 올렸는데, 그래서였을까 처음으로 팬클럽 친구들끼리 모여 ‘티케팅’이라는 것도 해봤다. 전화를 제외하고는 온라인 구매가 없던 시절, 밤을 꼬박 새고 새벽 다섯시에 종로에 있던 대형서점 앞에 줄을 서서 졸음도 잊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던 기억. 그렇게 어렵사리 앞자리 예매에 성공했던 그 콘서트는 바로 이승환의 ‘드림팩토리 투어’ 서울 공연이었다. 양재동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는데, 데뷔 시절부터 라이브 무대에서 큰 두각을 나타낸 이승환의 공연가로서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콘서트였다. 이후 이어지는 ‘무적’의 전설을 예비하는 서막과 같은 공연이기도 했는데, 이후에 이라는 음반에도 그 흔적이 담겨 있다. 우스운 말이지만 지금에 와선 공연의 디테일한 퀄리티 같은 건 오직 흐릿한 잔상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그 설레었던 마음만은 아직 또렷하다. 이승환의 무대를 처음 본 건 1990년대 초반 멋모르고 친구를 따라간 ‘BC 603’ 라이브 콘서트에서였는데, 그것을 포함해 내가 본 그 어떤 대중가수의 공연을 능가하는 새롭고 발칙한 매력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승환을 규정하는 잘 다듬어진 사운드는 물론이고, 곡마다 생각지 못했던 기발한 편곡과 키치한 아이디어들, 무엇보다 ‘드림팩토리’라는 하나의 공동체성을 강조한 설정과 유대감은 그 어떤 공연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 ‘무적’으로 대표되는 훨씬 더 압도적인 규모와 사운드를 자랑했던 이승환의 공연들이 있었지만, 어쩌면 그 모든 아이디어의 출발점이 이 공연에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그저 소중했던 추억이다. 2월의 그 저녁이 나에게 여전히 인생 공연으로 남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20여 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그가 나보다 더 진취적이고 열정적으로 살고 있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 ‘내 스타일’이었던 코러스의 원현정 누나는 어디서 잘 살고 계실지. 그때 그 친구들 모두 건강히 잘 살고 있는지.
WORDS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2006 JAY-Z the 1st Live in Seoul
한창때는 맨 앞줄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가와 나 사이에 누군가가 개입하는 게 싫었다. 함께 뛰는 즐거움보다는 완벽한 라이브 경험을 원했던 것 같다. 맨 앞줄에서는 표정이 잘 보인다.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마이크를 어떻게 잡는지도.
나는 음악만큼이나 표정과 신발과 마이크 잡는 방식에도 경도되는 쪽이었다. 그걸 다르게 말하면 아우라, 카리스마 등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스타는 스타여야 한다고 믿고, 정신적·육체적으로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다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특히 스타가 가장 빛날 때 그 모습을 보고자 했다.
2006년, 제이 지의 내한 공연이 열렸다. 당시만 해도 수많은 취소 사례가 있어서 진짜 열리긴 하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컸다. 제이 지는 <The Blueprint>와 <The Black Album>으로 연타석 홈런을 치고, 신보 <Kingdom Come>의 발매를 앞둔 때였다. <The Blueprint>를 독서실에서, <The Black Album>을 막사에서 반복해 들으며 10대와 20대 초를 보냈다. 그러니 나는 제이 지를 그때 꼭, 무조건 봐야 했다. 전역 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시기, 그리고 제이 지의 도시 뉴욕으로의 출국을 며칠 앞둔 날이라는 시점도 완벽하게 느껴졌다.
제이 지가 등장했다. 정말 컸다. 실제 키도 컸지만, 무대에서 그렇게 거대한 사람은 그 후로도 본 적이 없다. 펜스를 꽉 잡고 등에 쏠리는 다른 관객의 무게를 이겨내며(스탠딩 존이었다), 그를 올려다봤다. 공연의 구성은 특이할 게 없었다. 밴드 셋도 아니었고, 그의 오랜 동료 멤피스 블릭과 그야말로 랩을 쏟아부었다. 그 팽팽한 빨랫줄 같은 목소리가 내 앞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그걸로 충분했다. 어쩌면 나는 맨 앞에서, 나의 스타를 스타답게 대하기 위한 준비가 이미 완료된 관객이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면 높은 무대는 꼭 포디엄 같았다. 암막 뒤에서는 비욘세가 손을 흔들었다. 맨 앞줄에서 그런 호사를 누렸다.
이 일을 시작한 뒤, 어쩐지 훈련된 것 같다. 스타를 인터뷰하러 간다고 그에게 열광할 수는 없다. 그게 익숙해서인지, 더는 그만큼 황홀해지지 않는다. (코로나 전) 여전히 많은 공연을 다녔다. 하지만 맨 앞줄의 숨이 멎을 듯한 나보다 조용히 박수 치는 내가 더 익숙하다. 다시 생애 최고의 콘서트를 볼 수 있을까? 하긴, 그렇다면 최고라 말할 수 없겠지. 딱 그때만 있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지금 이 어려운 상황이 더욱 아쉽다. 놓치면 다시 오지 않는다. 스타의 전성기도, 나도.
WORDS 유지성(프리랜스 에디터)
2000 SMASHING PUMPKINS Live in Seoul
호르몬 구성 요소 중에는 염세주의가 있다. 사춘기가 시작되면 염세주의 물질이 과다 분비되어 우울한 음악을 듣거나 다자이 오사무의 책을 읽는 등의 증상을 겪는다. 비관적인 생각들이 곪아 얼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하는데, 흔히 여드름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것이 우울을 배출시키는 신체 기능이라고 본다. 여드름은 사라져도 우울은 흉처럼 남아 비관적인 정서는 지속된다. 이 호르몬 이상은 충격요법으로 치료되어왔는데, 1980년대는 슈게이징 음악이 주된 요법이었고, 1990년대는 브릿팝과 그런지가 선진 치료 방법으로 떠올랐다. 나 역시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한탄하는 노래들을 들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1990년대 후반 스매싱 펌킨스는 그런지 시대 최후의 의료진이었다. 초창기 음악은 사이키델릭이었지만, 기념비적인 3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를 발표하며 우울과 끝없는 슬픔이라는 절망적인 충격요법으로 우울한 청소년들의 ‘엠씨스퀘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내 치료제는 4집 였다. 음악은 맞춤형 치료제 같은 거니까. 그리고 2000년이 됐다.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스매싱 펌킨스는 해체를 선언했다. 그들은 밴드의 무덤을 서울로 택했다. 당시 5집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 살 돈이 없어 CD를 복제하던 나는 공연 제목인 ‘Live in Seoul’을 ‘Last in Seoul’로 기억할 정도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인지라 그들의 해체가 슬프면서도 빌리 코건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운 좋게 공연은 기말고사와 겹쳤고, 덕분에 일찌감치 잠실 종합운동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스탠딩 구역은 선착순으로 입장했기에 앞자리를 차지하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앞줄을 차지하고는 물도 안 마셨다. 한여름이라 무척 더웠지만 화장실 가느라 자리를 빼앗길 순 없었다. 힘들어 보였는지 하느님이 물을 주셨다. 소나기가 내렸다. 굵은 빗물이 오랫동안 쏟아졌고,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는 썩은 걸레 냄새가 진동했다. 해외 밴드의 내한 공연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악취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은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갑자기 무대가 암전되고 ‘Everlasting Gaze’의 기타 리프가 터져 나왔다. 엄청난 환호가 일었다. 공연은 2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스매싱 펌킨스는 지난 활동을 분풀이하듯 마지막 콘서트에서 노래들을 쏟아냈다. 사람들은 어려운 가사를 따라 불렀고, 나도 불렀다. 눈 감고도 외울 수 있는 가사들을 빌리 코건의 목소리에 중첩시켰다. 그건 진료였다. 의사에게 나의 상태를 목청껏 전하는 진료. 우울과 절망으로 점철된 노래들을 썩은 내 풍기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몸을 섞어가며 부르는 것은 즐거웠다. 웃진 않았지만 좋았다. 무대 세팅을 바꾸는 동안 빌리 코건이 하는 멘트도 재밌었다. 사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남들이 웃으니까 나도 웃었다. 앙코르는 ‘1979’였다. 이것도 비관적인 노랜데 달콤한 위안으로 들렸다. 유튜브에는 당시 공연 영상이 있다. 낮은 해상도긴 한데 염세주의에 심취한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볼 수 있다. 이후로 나의 사춘기는 낙관적으로 변했다. 성적표가 증건데, 잃어버려서 다행이다.
EDITOR 조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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