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이슈 항목을 들여다보는데 대선 출마자들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가 목록에 한가득이다. 본 적이 없어 댓글에 공감할 수 없었다. ‘허니제이’가 어떻고, ‘모니카’ 쌤이 어떻고 하는데 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 주제에서 벗어나기엔 이미 너무 커진 불씨였다. 강제적으로 알아야 했다. 곧장 TV를 틀었다.
첫인상은 ‘생각보다 안 맵네?’였다. 매운맛 프로그램이라더니, 아니었다. 오히려 <짝>이 더 매웠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물고 뜯으면서 전쟁하니까.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는 여덟 팀의 댄스 크루가 출연하고 크루마다 리더가 존재한다. 찾아보니 실력이 검증된 유능한 크루들이었다.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은 춤 고수들의 우열을 가리는 ‘배틀’이다. 첫 시청 회차의 주제는 ‘약자 지목 배틀’이었다. ‘노 리스펙트’라는 모토 하에 나약한 상대를 지목해 대결했다. 묘한 신경전 속 오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느끼던 중 크루 ‘라치카’의 ‘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리안은 곡예하듯 춤췄다. 그것도 프리스타일로. 리안의 동작은 예술이었다. 리안이 막강한 상대 ‘노제’에게 보인 패도 대단했지만 노제를 기선 제압하는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그래서 맵다고 하는구나.’ 왜 매운맛이라 불리는지 그제야 알았다. 본격적으로 각 잡고 시청했다. 춤꾼들의 무대에 심취하니 캐릭터가 파악됐다. 출연자는 전부 개성 있었다. 누구는 여렸고, 누구는 무대를 부숴버리고 싶어 혈안이었고, 누구는 마이웨이만 걸었다. 리안이 강렬한 첫인상을 남겼다면, 캐릭터 파악 후 마음을 흔든 건 ‘리정’이었다.
나는 왜 리정에게 빠졌나. 리정 같은 리더를 만나고 싶어서다. 그녀는 회사에는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리더의 표본이다. 무엇보다 따뜻하다. 정중하고, 약자를 보살필 줄 안다. 자존심을 건 경쟁 게임에서 자존감을 높여주는 리더다.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존재다. 그런 존재는 내 주위엔 없고, YGX에 있다. 리정은 크루 ‘YGX’의 리더다. 그녀는 자존감이 높다. 어떤 공격에도 쉬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높은 자존감은 화법에서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연약한 존재인 ‘원트’의 ‘채연’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느꼈다. 채연은 아이돌 그룹 ‘아이즈원’의 메인 댄서였지만, 전문 댄서들 사이에선 약자나 다름없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채연 성장기’라 부르는 시청자들도 있을 정도다. 채연에 대해 리정은 이렇게 말한다. “채연 씨야말로 카메라를 얼마나 잘 다룰 줄 알겠어. 아이돌 경력이 2년이야, 심지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세 번이나 했네, 이게 네 번째네!” 리정은 채연이 움츠러들지 않도록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건 어렵지 않다. 다정한 말과 태도면 된다.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갖는가? 치열한 취업 경쟁을 뚫고 성취한 직업이지만, 내 주변의 직장인들은 회의적이다. 업무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고, 직업에 영혼을 담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열정을 바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진심을 다해 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부럽다고 주변 직장인들은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선 빛이 난다. 댄서들은 저마다 눈매를 날카롭게 뜨고 있지만, 눈동자는 빛난다. 나는 그 빛을 갖고 싶었다. 리정뿐 아니라 모든 크루 멤버들이 춤에 진심이었다. 리더 계급 안무 채택 과정에서 각 크루의 리더들은 자신의 의견을 주저 없이 피력했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굽힐 줄도 안다. 본인이 실력에 비해 평가절하될지라도 기죽지 않는다. 그들에게 춤은 일이 아니라 자신 자신일 테니까. 나는 비판에 상처받지 않고 잘 수용했던가. 조직에서 쏟아지는 목소리에 흔들림 없었던가. 나는 흔들렸지만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그녀들은 올곧았다. 다져진 몸과 마음으로 건강하게 대화했고(비록 대화의 톤은 매섭지만) 상처 안 받고 수용했다.
굳건한 마음은 ‘약자 지목 배틀’에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약자를 고르지 않았다. 강자를 택했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자신이 진심을 다하는 일이라면, 그저 생존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진정 좋아하는 일이라면, 최고가 되고 싶을 거다. 회사에서 일개 부품으로 반복된 업무를 하고, 업무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약자를 지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처럼 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춤은 자신을 표출하는 수단이고, 경쟁은 내 자아를 다른 사람의 자아와 맞부딪치는 것이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작진들은 그저 싸우고 헐뜯는 자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 걸까? 여튼 댄서의 진심을 너무 몰랐다. ‘프라우드먼’의 ‘립제이’와 ‘라치카’의 ‘피넛’은 와킹으로 대결했다. ‘One night only’가 흘러나오자 ‘피넛’은 신들린 사람처럼 눈빛이 변했다. 립제이는 당황하지만 와킹 여제답게 카리스마 있는 절제된 동작으로 맞선다. 둘은 경쟁 상대로 분리됐다기보다 조화를 이뤘고, 완벽한 무대를 선보였다. 상대의 퍼포먼스를 억압하는 데 급급하기보다, 서로에게서 체득할 점을 찾았다.
댄서들은 제작진이 만들어놓은 경쟁이라는 틀을 부순다. 다른 댄서와 겨루는 게 이 프로그램의 기조지만, 댄서들은 자신과 경쟁한다. ‘라치카’의 리더 ‘가비’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주제가 노 리스펙트인데 배틀하고 나니까 오히려 내가 그 사람을 리스펙트하는 느낌이야.” 이 순둥한 언니들은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걸 자랑하고 보여주고 배우기 위해 출연했다. 자기 일과 동료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보였으니까. 퍼포먼스를 위해 붕대를 칭칭 감은 팔로 격렬하게 안무하고, 다른 크루에게 상처받고 돌아온 멤버를 ‘누가 그랬어’라며 형제처럼 북돋아주고 안아준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내 생활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이들처럼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은 적 있었나? 사랑하는 일에 절망과 쾌감을 느낀 적 있었던가? 무한한 경쟁 사회에서 그저 당장 닥친 일만 해결하는 데 급급하진 않았나?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배울 점을 찾고 내 것으로 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하지만 실상은 그럴 여유가 없다. 꽉 막힌 조직과 사회에 갇힌 우리는 춤을 사랑하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끈끈한 우정과 열정은 결국 우리가 원하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우리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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