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8일 이건희 회장의 유족은 고인이 수집한 문화재와 미술품 2만3천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1천4백88점)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2만1천6백93점), 5개 지역 공립미술관(박수근미술관 18점, 대구미술관 21점 등) 등에 기증했다.
그러자 문재인 대통령은 “별도의 전시실이나 특별관을 설치하라”고 언급했다. 이에 문체부는 서둘러 미술관과 박물관을 통합한 형태의 ‘이건희 기증관’ 검토에 돌입했고, 불과 3개월도 안 된 7월 7일 서울 용산 또는 송현동을 건립 후보지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문체부는 서울 송현동과 용산을 이건희 기증관 후보지로 결정한 이유로 두 곳 모두 전문 인력과 기반 시설을 갖춘 기관과의 연계성이 우수하고,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접근성 및 집중 관리·전시가 용이한 점을 꼽았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인근에 있어 연관 분야와의 활발한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뜻과 달리 40여 개 지자체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문화 분권과 지역 균형 발전에 역행하는 일방 결정이라며 연대 대응 의사까지 내비쳤다. 국립이 지닌 무게를 헤아리지 못한 서툰 행정에다 고인의 기증 뜻을 기린다며 섣부르게 미술관 신설을 밝혀 논란을 유발한 문체부 탓에 수개월간 헛물만 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체부의 서울 후보지 발표 직후 부산 해운대구 등 18개 기초단체들은 ‘이건희 기증관 비수도권 건립 연대’를 결성해 지역 내 건립을 관철시키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연대 측은 명칭과 회칙 등을 논의하기 위한 사전 의견 협의를 거쳐 이달부터 본격적인 대응에 나설 계획이다. 다만 문체부는 지자체들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기증품 특별관 건립 기본계획 연구’ 용역을 발주하고 본격적인 사업 검토에 나서는 등,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따라서 이건희 기증관 건립을 둘러싼 정부와 지자체 간 갈등과 대립은 향후 대선 전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문체부가 후보지로 낙점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의 경우 인근에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고궁박물관, 삼청동 및 인사동, 경복궁이 자리 잡고 있다. 7월 개관한 서울공예박물관 등을 연결해 문화 클러스터를 이룰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용산(용산동 6가 168번지 6)도 마찬가지다. 과거 국립한국문학관을 건립하려고 했던 이곳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한글박물관, 용산가족공원이 지척이다. 향후 기증관이 들어선다면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을 잇는 문화예술 벨트 조성이 가능하다.
이처럼 교통망이 잘 갖춰져 있고 인구도 많은 서울은 여타 지역 대비 문화예술 향유 및 접근성 면에서 우위에 있다. 미술관·박물관 등 문화예술 플랫폼이 집중되어 있어 관련 기관 간 교류 역시 수월하다. 문체부가 그토록 강조한 ‘건립 조건’에 맞는 최적지임엔 틀림없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그러나 문화예술 향유와 물리적 거리, 인구, 교통은 사실상 상호호혜성이 크지 않다. 주요 요소일 뿐 절대 요소는 아니다. 일례로 브라질의 이뇨칭미술관은 상파울루에서 자동차로 거의 10시간 가까이 가야 할 만큼 입지가 좋지 않으나 연간 관람객만 40만~50만 명이 찾는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현대미술관 또한 노스 애덤스라는 작은 동네 산속에 있지만 한 해 20만 명에 달하는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안도 다다오의 지추미술관이 자리한 일본 나오시마 섬을 가려면 험난한 여정을 각오해야 하나, 많게는 한 해 100만 명 넘는 관람객이 방문할 만큼 예술의 성지가 됐다. 이밖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메마르고 척박한 북극에 위치한 노르웨이 스발바르 현대예술센터를 비롯해, 도쿄에서 기차로 3시간 반 걸려 다카마쓰에 간 뒤 다시 배와 버스로 2시간을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일본 데시마 섬 ‘물의 미술관’처럼 세계 각지엔 산간벽지임에도 문화예술을 향유하기 위해 아침부터 줄서 입장을 기다리는 공간이 드물지 않다.
우리나라의 박수근미술관만 해도 강원도 양구에 위치하고 있으나 독자적인 콘텐츠와 특성을 지닌 전문 운영으로 매달 수천 명의 관람객이 내관한다. 따라서 역사적·생태적·사회적인 환경이 동시에 뒷받침되면 어느 지역이든 접근성과 무관하게 문화예술 향유는 충족될 수 있다. 문체부가 입맛에 따라 해석해서 문제지, 세계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빌바오만 봐도 알 수 있다.
위 사례에서 알 수 있듯 문화예술 향유 확대 차원에서라도 접근성이 좋은 서울에 기증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문화 향유란 향유 주체를 유도해 실제화하고 미적 가치를 점유, 사회 속에서 재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 단지 거주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많이 볼 것이라는 확률의 개념은 아니라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따라서 이건희 기증관은 우리나라 어디에 건립해도 상관없다. 여수, 부산은 물론 남해안 어느 오지에 세워도 무방하다. 관람객을 위한 전시 개발, 제반 시설과 서비스의 질, 콘텐츠의 수준, 주변 환경에 따라 향유 기회는 얼마든지 확대될 수 있다. 특히 가구당 승용차 보급률이 약 90%에 달하고 1가구 2차량 시대임을 감안하면 굳이 서울이 아니더라도 문화예술 향유를 누릴 수 있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물리적 요소란 문화예술 향유에 어떤 걸림돌도 되지 않는 셈이다.
중요한 건 위치가 아니다. 미술관·박물관 통합 공간은 더욱 아니다. 아니, 오히려 통합관은 기증자의 의사에 반한다. 유족이 나름 고민해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각 지역 미술관의 정체성과 성격에 맞게 작품을 기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체부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방대한 기증품에 대한 면밀한 선행 연구·조사다. 최소한 기증품의 연대별·장르별·재질별 분류라도 먼저 하는 게 순서다. 어느 나라든 작품을 기증받을 경우 관련 연구부터 한 뒤 작품 특성에 맞는 기관을 설립한다. 우린 완전히 반대다. 건물부터 지어놓고 작품을 우겨넣겠다는 발상이다.
이는 지자체도 동일하다. 무턱대고 지역에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기증 작품을 통해 어떻게 하면 국민들에게 미술작품에 담긴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부터 이뤄져야 맞다. 그게 이건희 유가족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작품을 수집하고 공공재로 사회에 환원한 이유다. 건축물을 어디에 지을 것인가는 나중 문제다.
한편 미술품과 문화재가 사적 소유를 넘어 공공 자산이 된 이상 기증관에 ‘이건희’의 이름을 붙이는 게 합당한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 이건희를 내세우고 싶다면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특별실이나 기증실 정도를 만들어도 될 일이다. 그렇지 않다 보니 많은 이들이 문체부의 기증관 설립 행태를 가리켜 ‘리움(Leeum) 분관’이냐고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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