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드릴로의 2020년 소설 은 디지털 네트워크 붕괴로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에 고립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자연에서 유리된 도시인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 드릴로는 파국 상황에서 섣불리 구원이나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이렇듯 대재난에 처한 도시의 무기력함은 오늘날의 팬데믹(코로나19)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드릴로가 도시에서 인간의 욕망과 비극을 탐색하는 것처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공포와 불안에 천착하는 인물이 있다. 둘 다 단절과 상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샴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드릴로와는 다른 파격으로 인간에 접근하는 인물은 바로 나홍진 감독이다. 물론 나홍진에게 어울리는 것은 침묵보다는 ‘절규’일 것이다.
과연 나홍진은 풋내기 시절부터 도발적이고 불경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었을까? 2008년 2월, 나 감독의 데뷔작 <추격자>가 개봉해 신드롬을 일으킬 무렵, 그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감독에게 ‘영화 속 무대가 망원동이지만, 영화를 망원동에서 찍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추격자>는 망원동이 부재하는 망원동 영화다). 뜻밖에도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망원동이 실제로 있는 동네인지 모르고 제목을 붙였다는 것이었다. 다소 무책임한가 혹은 젠체하는 건가? 아니, 꾸밈없는 답변이었다. 나홍진에게 특정 지역의 실재성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영화적 리얼리티가 존재했다. <추격자>가 일으킨 충격은 여성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는 목소리로 압축할 수 있다. 하얀 팬티만 입은 채 가방에서 공구를 쏟는 영민(하정우)은 망치와 정으로 미진(서영희)의 머리를 깨트리려 한다. “움직이면 진짜 아퍼”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이 사이코패스는 그녀에게 망치질을 한다. 그의 충동은 절대 그녀(더불어 모든 관객)가 수용할 수 없는 폭력을 동반한다. 하정우의 속삭임과 망치질은 전기 충격처럼 당혹스러웠고, 그 순간 새로운 영화감독이 불청객처럼 등장했음을 직감했다.
<추격자>는 한국 스릴러의 진화라고 호평 받았지만, 엄격히 말하면 나홍진은 고전 스릴러의 계승자가 아니다. 서스펜스는 간담이 아니라 정신을 서늘하게 한다는 롤랑 바르트의 주장을 궁극적으로 실현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영화 세계는 앨프리드 히치콕 식의 심리적(죄의식) 서스펜스와는 거리가 있다. 즉 스릴러의 유산이 이룩한 소우주(위험에 빠뜨린 후 논리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고전주의 영화 미학)에는 관심이 없다. 보통의 스릴러라면 성적 콤플렉스를 지닌 연쇄살인범의 실체에 다가서지만, 그런 정공법은 나홍진의 몫이 아니다. 영민의 정체를 규명하는 대신 고양이와 쥐 게임 같은 추격전이 이를 대체함으로써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급기야 살인마 영민과 추격자 중호(김윤석)는 필름 누아르처럼 혈투의 맞대결을 펼친다. 관객은 죽음의 향락을 즐기는 혐오스러운 존재와 무방비 상태로 맞닥뜨린 것이다. 서스펜스를 계단처럼 쌓기보다는 단숨에 가학적인 폭력으로 대체해 버리는 날카로움은 의외의 솜씨였다(미진이 영민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관객은 온몸이 서늘해진다). 비유하자면, 나홍진은 데뷔작부터 올인하며 배팅을 한 거나 다름없다. 그는 타짜처럼 게임을 좋아하고, 자신의 히든카드를 믿을 정도로 배짱이 두둑하다. 청부살인이 촉발한 설상가상의 파국을 담은 <황해>(2010)는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피칠갑으로 육화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추격자>의 과잉 버전이었다. 인간 백정 정학(김윤석)은 도끼와 족발 뼈를 무기로 사용한다. 이 멈출 줄 모르는 폭력에는 인간의 야만성을 넘어서는 부조리함이 담겨 있다. 해결 불가능한, 해소되지 않는 이야기가 주는 혼란 속에 관객을 빠트린 채 감독 자신도 강박적으로 영화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하다. <황해>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좀 엉뚱하지만 <곡성>(2016)에서 찾을 수 있다. 종구(곽도원)의 친구들이 정육점에서 의기투합해 외지인(쿠니무라 준)을 잡으러 가는 장면에서 놀랍게도 무기로 돼지 족발을 챙긴다. 이것은 숨길 수 없는 나홍진 스타일의 유머다(<황해>의 과도한 폭력을 희화화하며 비틀고 있다).
<황해> 이후 나홍진은 스릴러에서 서서히 벗어나 욕망과 공포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악마 같은 존재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관객 687만 명을 동원한 <곡성>에 이르면 그의 영화적 세계관은 모습을 드러낸다. 실체를 파악할 수 없고 혼란만이 메아리치는 세계! 경찰 종구의 비이성과 무능력함은 고구마 전개를 양산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에게 공포감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좀비, 악마 등의 출몰(병맛 같은 존재의 출현) 덕분이다. ‘맥락 없음’이라고 일축할 만한 엉뚱한 일들이 차례로 나열된다. 이것은 영민의 망치와 같은 효과를 낳는다. 아이러니하지만 나홍진의 세계에선 공포를 불러일으키려면 이유가 확실하지 않아야 한다. 오직 공포 자체가 유일한 수단이자 영화적 탈출구다. 기독교적인 세계관, 무속 신앙, 샤머니즘, 초자연적인 존재(귀신) 등을 개연성이나 논리에 얽매이지 않은 채 뻔뻔할 정도로 자유롭게 활용한다. 따라서 영화 속 현실은 진정한 현실이 아니라 나홍진 방식으로 구조화된 야만적 현실에 가깝다. 문학이론가 프랑코 모레티가 <공포의 변증법>에서 지적했듯이 “더 많이 은폐할수록 그대로 드러낸다는 환상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 필요한 것은 공포다.”
으레 사회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한국적 스릴러는 영화 구조 전체를 뒤흔드는 식의 공포 영화와는 결이 다르다. 현실성을 중요시하는 스릴러의 리얼리티와 공포 영화의 비현실적 과잉은 쉽게 접목되지 않는다. 반면 <곡성>은 스릴러와 공포 영화로 지은 움막 같다. 나홍진은 두 장르를 브리콜라주(재구축, 재조립 시도)처럼 활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혼합 장르지만, 장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스릴러가 만들어낸 틈새를 강렬한 공포로 메우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성취한 것은 머리가 아니라 신체, 피부의 영화다. 스릴러처럼 관객과의 두뇌싸움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좀비에게 피부를 물어뜯기는 충격을 새긴다. 맞다. 이 영화에서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어쩌면 영화에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행위는 나홍진의 덫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그의 영화에서 건축적인 설계도는 의미가 없다). 그는 영화를 분석하는 자들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그의 전략은 교란이다. 틈새, 어긋남, 모순의 연쇄 작용이 만들어내는 혼란이 곧 <곡성>이다. 포스터 문구와 무당 일광(황정민)은 “절대 현혹되지 마라”고 충고하지만, 영화는 마치 최면을 걸듯 현혹의 주문을 외우고 있다. 그 순간, 미끼를 무는 것은 종구이자 동시에 관객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홍진의 영화는 세상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을 슬쩍 영화의 비가시성으로 바꿔치기한다. 나홍진의 성과는 관객이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관객을 강박신경자의 태도(나는 의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로 영화 속에 몰입시킨다.
나홍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일으키는 공포의 힘을 믿고 있다. 그의 영화에는 현실의 안정을 위협하는 타자가 출현한다. 불청객이자 훼방꾼이며 시끄러운 이웃이다. 즉 우리의 이웃은 악마 혹은 괴물일 수 있다. 사이코패스, 황해를 건너온 살인마, 일본에서 온 불멸의 존재. 이들은 모두 우리의 일상에 균열을 내고 파열을 일으키는 존재다. 나홍진이 영화 속에 자신의 분신처럼 보이는 불청객을 지속적으로 초대하는 것은, 세상이 믿는 것을 모두 송두리째 흔들어주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우리 사회가 억압하고 은폐한 것들이 어떤 얼굴로 되돌아오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그 비극적인 얼굴을 영화에 담아낼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에서, 작가주의 감독과 유사한 지향점을 갖고 있다. 그가 OTT가 아니라 스크린을 고수하는 것은 극장이 그에게 공포를 제대로 잉태할 수 있는 동굴이어서가 아닐까!
이제 축축하고 끈적하고 죽음의 퇴폐성에 물든 나홍진의 영화 세계는 <곡성>을 경유해 <랑종>(2021)으로 나아간다. 굴 같은 세상(폐쇄된 세계)을 추구하던 그는 샤머니즘이 생생히 살아있는 태국의 숲과 산에 도착한다. <랑종>은 나홍진이 기획, 제작(시나리오 원안 집필)하고 태국 호러 영화를 대표하는 반종 피산다나쿤이 연출한 영화다. 신내림이 대물림되는 무당 가문에 초점을 맞추며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의 기묘한 정경을 담아냈다. 본격적인 공포 영화에서 나홍진이 유령을 통해 찾아나선 것은 어둠의 심연일지도 모른다. <지옥의 묵시록>(1979)의 명대사처럼 ‘공포(The horror)!’라는 외침이 나올 정도로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세계 말이다. 이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입증했듯 태국의 숲은 구속 받지 않는 향락이 존재하는 곳이자 우리를 보호해주는 방어막 또한 존재하지 않는 세계다. 이곳에 도착한 나홍진이 꿈꾸는 것은 억압되었던 것이 회귀하는 세계이며 귀신과의 접속은 관객을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트릴 것이다. <곡성>은 어쩌면 <랑종>을 위한 테스트나 프롤로그였을지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에게 공포는 늘 매혹의 대상이자 경이로움의 징후라는 것이다. 공포는 그의 영화적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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