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조주의자’
정누리 감독
토론토국제영화제를 비롯, 유수의 영화제에서 단편 <글리제><Edge of seventeen>로 호평 받은 영화감독이지만, 빠르고 집약적인 케이팝 산업에 먼저 몸을 던졌다. 지코 ‘아무노래’, 백현 ‘캔디’, 크러쉬 ‘나빠, 투마로우바이투게더 ‘날씨를 잃어버렸어’ 등을 연출한 정누리 감독 이야기다. 즉흥을 믿지 않고 구조를 중시하며, 안 풀릴 때마다 시나리오 작법서로 돌아간다는 신구조주의자.
검은 밤, 해변, 소녀, 지구와 닮은 행성. 정누리 감독에 대한 첫기억은 단편 SF영화 <글리제>였다. 땅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 수평선 가득 메운 지구를 마주하는 짧은 필름. 한국에서도 이런 SF 단편이 가능하구나, 하는 작은 놀라움에 흥미롭게 기억해두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찍은 정누리 감독이 지코의 ‘아무노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단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날씨를 잃어버렸어’, 이하이 ‘홀로’, 크러쉬 ‘자나깨나’, 백현 ‘캔디’도 연출했단다. “영화와 뮤직비디오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느껴요. 둘 다 구조가 있고, 메시지를 전하죠. 여전히 궁극적으론 영화를 만들고 싶지만, 뮤직비디오로 커리어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해요. 기술을 빨리 배우고 싶어서. 케이팝 산업은 엄청나게 변화가 빠르고 집약적이잖아요. 가장 최신의 온갖 기술이 오가는 장이니까요.”
과연, 케이팝 산업이 크리에이티브 영역의 모든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준 말이다. “제가 만든 케이팝 뮤직비디오 중 가장 만족하는 건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날씨를 잃어버렸어’예요. 팬데믹 상황을 시적으로 빗댄 이야긴데, ‘요즘 애들’을 대변하는 그룹의 성격을 표현하려 여러 기법을 동원해 Z세대의 문법과 기호들을 잔뜩 넣었죠. 이런 재미가 있다는 거예요.” 라스 폰 트리에, 가스파 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사프디 형제까지 “자기 곤조가 있는” 영화를 좋아하며 “스파이크 존즈처럼 스케이트 필름으로 시작해 자기 영화를 찍는 감독들”의 사례를 드는 정누리 감독의 작품들은 확실히 영화적이다. 뮤지션 소금이 피를 뒤집어쓰고 나오는 바밍타이거 ‘Loop?’엔 영화 <캐리>에 대한 오마주가 있고, 이하이 ‘홀로’는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서울 천사의 시>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며, 클라이언트가 아닌 친구 사이라는 Wooze의 뮤직비디오들은 각각 한 편의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다. ‘I’ll have what she have’는 케이퍼무비 <트레인스포팅>처럼 등장인물을 소개하며, ‘Hello Can You Go’에선 메타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처럼 화면 안의 인물과 밖에 놓인 두 인물을 바꿔치기 하는 절묘한 재미를 준다. (그는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영화 트리트먼트처럼 뮤직비디오 트리트먼트를 만든다고 한다.)
영화적이라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눈에 띄는 정누리의 개성이 있다. 그의 영상은 패턴이 반복되는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고, 빙빙 도는 회전목마를 타는 것 같다는 것. “구조 강박이 있어요. 안 맞으면 노이로제가 오죠.(웃음) 처음과 끝이 맞아떨어지는 순환 구조를 좋아하고, 하나하나 해체하고 조립해 맞아떨어질 때 희열을 느껴요. 음악에도 영화처럼 구조가 있어요. 작업 노트에 인트로, 코러스, 벌스 등으로 이루어진 ‘송폼’을 분석해 음악의 구조에 대응하게 이야기를 만들어요. 음악이 어떻게 이야기와 맞아떨어져야 쾌감을 줄까? 작업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는 점이에요.”
작업이 안 풀릴 때면 시나리오 작법을 다룬 기본서로 돌아간다는 정누리 감독은 “새로운 것보다 옛날 거, 클래식한 것”을 좋아한다. “유튜브나 틱톡 잘 안 보고, 왓챠 들어가서 옛날 영화나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보는 스타일”이란다. “요즘 트렌드는 말하자면 ‘로우’한 건데, 그런 트렌디한 사람은 너무 많잖아요? 전 즉흥을 믿지 않아요. 대신 계획을 믿죠. 제가 좋아하는 감독들은 대체로 클래식해요. 전 단단한 구조 속에서 담백하게 메시지를 전하고 싶고요.”
어린 시절 정누리는 “바보 같아질 때까지 TV만 봤다. 혹은 그림을 그리거나.” 맞벌이하는 부모님이 설치해준 스카이프 100개 채널 중 MTV와 해외 만화 채널-그중에서도 <사우스파크>를 보고 또 봤다-만 보며 매일 같이 그림을 그렸다. 6살 때부터 그림을 그린 그는 예고와 미대에 진학했고 네덜란드에 사진 유학까지 갔지만 곧 이미지만을 다루는 일에 지루함을 느꼈다. “세상엔 수많은 매체가 있으니 이미지에서 영상으로 흥미가 넘어갔어요. 스토리와 이미지가 맞닿은 장르를 하고 싶었죠.”
지금 그에게 영감을 주는 아티스트들은 음악과 연기와 각본 감독을 오가는 차일디시 감비노,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시작해 영화를 찍는 히로 무라이, 유튜버와 뮤지션을 겸하는 88라이징 조지, 단역배우로 시작해 감독으로 데뷔한 조나 힐처럼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며 카메라를 드는 인물들이다.
“요즘 영상물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요. 세로형 영화도 있듯 뮤직비디오라는 경계도 더 애매해지고 있죠. 틱톡이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처럼 짧은 클립으로 누구나 해볼 수 있는 것이 됐으니까. 프랑스 싱어송라이터이자 감독인 우드키드처럼 자기가 음악부터 뮤직비디오까지 제작하는 DIY형 아티스트도 많아요. 과거엔 케이팝 뮤직비디오 프로덕션도 아이돌처럼 1세대, 2세대로 나뉘었지만, 요즘엔 인스타그램만 들어가도 뮤직비디오 만든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한마디로 도떼기시장인데, 좋은 의미예요. 누구나 할 수 있고 아무나 해도 된다는.” 얼마 전 친구와 ‘COSMO’라는 우주처럼 드넓은 이름의 사업자를 냈다는 정누리 감독은 유튜브에 송출될 노트북 광고를 만들고 있다. 궁극적으로 영화를 꿈꾸며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었다는 정누리는 요즘엔 영화보다 시리즈물을 작업해보고 싶다. 미드 <모던 패밀리><보잭홀스맨> 같은 OTT 시리즈물을 찍어보는 것이 그의 야심이다.
이 시대의 젊은 뮤직비디오 창작자들에게선 대체로 같은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뮤직비디오를 하고 있지만 내일은 무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유연하고 낙관적인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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