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컴퓨터’
추수 감독
보라, 신인류의 뮤직비디오를. 릴 체리의 ‘Vitamin B’ 뮤직비디오를 보면 저 세상에 다녀올 수 있다. 세계 최초 3D로 만든 VR 뮤직비디오로 시야를 교란시키며 정신을 쏙 빼놓고 ‘모든 인류의 영혼이 컴퓨터에 업로드될 근미래’와 나아가 그 시대의 예술에 대해 논하는, 자신의 작품을 빼닮은 뮤직비디오 감독이자 VR 아티스트, 추수.
“뮤비까지 4차혁명 왔네 세상 왜 이리 빠르냐”, “이 음악을 듣다 정신을 차려보니 VR기계를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LSD 체험 플래시” 등등. 릴 체리의 뮤직비디오 ‘Vitamin B’ 유튜브 댓글들이다. “3D로 만든 VR 뮤직비디오는 세계 최초”라 말하는, 이 신문물을 만든 감독의 이름은 추수. 활동명은 프린세스 컴퓨터. 전자는 ‘가을의 맑은 물’이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줬고, 후자는 ‘컴퓨터 세계의 공주가 되어 하고 싶은 거 다 하려고’ 본인이 직접 지었다. 베를린에서 VR 아티스트로 활동 중인 1994년생 추수는 SAAY의 노래 ‘Omega’ 3D VR 뮤직비디오로 슈투트가르트 국제 애니메이션 필름 페스티벌에서 베스트 뮤직비디오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신인류, 추수의 뮤직비디오들은 약을 빨고 저 세상에서 왔다. VR이라는 신기술을 도입해서뿐 아니다. 데이비드 린치 영화에나 나올 법한 기이한 크리처, 거대 유니콘, 이빨 안경을 쓴 어린이 릴 체리, 가파른 협곡과 유리알 같은 호수, 총천연색 스펙트럼…. 어디서 나온 상상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세계를 추수는 펼친다. 미끈한 불가사리 같은 ‘Omega’의 크리처는 <스폰지밥> 뚱이냐, 생닭이냐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저를 닮지 않았나요? 화가 달리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깜찍하게 만들었죠. 인간과 성별을 초월한 퀴어적 사랑을 상징해요.” 상상력의 원천을 묻자 추수는 답한다. “약을 빨아요. 뻥이고,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요. 호수에 비친 달을 보며 술을 마시는 소동파의 시를 스튜디오에 걸어놨어요. 꿈을 많이 꾸고 우주를 좋아해요. 보쉬 히에로니무스 같은 초현실주의 거장들의 상상력을 훔치죠.” “VR 포르노의 성장세를 보아하니, VR은 미래로다.”
추수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추수는 “뮤직비디오에도 곧 VR의 세계가 올 것”이라 예견한다. “이건 찰나의 ‘기믹’이 아니에요. 20세기에 모니터가 도입된 것처럼, 새 시대의 매체로 자리 잡을 거예요. 장비 발전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라요. 이젠 기기에 달린 카메라만으로 손가락 열 개를 인식해버리죠.” 추수는 3D 툴인 블렌더와 유니티를 끼고 살며, 등장인물, 헤어, 패션, 춤, 모션, 스토리, 배경, 조명, 카메라워크, 사운드까지 하나하나 제작한다. “새벽까지 작업하다 쓰러져도 뇌는 꺼지지 않는 컴퓨터처럼 윙윙댄다”는 그의 노력은 곧 새 세상을 열 것이다. “다른 세계로 데려다주는 기술은 아직까진 VR이 최선두예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두 발을 묶어두는 지구로부터 함께 도망치자!”
퍽 달콤한 제안이다. 추수는 “모든 인류의 영혼이 컴퓨터에 업로드될 날을 대비하고 있다”라며 “근미래일 것”이라 선언한다. “전작 ‘슈뢰딩거의 베이비’ 버전2를 제작 중이에요. 전 이제 엄마가 절 낳은 나이가 됐는데 여러 나라를 오가고, 안정된 수입도 없고, 술은 못 끊겠어요. 그렇다면 작품이 내 자식 아닐까요? 이 세계의 아기나 저 세계의 아기나. 이렇게 시작했던 버추얼 아기 시리즈가 계속되고 있죠.” 그의 차기작은 AIM사와 함께 제작 중인 버추얼 가수 ‘에이미 문’이다. 가상의 에이미는 인공지능이 만든 노래를 부를 것이다. 추수의 다음 작업은 “뮤직비디오를 넘어 저 세계에 존재하는 가수를 만드는 것”인 셈이다.
한편 추수는 “팬데믹 시대가 음악의 생태계 역시 완전히 뒤바꿨다”고 말한다. “공연장이나 클럽보단 디지털 플랫폼의 영상물에 콘텐츠가 급격히 집중되고 있죠. 뮤직비디오라 퉁 치기 어려운 수많은 종류의 영상들이 쏟아져요. 그 중심은 단연 탈신체화죠. 딥페이크, 3D 그래픽, 버추얼 BJ, NFT 시장의 활성화는 우리가 신체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는 지표예요. 이전엔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를 비춰주거나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졌다면, 이제는 그 둘이 동등하게 존재해요. 혹은 태초부터 동등하게 존재했고 그것이 드러나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는 흥미로운 해외의 사례를 들려줬다. “일본에선 이미 현실세계를 ‘리아쥬’로 칭해 ‘너 리아쥬에 살고 있구나’ 같은 말을 해요. 전 리아쥬에서 페인팅도 하고 판화도 찍고 글도 쓰고 타투도 하죠. 지금은 리아쥬의 신체가 버추얼 세계의 영상을 만들고 있지만, 언젠가 탈신체화해 컴퓨터 안에서 영원히 예술을 지속하고 싶어요.”
벌써 가상세계에 반쯤 발을 담군, 이 신인류의 인간일 적 모습이 궁금해 어릴 적 좋아한 것들을 물었다. “오직 게임. 밈. 그리고 책. 대전 게임이나 FPS를 밤새 했어요. ‘철권’, ‘서든어택’, ‘오버워치’ 3D 영웅들을 요리조리 돌려보면 눈물이 나올 것처럼 아름답죠.” (얼마나 게임에 진심이냐 하면, 그는 학부 시절 게임 ‘오버워치’의 미학적 로직을 분석하는 논문을 썼다.)
추수는 “온갖 인터넷 밈에 절어 살아왔지만 영상 감상엔 약하다”고 말한다. “남이 정해 놓은 템포를 따라가는 게 힘에 부쳐요. 서로 상호 작용이 가능한 게임이나 내 호흡을 가져갈 수 있는 독서가 안정적인 뇌 상태를 만드는 것 같아요.” 이것은 아마도 곧 영상에서도 인터랙션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 이유이자, MZ 세대의 특징 중 하나리라. 베를린에서 활동 중인 추수는 그곳을 ‘배틀필드’라 부른다. “매일 깨지고 울고불고 해도 어려워요. 24시간 싸우며 배우죠. 예술, 언어, 싸우는 법, 너를 이해하기, 나를 헤쳐 풀기, 사랑하며 살아가기. 하드코어한 비평문화 역시 제게 꼭 맞아요.” 독일과 벨기에에서 네 번 개인전을 열고, 루마니아에서 개인전을 준비 중인 그는 “펄떡이는 정신만이 클래식이라는 일념”으로 하고 싶은 걸 한다.
“…그러다 보면 같은 방향을 주시하는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을 길에서 만나요. 그럼 반갑게 손을 맞잡고 걷고, 키스하고, 때로는 가볍게 포옹하며 헤어지며, 그렇게 산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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