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여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여름 속에 있어도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어쩐지 너무 멀어서 경험해본 적조차 없는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 여름의 뜨거운 열기도, 여름이 상징하는 어떤 청춘의 기억도 지나치게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존 치버의 소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도 그렇다.
여름마다 화이트비치 별장에 모이는 너드 가족은 별장에서 보내는 어느 밤이면 그들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여름의 한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기억나?”라고 누군가 운을 띄우면, 구성원 모두가 그날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신이 나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것이 그들의 여름 전통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너드 부인은 어느 순간 문득 떠올린다. 그 아름답던 시절이 어쩌다 이렇게 다 끝나고 사라져버렸는지 말이다. 그들의 삶은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그날과 비교하면 모든 빛과 색을 잃어버렸고, 찌들어버렸다. 소설은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잔혹함을 생각하며 끝을 맺는다.
이 소설을 읽은 것이 아마 가을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겨울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는 지난여름의 기억을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렸다는 것이고, 그 여름의 찬란한 이미지는 사실 내가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기억은 나의 체험과는 무관하게 생겨난다. 지독하게 아름답고 슬픈 한 편의 소설이 이처럼 어떤 경험보다도 강렬한 기억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내게 여름이란 이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쩐지 우스꽝스럽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뒤엉켜버린,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웃을 수 있는 그런 일들로 가득한 것이 되었다. 그 시절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너드 가족과 내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WORDS 황인찬(시인)
호카오네오네의 ‘오라 리커버리 플립’
여름이면 늘 함께하는 신발이 있다. ‘호카오네오네’의 ‘오라 리커버리 플립’이 그것이다. 낡아빠지도록 신었고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내겐 아주 유의미한 신발이다. 아트모스의 브랜드 디렉터로 있던 시절 브랜드 호카오네오네를 한국에 처음 들여오면서 이 신발과의 연이 시작됐다. 당시 호카 코리아가 없던 시절이라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아트모스에서 살 수 있었고, 시장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잊지 못하는 호카오네오네. 그중 오라 모델이 기억 속에 오랫동안 간직되는 이유는 많은 추억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2018년 여름, 오라 하나를 달랑 신고 20일간 파리를 휘젓고 다녔다. 그다음 해에는 일주일 동안 보라카이의 거센 파도를 오라를 신고 흠뻑 맞았다. 이 신발을 만나기 전엔 대중적인 ‘우포스’ 제품을 자주 신었다. 하지만 우포스의 빵빵한 쿠션감 때문에(쿠션감이 독이 될 줄은 몰랐다) 무릎이 쑤시고 새끼발가락이 고통스러웠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게 호카오네오네의 오라 리커버리 플립이었다.
많은 리커버리 신발을 경험했지만 오래 신어도 푹신한 착화감과 내구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 산 게 아니다. 처음 구매했던 모습 그대로다. 달라진 거라곤 신발 군데군데 새겨진 조그마한 상처들과 페인트 자국 정도다. 햇수로 4년이 지났는데 내 육중한 몸을 든든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이 신발이 대견하기만 하다. 약 10년 정도 신발 업계에 몸담으며 많은 신발을 경험했지만 나의 여름은 호카의 오라다. 앞으로도 내 여름을 책임질 오라에 가격을 매기자면, 나이키의 ‘에어 포스 오프화이트×나이키’보다 값지다. 그러니까 이 신발의 리셀가 기준 네이버 최저가보다 1천원 더 비싼 1백15만1천원의 가치를 매기겠다.
WORDS 김승환(브랜드 디렉터)
good times 비니
머리숱이 많은 편이다. 여름이면 머리를 늘 짧게 잘라왔다. 짧은 투블록 커트 스타일로. 사실 그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두상을 가졌고 주목받을까 두려웠다.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생각한 ‘쿨’한 방안은 앞머리를 뒤로 과감히 젖히고 비니 모자를 쓰는 것이었다. 죽 부산에서 살던 내게 어느 날 서울에서 작은 공연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촌놈으로서 서울에서 하는 첫 공연이었기에 새 옷이 필요했다. 웍스아웃에서 새 옷과 신발, 그리고 영혼의 단짝 비니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나름 신중히 고르고 골라 와인색 컨버스, 브릭스톤 티셔츠와 비니를 샀다. ‘good times’가 써진 2만4천원짜리 비니는 스키장에 어울릴 법한 두꺼운 것이라 한여름에 착용하기엔 아쉬움이 있지만, 내겐 덥고 땀이 차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공연날, 나를 보러 온 누나는 내가 입은 얇은 티셔츠와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 두꺼운 비니를 보고 ‘정말 이게 최선이었냐’ 물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날의 내 아웃핏이 어땠건 공연만큼은 최선을 다해서 했으니까. 그런데 집에 와 공연 영상을 보니 옷이 꼭 광대처럼 우스웠다. 한여름에도 풍성한 머리카락 위로 두꺼운 비니를 썼지만 왠지 한순간도 덥다 느낀 적이 없었다. 익숙해진 탓일까? 두꺼운 비니를 쓰면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은 것처럼 이유 모를 안정감이 생겼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부끄러운 시선들이 차단되는 듯이. 어느덧 시간은 지났고 이젠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시도할 수 있게 됐고 현재 머리를 기르는 중이다. 지금 보니 두꺼운 비니에 쓰인 ‘good times’라는 짧은 구절이 역설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답답해 보인다. 저 모자 속에 내가 숨기고 싶어 했던 창피한 모습들을 꾹 눌러 담아왔다. 안 맡아봤지만 냄새도 고약할 것 같다. 이젠 더 이상 비니가 필요 없다. 곧 더운 여름이 시작될 테고, 여름에 이 비니는 마냥 덥기만 할 뿐이다.
WORDS 머드 더 스튜던트(바밍타이거)
무릎 보조기
최근 이별을 겪었다. 인간의 뇌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했던 과거를 새로운 기억으로 덮어 희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의나 타의에 의해 이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를 때, 무의식적으로 아름다웠던 추억으로 미화시켜버린다. 과거의 사랑을 찌질한 기억으로 남겨두는 것보단 사랑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순수함으로 포장하는 게 덜 불편하니까. 유사한 함정에 빠져 판타지 같은 추억 속에 갇혀버린 경험이 있는데, 당시 무릎 보조기와 함께였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친구들과 서핑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서핑 연습한답시고 스케이트보드를 타다 사고가 났고,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부상에 굴복하기 싫어 겨드랑이에 알이 밸 정도로 목발질을 해대며 쏘다니던 어느 여름밤, 소나기를 맞으며 걷고 있었다. 키가 내 명치 정도 되는 여자가 갑자기 나타나 우산을 씌워줬고 집 앞까지 날 친절히 모셔다줬다. 초여름의 습한 공기와 굵은 빗방울, 목발질로 인해 쏟아지는 땀. 이 모든 게 뒤섞여 예민했던 건지 그녀의 친절을 차갑게 거절해버렸다. 내 거절을 무시하고 걸음걸이에 맞춰 그녀가 뒤따라오는데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을 넘어 서 있었으니까. 그녀는 나를 아파트 안으로 밀어 넣고 나서야 우산을 들던 팔을 두드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거듭된 거절에 민망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비 막느라 흠뻑 젖은 긴 생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 보조기에 대고 ‘아이언맨 같다’며 당돌한 농담을 던지던 그녀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의 짧은 미소는 거친 소나기가 내린 뒤 펼쳐지는 일곱 가지 빛의 산란보다 더 찬란하고 싱그러웠다. 사고 탓에 꿈에 그리던 서핑은 포기했지만 아련한 청춘 멜로를 만들어준 내 보조기. 비 내리면 다리의 욱신거림보다 그녀의 모습을 떠오르게 만드는 아이템이다.
WORDS 김형상(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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