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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게슈케를 기리며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출판 산업의 정과 망치를 만든 어도비. 어도비 공동 창업자 찰스 게슈케가 지난 4월 16일 별세했다. 잡지를 만들며 그에게 진 빚을 세어봤다.

UpdatedOn June 04, 2021


디자인 업체와의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이건 말실수인가? 의도한 건 아니데, 상처 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오해다. 명백한 커뮤니케이션 오류. 다시 전화해서 번복할 수 있겠지만 전화하지 않았다. 상대방이 오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바에야 시간이 지나길 바라며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미안함은 남았다. 내 생각이 온전히 상대에게 전달되는 경우는 드물다. 생각도 호환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뉴럴링크가 발전하면 언젠가 사람들의 머릿속이 보이지 않을까. 후배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니 생각을 호환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파일 호환은 중요하다. 요즘은 맥과 PC도, 안드로이드와 iOS도, 한글과 MS워드도 조금은 호환되는 시대 아닌가. 뒤숭숭한 소리를 하며 호환성을 언급한 이유는 찰스 게슈케의 부고를 들었기 때문이다.

찰스 게슈케는 존 워녹과 함께 어도비 시스템을 창업한 인물이다. 이미지를 편집하는 포토샵, 벡터를 다루는 일러스트레이터, 영상 편집 도구인 프리미어, 지금 읽고 있는 잡지를 만든 인디자인 등이 모두 어도비사의 제품이다. 그런 점에서 어도비사를 창업한 찰스 게슈케와 존 워녹은 출판업계 종사자에게는 세종대왕 같은 존재라 하겠다. 찰스 게슈케가 없었다면 아직도 ‘누끼’ 딴다고 가위로 사진을 오려가며 필름 위에 붙이고 있었을 거다. 수전증이 있으면 어떡하지? 박스 그린다고 자로 선 긋고, 오타 발견하면 인쇄소까지 뛰어갔을지도 모른다. 찰스 게슈케가 출판용 소프트웨어를 제작하기 전에는 수작업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과거에는 말 그대로 섬세한 손길이 있어야 그럴듯한 잡지를 만들 수 있었다. 실수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컨트롤 Z’도 ‘복붙’도 쓸 수 없다는 건 나처럼 덜 생각하고 덜 움직이는 극단의 ‘효율충’에게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이다. 다시 한번 찰스 게슈케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긴 자기 고백을 썼다.

찰스 게슈케가 남긴 유산 중에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가 있다. 문서가 안 열리거나 인쇄 오류가 발생할 때 ‘포스트스크립트를 분석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선비도 붓 던지게 만드는 짜증나는 메시지인데, 여기서 말하는 포스트스크립트란 일종의 프로그래밍 언어로서 우리가 작성한 문서를 모니터나 프린터로 출력할 수 있게 정리해주는 기술이다. 다른 컴퓨터에서도, 다른 소프트웨어나, 다른 프린터에서도 작성한 문서를 원 형태 그대로 출력하게 도와주는 것이다. 문서를 작성한 상태 그대로 출력하는 게 지금은 당연하지만 포스트스크립트 출시 전에는 상업용 프린터의 전용 인쇄 프로그램으로 제작한 문서만 출력 가능했다. 포스트스크립트가 1982년 개발된 것을 고려하면 그전 시대에는 문서를 프린터로 출력하는 것이 꽤 비싼 작업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포스트스크립트가 문서와 프린터 호환성을 이룬 덕분에 사무실에서 소형 프린터로 문서를 출력하고, 문서를 다른 컴퓨터에서 열람하고 출력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잡지인들이 비로소 탁상출판(Desktop Publishing) 시대에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찰스 게슈케와 존 워녹에게 붓글씨로 감사 편지 정도는 보내야겠다.

시간이 흘러 컴퓨터 성능은 발전했고, 그래픽과 문서의 품질도 향상됐다. 다양한 문서 작성 프로그램도 출시됐다. 정부나 기업에서 사용하는 한글이나 MS워드도 이쯤부터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작성한 전자문서가 다른 프로그램에서 호환되지 않았다. 정부의 HWP 문서가 기업의 MS워드에서 온전한 형태로 열리지 않는 걸 생각하면 되겠다. 사용자들은 문서 작업 프로그램에서 다른 형식의 파일을 불러오면 줄 간격이 엉망이거나 표가 엉망이거나 그림이 생뚱맞은 곳에 위치하고, 몹시 괴상한 서체로 변경되는 끔찍한 상황을 겪었다. 따라서 다양한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에서 완벽히 호환되는 문서 포맷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3년 어도비사는 유비쿼터스 파일 형식인 PDF(Portable Document Format)를 세상에 내놓았다. PDF로 저장하면 누구에게 보내든 파일이 깨지지 않았다. 문서를 온전한 상태로 열고 인쇄할 수 있었다. 당시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파일 형식이었다. 아마 PDF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온전한 문서 형식을 공유하기 위해선 JPG 같은 사진 파일로 저장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PDF는 벡터 기반이라 확대해도 깨지지 않고, 글자를 선택할 수도 있으니 참으로 은혜로운 파일이라 하겠다.

PDF의 탄생은 찰스 게슈케의 혜안으로 개발됐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는 사무실에서 종이 문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틀렸다.) 서류를 PDF화하는 것은 단순히 문서를 전자화했다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나 소프트웨어, 운영체제가 다르더라도 문서가 완벽한 형태로 공유될 수 있는 전자문서 표준을 확립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실제 2008년 PDF는 국제표준화기구로부터 국제표준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PDF가 안 열리는 컴퓨터 기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찰스 게슈케는 PDF를 비롯해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 등 오늘날 가장 강력한 문서 작업 툴을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존 워녹과 함께 국가 기술 혁신 훈장을 수상했다.

다시 출판 산업으로 돌아오면, 이 업계에서 PDF는 매우 중요한 파일 형식이다. 이미지와 그래픽을 더해 완성된 기사를 온전한 형태로 인쇄하려면 PDF가 필요하다. 지금 읽고 있는 이 기사도 PDF로 저장해 인쇄소에 보내 제작한 것이다. PDF만큼 외부에 보낼 때 안전한 문서 파일은 없다. 완벽히 호환된다. 내가 디자인한 그대로, 내가 쓴 문장 그대로. 오해의 소지 없이 그대로 전해진다. PDF가 없었다면, 찰스 게슈케가 어도비를 창업하지 않았다면 잡지 제작은 지금보다 어려웠을 것이다. 잡지는 찰스 게슈케와 그의 어도비사에게 빚지고 있다. 찰스 게슈케는 회사의 성공은 컴퓨터가 아닌 개인의 창의성이 결정짓는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창의력을 발휘할 도구를 쥐어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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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2021년 0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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