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도 안 맞고 이기는 복싱이 어딨어?”
그에 대한 첫인상은 ‘이 양반 성격 급하구나’였다. 뒤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빠르게 자신은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영화를 길에서, 어깨너머로, 오야들의 욕지거리로 배웠다고 말했다. 류승완 감독이 마스터클래스를 한다는 소문에 온 학교가 들썩였다. 강의를 신청하는 조건이 괴상했다. 10분짜리 시나리오를 써서 내라. 학생이 낸 시나리오 중 하나를 직접 뽑아 연출하겠다. 여러분은 이 영화의 스태프가 되어 연출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봐라. 당시는 2009년, 류승완 감독은 충분히 유명하지만 그에 걸맞은 대표작은 찍기 직전이었다. <부당거래>의 류승완이 아니라 <다찌마와 리>의 류승완이었다. 영화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지만 하도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면서 자신이 뭘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을 그으며 강의를 시작했다. 사실 그때 류승완 감독이 들려준 연출 팁은 지금 하나도 기억 나지 않는다. 내 기억에 남은 건 쉬는 시간에 들려준 <주먹이 운다> 에피소드다. 영화를 준비하면서 본인도 직접 복싱을 했는데, 복싱에서 이기려면 가장 중요한 게 펀치력이 아니란다. “한 대도 안 맞고 이기는 복싱이 어딨어?” 때리는 힘보다 맞고 버티는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스포츠가 복싱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영화를 잘 찍을 수 있을까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그건 영화와도, 삶과도 닮아 있었다. 졸업 학년이라 생각이 많았던 내게 그 말은 묘한 위안을 안겼다. 마스터클래스를 수강하려고 급조해서 쓴 시나리오가 졸업 영화 <필름>으로 발전했다. 이런저런 불안이 가득했던 졸업 시절, 영화를 한번 해보겠다고 나는 아마 그날 결심했던 것 같다.
WORDS 홍석재(영화감독)
“재능은 있는데 깊이가 없다”
대학에 갓 들어갔을 때, 어떤 소설가 교수 할아버지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너는 재능은 있는데 글에 깊이가 없다. 재능이 있다고 하면 기분이 좋다. 깊이가 없다고 하면 언젠가는 생기겠지 싶다.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다. 깊이가 생기지 않았다. 어쨌든 시집도 내고 시인으로 살게 되었고, 이번엔 어떤 시인 교수 할머니 선생님이 하시는 강의에서 내 얘기를 했다. 김승일은 철길에 뛰어들어보지도 않고 시를 쓴다. 그 말이 매우 흥미로웠던 나는 내 시에 그 선생님을 등장시켰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후회한다. 선생님은 내 시에 쓴 것들이 진짜배기 삶이 아니라고 충고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삶은 없고, 타인에게 그런 삶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누가 나를 깊이가 없는 사람으로 보았다면, 철길에 뛰어들어보지 않은 사람으로 본다면, 그 말이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를 결정하는 것은 때때로 내가 아니라 타인이다. 20대 초반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초등학교 시절 글쓰기를 배웠던 독서 토론 논술 선생님에게서 받았던 축하 전화가 생각난다. 선생님은 물었다. 이제 글 써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살아야 하는데 힘들지 않겠느냐고. 나는 답했다. 괜찮아요.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쓰면 된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다 컸네. 그것이 선생님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나는 다 컸다.
WORDS 김승일(시인)
“사적인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겠지만, <고등래퍼> 출연자와 K-팝 아이돌을 인터뷰하고 내 안의 관종 지수와 스쿼트 거부감에 대해 쓰는 내가 묘지에 찾아가서 카네이션이라도 놓고 싶은 인물은 세계적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다. 난 지식인도 아니고 영향력 있는 작가도 아니고 잡지에 대중문화 관련 글을 겨우 끄적거리는 사람이지만 그의 <지식인의 표상>은 내가 게을러질 때마다 (나를 바로잡아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죄책감은 주는 책이다. 사실 그의 표현은 좀 무시무시하다. 조지 오웰을 인용하면 “진부한 표현들, 판에 박은 은유들, 게으른 글쓰기는 ‘부패한 언어’의 사례”라고 말해 이 글도 창피하게 만들며, 아도르노를 언급하며 “자기 집에 있으면서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것이 도덕적이다”라고 말해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나를 못살게 군다. ‘난 뭐 지식인은 아니니까 이 정도 권태는 괜찮겠지…’라고 변명하려고 하면 그는 이렇게 지적한다. “이 세상에 사적인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지식 생산과 유통의 어느 쪽이라도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이라면 지식인입니다.” ‘너무 나대거나 피곤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데…’라는 소심한 호소를 하려고 하면 그는 회피하지 말라고 한다. 글을 쓰는 순간 정치적 세계로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것이 싫다면 글을 쓰거나 출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잡지사에서 일할 때 그 말을 항상 지키진 못했지만 종종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특권 의식을 경계하고 차별과 권력에 지독한 불평불만을 늘어놓아야 하며 관습 대신 혁신을 추구하며 권력자보다는 여행자에 가깝게 사고하라는 스승의 충고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 지고 점점 어려워진다. 뭐, 언젠가는 지킬 수 있겠지?
WORDS 나지언(디지털 미디어 기획자)
“제일 좋은 선생은 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선생, 제일 좋은 시는 시라는 생각이 없는 시”
많은 격언을 잊었다. 말로 떠들 정도의 교양은 널리고 널린 지금에 대한 회의도 있지만 지나치게 모든 것을 자기화하고 마는, 세월의 바람을 오래 맞은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언하는 것은 있다. 점점 더 ‘레토릭’을 믿지 않는것. 좋아하는 책 목록이 뚜렷하게 비슷한 덕에 이성복 선생님과는 단 하루, 인터뷰 기사를 위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성복은 세상의 모든 것을 시론의 무대로 삼는, 선생님이기에 앞서 시인. 징그럽게 솔직하고 신랄하게 지혜로운 그 많은 말 중에서 인터뷰 도입부에 가볍게 나눈 이야기가 가장 선명한 것은, 찢긴 잡지 표지처럼 당황스럽지만 짐작 가는 일이다. 그의 옷에 대한 질문이었다. “제일 좋은 옷은 옷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옷. 그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많잖아? 제일 좋은 선생은 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선생. 제일 좋은 시는 시라는 생각이 없는 시.” 말은 ‘참값’이라는 환상이 씌어 있는 ‘근삿값’이다. 플로베르가 아닌 다음에야 항상 정확한 말을 구사할 수 없는 범인인 탓이지만, 아무리 고심해도 미진한 표현으로 남는 순간이 있고, 그것이 그다음의 말을 부른다. 인터뷰 이후 오래 곱씹다가 문득, 말로 표현하려는 것들이 겪는 모험을 이 말에서 떠올렸다. 그저 말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기 위해 지나온 시간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말 같지 않은 말을 좋아한다.
WORDS 정우영(프리랜스 에디터)
“원칙만 지키면 돼”
선생님은 발목이 드러나는 면바지에 캔버스화를 신고 주황색 칸켄 백팩을 메고 다녔다. 가방 안엔 우리가 제출한 글에 매주 정성스러운 코멘트를 달아주셨던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재미있다’는 말, 작가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응원의 말을 자주 적어주셨던 기억이 난다. 대학원의 드라마 대본 워크숍 수업에서였다. 당시 ‘시네필’이었던 내게 TV 드라마는 상업적인 스킬을 마구 구사해야 할 것 같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드라마건 영화건 원칙은 하나뿐이라 하셨다. 좋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고민한 작법으로, 진실하게 전달할 것.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 물론 원칙을 지키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임을 곧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프로 작가가 되고 나서는 타협할 일이 더 많아졌다. 바쁜 스케줄과 제작 여건, 가끔씩은 내 안의 타성도 이유가 됐다. 7년이 지난 최근까지도 선생님은 그때와 같은 목소리로 “잘하고 있는지” 물어오셨고, 나는 자주 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이럴 때일수록 원칙대로 해, 지형아”라고 말씀하셨다. 원칙은 가장 쉽고 명쾌하지만 가장 실행하기 어려웠다. 남몰래 다른 지름길을 찾고 있을 땐, 선생님 앞에서 조금 부끄러웠다. 다 아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꼿꼿한 작가였던 선생님은 이제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원칙대로”라는 가르침은 여전히 내게 남아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결국 그것만이 유일한 답일 테니까.
WORDS 민지형(드라마 작가)
생물학 교수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학부 시절, 계절 학기에 일반생물학을 들었다. 문과인데 생물학을 들은 이유는 당시에 내게 자연과학에 대한 낭만적인 시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있잖은가? 자연과학을 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고 진짜 지식인 같고, 학문에는 우열이 있는 것 같고. 리처드 도킨스를 지나치게 읽은 ‘남고딩’이 할 법한 생각들.
하지만 일반생물학 교수님께서 그 얄팍한 생각을 확 깨주었다. 교수는 신앙이 남다른 사람이었는데, 어느 정도냐면 신앙과 업무의 구분을 전혀 두지 않았다. 발생학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낙태죄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한다든지. 이건 내가 마음속에 둔 도식과 달랐다. 이런, 과학 교수는 이성적이어야 하지 않나?
유전학을 공부할 때 교수의 진정한 광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별 기대 없는 학생들 앞에 선 교수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다.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의 족보였다. 하와와 아담이 카인과 아벨을 낳고 카인의 아내가 에녹을 낳고…. 교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으로 창세기의 족보를 30분간 강의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지요.” 그것이 멘델리안 유전학이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교수 덕분에 난 그전에 한 적 없는 생각을 해냈다. 인간의 지식 수준도, 한 분야에 대한 그 어떤 전문성도, 한 인간의 합리성 내지는 인간됨과는 그리 관계가 있지 않다고. 애초에 어떤 전공 공부를 하면 이성적이 된다고 믿는 게 얼빠진 일이라고. 이후 교수님과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교수 명단에서 다시 한번 마주칠 수 있었다. 아유, 대쪽 같으셔라.
WORDS 심너울(소설가)
“갔어, 오지 않아”
친구가 심리 테스트라며 원숭이, 뱀, 새랑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어떻게 가겠냐고 물었다. “안 간다”고 했더니 안 가면 즉사한다고 했다. 그래서 뱀, 원숭이, 새가 알아서 기고 걷고 날면, 나는 그 사이를 걷겠다고 했다. “원숭이는 배우자, 새는 자녀, 뱀은 돈인데, 스님이 될 팔자 아냐?” “사주 같은 거야? 심리 테스트라며.” 사주와 심리 테스트는 다르지만, 이제 내 미래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나는 둘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 없다고 느낀다. 2009년 박재범이 미국으로 떠난 날, 내 친구는 JYP 사옥 앞에서 시위하며 펑펑 울었고, ‘1:59’의 시계가 ‘2:00’로 향하길 바랐고, <와일드 바니> 마지막 화를 볼 수 있길 기원했다. 그러다 ‘간담회 녹취록’이 공개된 새벽엔 배신감에 분개했고, 다신 박진영이 만든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이를 갈았다. 나는 팬과 대중이 등을 돌린 그 사건 직후의 2PM을 은밀하게 좋아했다. “속고 또 속고, 당하고 또 당하”다가 “너 없이 멋지게 일어날” 거라 허공에 외치고, “네가 나 없이는 못 살”거라고 대신 큰소리 쳐주던 그 노래들은 불안이 나를 삼킬 것 같은 두려움에 매사 위악을 떠는 20대의 나와 다름없었으므로.
2021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재범이’는 자신이 제작한 가수를 나열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힙합 레이블의 대표가 됐고, 한국인 멤버 전원이 전역한 2PM은 멤버 각자 활동 재개와 함께 그룹으로서 컴백을 앞두고 있다. 길바닥에 드러누워 “재범아 돌아와”를 외치며 JYP를 저주하던 친구는 지금 건설회사에 다니고 트와이스의 ‘Feel Special’을 좋아한다.
옥택연이 옷을 찢고 포효하는 퍼포먼스에 분노를 대리 해소하던 시절의 나 역시 지금과 많이 다르다. 그들의 10년을 내게 겹쳐 보며 깨닫는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말고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걸. 2PM의 ‘Heartbeat’에는 “갔어, 오지 않아”라는 가사가 있다. 지금의 나와 지금의 2PM, 지금의 박재범이 좋은 나는 이제 더 이상 <와일드 바니>의 마지막 에피소드 같은 게 궁금하지 않다.
WORDS 복길(<아무튼, 예능> 저자)
“마음 편히 아프라”
몸이 아팠다. 정신없이 살던 날들 가운데 어느 하루 갑자기 굉장히 많이 아프다는 걸 확인받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몸은 나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눈앞의 일들은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산다. 그때는 그 착각이 매일을 살게 한 것 같기도 하다. 조바심과 책임감의 어느 사이에서, 내리지 않는 열과 오를 수 없는 일상에 헐떡이며 병실 침대에 누워 편히 잠들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할 수 있는 일들은 거의 없었고 해야 하는 일들은 산재했다. 내가 아니어도 될 일들이 있었고 내가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일들도 있었다. 스스로를 탓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어서 아픈 자신을 재촉하고 지친 자신에게 화를 내고야 말았다. 그러던 병상의 날 중 함께 일을 하던 감독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적지 않은 액수의 병원비가 통장에 입금되었고, 문자창에는 ‘마음 편히 아프라’는 길지 않지만 눈물을 쏟기 충분한 문장이 놓여 있었다.
일로 만난 스승은 내게 아플 수 있는 마음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 아플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아픔을 서로 다른 때에 만나고 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문장을 마음에 품은 덕에 조금은 덜 흔들릴 수 있을 것 같다. 완전하진 않지만 아픔은 지나갈 거라고. 몸이 아픈 동안 마음은 스스로가 편하게 해주는 것임을 나이 마흔에 배웠다.
WORDS 진명현(무브먼트 대표)
우리에게 가을 탈 시간은 없으니
시몬 드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 <아주 편안한 죽음>을 읽으며, 오래전 일을 도왔던 한 작가를 떠올렸다. 학부 시절 난 레지던스에 입주해 작업하는 그녀를 도와 출퇴근하며 그림을 그렸다. 입주 기간이 끝난 후로는 왕래가 없었지만, 한 번씩 그녀가 궁금해졌던 것은 세상에 단 하나뿐일 그녀의 이름과 늘 담배 연기 자욱했던 그녀의 방 때문이었을 것이다. 출근하면 지금의 나보다도 한참 어렸을 선생님은 불도 켜지 않은 방구석에 앉아 허공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퀭한 눈으로 “왔니?” 하고 말이 없었다. 나는 슬며시 옆에 앉아 그녀가 슬픔에서 벗어나길 기다렸다. 당시 내게 그녀는 예민하거나 불운한 개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가 예기치 않은 시점에 뜻밖의 방식으로 날 꾸짖으리라고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한동안 업데이트 없던 그녀의 클라우드에서 부고를 발견한 것은 작년 겨울이었다. 그녀가 마흔 언저리에 위암 진단을 받고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살다 사망했다는 추모 포스팅에는 내가 밑 작업을 했던 전성기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죽음을 대면한 그녀는 기억 속 모습과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그녀는 투병 중 처음 SNS 계정을 개설했는데, 그 공간에서 자신에게 사랑받지 못했던 그림들, 지독한 자기 검열에 빠져 허망하게 보낸 젊음, 죽음 앞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욕망,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맘껏 이야기했다. 그녀의 투병 일기를 본 후로 유한함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불만족스러운 일상에 짜증을 내다가도 그녀의 일기에서 본 알몸의 태닝 사진을 떠올린다. 타인의 시선과 자기 증명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가 뿜어낸 그악한 싱그러움을. 보부아르는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며 이렇게 책을 끝맺는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SNS에 “가을 타지 말라”는 농담을 던졌다. 공연한 감상과 우울에 빠질 시간이 없다는 질책이리라.
WORDS 정희민(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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