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끝나지 않은 무언가의 서막>
일곱 장소에서 오가거나 멈춘 듯한 패턴이 반복된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집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일어나서 집 안과 주변을 떠돈다. 이때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젠더 이슈에 관한 부질없는 논평을 제외하고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집에서 떠오르는 상념을 뮤지션 킴 고든의 사운드와 베를리오즈의 레퀴엠에 흘려보내며 따라간다. 거의 홀릴 만하다. 하지만 일곱 편이 모두 좋지는 않다. 의외로 빌리 아일리시의 ‘이웃들’ 은 실망스럽다.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구스 반 산트는 ‘젊음’을 영상으로 그려내는 데 최적화된 아티스트.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어쩌면 <엘리펀트>의 포스터를 보고 구스 반 산트를 초청했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환상’을 토대로 지어진 밝은 파스텔 톤의 옷들을 입고 있는 젊음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나른하게 서성인다. 그들에게는 어떤 목적도 없어 보이지만 어디에서나 행복해 보인다. 그래서 이 숨이 막힐 정도로 결벽증적인 구찌의 세계는 도리어 새로운 세대가 원하는 미래를 묘사한 정치적 SF 영화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WORDS 김도훈(작가)
성별을 가늠하기 힘든 중성적인 매력의 주인공이 일상의 장소를 오가며 또 다른 세계의 일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작품은 감독의 전작이 그렇듯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모든 존재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하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어. 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말했어.” 주인공이 도시 곳곳에서 발견하는 쪽지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방황하는 이들에게 던지는 거장의 메시지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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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토레 페라가모 <2021 S/S 캠페인>
영화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한눈에 척 보아도 히치콕의 <마니>로 시작한 다음 <현기증> <새> <의혹의 그림자> <레베카> <백색의 공포> 속 장면들을 변주한 걸 알 거다. 영상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서명이라고 할 만한 몬드리안의 체계적인 구도와 같은 화면을 겹쳐놓으면서 진행된다. 시종일관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서스펜스의 분위기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만을 아는 이들은 의아하겠지만 구아다니노가 <서스페리아>도 연출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루카 구아다니노의 <아이 엠 러브>에서 카메라가 라프 시몬스를 입은 틸다 스윈턴을 쫓아가던 시퀸스를 떠올려보시라. 그건 그 자체로 패션 필름이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캠페인은 그 연장선에 가깝다. 모델들은 원색 옷을 입고 가방을 들고 불안하게 움직인다. 카메라는 그들을 훔쳐보고 그들은 누군가를 훔쳐본다. 이 관음증적인 시선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에서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불안하게 걷던 킴 노박을 연상시킨다. 극도로 과거 지향적이면서도 극도로 모던하다. 구아다니노답다. WORDS 김도훈(작가)
구아다니노가 히치콕 영화를 모티브로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캠페인을 연출했다. 밀라노의 다양한 공간을 배경으로 다섯 인물의 동선을 좇는 이 단편은 히치콕의 트레이드마크인 서스펜스와 조형적인 미학을 계승하고 있다. 계단과 굴곡진 건물들, 절벽과 텅 빈 거리, 창문과 담벼락이 원색 옷을 입은 인간 신체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교차 편집되며 만들어내는 절묘한 리듬감이 ‘과연 루카 구아다니노!’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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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다 <2021 S/S 멀티플 뷰>
프라다는 다섯 명의 예술가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은 쇼’라는 주제로 서로 다른, 아주 짧은 다섯 편의 영상을 연출했다. 윌리 반데페르, 유르겐 텔러, 조아나 피오트로프스카, 마틴 심스, 테런스 낸스는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갇혀 있다. 하지만 감금 상태가 우리의 상상을 멈추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말이 없는 메시지. 윌리 반데페르는 참으로 아름다운 흑백 이미지를 보여주고, 마틴 심스는 극장에 가기 망설여지는 지금 내게 심금을 울리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최근 프라다는 스스로를 재발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라프 시몬스를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선정한다거나, 건축, 예술 분야와 끝없이 근사한 협업을 벌이는 것이 그 증거다. 다만 패션 필름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영상이 아주 새롭게 보이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테런스 낸스가 연출한 챕터가 가장 인상적이다. 그가 그리는 미래적이고 건축적인 프라다의 세계는 어딘지 모르게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서 툭 튀어나온 것 같다. WORDS 김도훈(작가)
프라다의 패션 필름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다섯 예술가에게 하나의 컬렉션을 다양한 관점과 철학으로 바라보도록 한 결과물이다. 매 시즌 진화하고 변하는 브랜드의 모습에서 성찰과 분열을 읽은 반데페르와 보디랭귀지를 통해 모두가 떨어져 지내는 시대, 보편적인 소통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피오트로프스카의 영상 등이다.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실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프라다의 본질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담아낸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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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 세르 <2021 S/S 아모르 파티>
사샤 바르뱅과 라이언 두비아고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이 영상은 주인공을 인조인간처럼 다루면서 홍콩 무술 영화, 사하라 사막, 그리고 사이버 공간의 컨벤션 속에서 국경과 인종을 포용하며 긴 여정 끝에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제목이 뜬다. ‘Amor Fati(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가 했던 말이다. 우리 시대에 이보다 적절한 조언이 어디 있겠는가.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마린 세르의 옷들은 하이엔드 패션과 스포츠웨어의 미래적인 결혼이라고 할 만하다. 이 극단적인 이미지들이 그렇게 새로운가? 영화 <THX-1138>와 <안달루시아의 개>를 연상시키는 장면도 있다. 전반적으로는 타셈 싱의 짙은 영향력이 느껴진다. 이 단편은 그 영향력을 숨길 생각이 없다. 무시무시하지만 의외로 가장 대중적이다. WORDS 김도훈(작가)
백색 공간에 나체로 무방비하게 노출된 안드로진이 패션을 매개로 다른 세계를 넘나든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붉은빛 사막과 <에이리언>에 영감을 받은 듯한 마스크와 수트가 눈길을 끈다.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는 엔딩 신은 인간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는 운명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듯하다. 디자이너는 ‘커넥터’라는 마린 세르의 철학과 SF 장르가 유기적으로 연결됐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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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종 마르지엘라 <2021 S/S 데필레 Co-Ed>
메종 마르지엘라를 보는 심정은 착잡하다. 모두 알고 있다시피 지방시와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는 이탈리아 식당에서 “나는 히틀러를 사랑한다”로 시작하는 반유대인 발언으로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았다.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다시 시작하는 존 갈리아노는 탱고의 선율과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가져온 이미지로 자신의 미적인 감각을 여전히 뽐낸다. 특히 물속에서 신부복을 입은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은 누구라도 매혹될 것이다. WORDS 정성일(영화 평론가)
새로운 시즌에 대한 갈리아노의 영감 사이사이에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가 탱고를 소재로 만든 영상을 삽입한다. 재미있게도 닉 나이트가 만든 장면들은 그가 꽤 오래전에 찍었던 스티브 맥퀸을 위한 화보들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과연 메종 마르지엘라와 탱고라는 음악이 어울리는 가?’라는 생각을 할 즈음, 닉 나이트는 이 브랜드의 오랜 아카이브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굿 같은 결혼식을 벌인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부딪혀서 내는 섹시한 파열음이 있다. WORDS 김도훈(작가)
지난 시즌에 이어 ‘S.W.A.L.K.’의 마지막 시리즈를 선보였다. 패션 포토그래퍼 닉 나이트가 연출한 이번 영상은 코로나19 가 야기한 분리의 시대, 상대방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탱고에 초점을 맞춘다. 리드미컬하게 얽혔다가 풀어지는 몸과 몸, 달빛에 부드럽게 반사되는 실루엣, 탱고를 상징하는 강렬하고 역동적인 빨간색 등 모든 장면이 극적인 가운데 때때로 팀 버튼의 <유령신부> <페니 드레드풀>을 연상시키는 고딕 호러의 정서도 엿보인다. WORDS 장영엽(<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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