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기에 빠진 올해 극장가에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스타 감독들이 신작을 들고 일제히 귀환한다는 사실이다. 김태용의 <원더랜드>, 김한민의 <한산 : 용의 출현>, 류승완의 <모가디슈>,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윤제균의 <영웅>, 임순례의 <교섭>, 이준익의 <자산어보>, 최동훈의 <외계인>, 한재림의 <비상선언> 등 면면이 알차다. 이 중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한 감독이 무려 다섯 명(윤제균, 최동훈, 류승완, 김한민, 이준익)이고 ‘쌍천만’을 기록한 감독은 윤제균, 최동훈 두 명이다. 지난해 개봉을 모색했다가 올해로 연기된 작품(<모가디슈> <영웅> <자산어보>)도, 막바지 촬영이 한창인 작품(<헤어질 결심> <원더랜드> <외계인>)도,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작품(<한산 : 용의 출현> <교섭> <비상선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갖춘 신작이 OTT로 쏠린 무게중심을 다시 극장으로 되돌릴 수 있는 구원투수라고 기대한다.
모두 극장 개봉을 목표로 제작되는 영화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방역 지침 탓에 개봉일조차 정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해가 바뀌기 두세 달 전 다음 해 라인업이 일찌감치 결정되는 예년과 달리, 올해는 두 달이 지났는데도 각 투자배급사는 라인업을 확정짓지 못했다. 오히려 극장 개봉을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다. 한 대형 투자배급사 임원은 “지난해 개봉이 연기된 영화들도 작품 규모, 관객층, 시장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코로나19의 진행 상황을 보며 개봉 시기를 정할 것”이라고 전했다. 위기일수록 더욱 신중히 접근하는 건 스타 감독들의 신작 상당수가 적지 않은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천만 영화’ <암살> 이후 6년 만에 복귀하는 최동훈 감독의 <외계인>은 <신과 함께> 시리즈처럼 1, 2편을 동시에 제작할 만큼 제작비 규모가 매우 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영화는 지난해 3월에 촬영을 시작한 뒤 현재까지 11개월째 촬영하고 있다. 해외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 영화도 몇 편 있다. 류승완 감독이 <군함도>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신작 <모가디슈>는 1990년대 소말리아 내전으로 고립된 남북대사관 공관원들의 탈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아프리카 모로코 에사우이라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진행됐고, 제작비는 2백억원대다. 임순례 감독의 <교섭> 또한 중동에서 피랍된 한국인들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외교관과 국정원 요원의 이야기로, 아라비아반도 요르단과 국내 촬영을 병행했다. 순제작비만 1백50억원대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비상선언> 약 2백75억원, <영웅> 약 1백50억원, <한산 : 용의 출현> 약 3백억원 등 여러 영화들도 제작비가 만만치 않은 액수다.
“<승리호>처럼 넷플릭스로 가면 되지 않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쉽게 던지곤 한다. 극장 매출액에 대한 의존도가 큰 한국 영화 산업에서 관객이 텅 빈 극장 대신 넷플릭스로 방향을 선회해 제작비라도 보전하면 투자자에게 손해 끼칠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다.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승리호>를 예로 들면 2백4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를 3백10억원에 파는 게 <승리호>를 투자·배급한 메리크리스마스에게 정말 이익일까. 기본적으로 투자배급사는 제작사와 극장 사이에서 대형 자본이 필요한 영화에 자본을 투자하고 리스크를 감당하는 방식으로 수익을 얻는 모델이다. 손해를 보지 않는 것이 투자배급사의 목표도 아닐뿐더러,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된다. 창작자와 투자자 사이에서 돈을 대는 브로커 역할인 투자배급사가 생존하려면 보다 많은 수익을 올리는 길밖에 없다.
더군다나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넷플릭스행을 문의하는 한국 영화가 지난해 말부터 부쩍 늘었다. “넷플릭스가 극장 개봉하지 못한 대형 투자배급사의 영화 편집본을 이미 다 봤다고 한다”거나 “넷플릭스행을 문의하려는 한국 영화의 줄이 넷플릭스 코리아가 위치한 종각에서 종로5가까지 이어졌다” 같은 말이 나오는 것도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모두가 넷플릭스로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넷플릭스가 제작자(혹은 프로듀서)에게 지급하는 프로덕션피가 기존의 12%에서 4%까지 무려 8%나 떨어졌다”는 얘기도 나온다. 제작비 명목의 프로덕션피 4%는 제작자나 프로듀서의 몫인 제작 지분을 제하고 기획·인건비 1억5천만원만 받고 영화를 만들라는 얘기와 같다.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유일하게 있는 셈법인 부율(극장 매출이 발생하면 한국 영화는 배급사 55, 극장 45로 각각 나눠 가지는 비율을 뜻한다. 프로덕션피를 받는 할리우드나 중국과 달리 한국은 영화가 흥행할수록 투자배급사와 제작자가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편집자)을 포기하고 할리우드나 중국처럼 프로덕션피만 받고 영화를 만들어도 좋다면 넷플릭스도 그리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그럼에도 모든 작품이 넷플릭스 투자를 받을 수 없고, 투자를 받더라도 알려진 것처럼 넷플릭스가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게 아닌 까닭에 감독이나 프로듀서는 외주 프로덕션 역할에 그칠 수 있다. 그러니까 선택받은 오리지널(영화나 시리즈)을 제외하면 넷플릭스행이 능사만은 아닌 셈이다.
극장인가, 아니면 OTT인가. 한 치 앞도 가늠하기 힘든 산업 상황에서 일단 CJ ENM(<서복> <영웅> <외계인> <헤어질 결심>)과 롯데 컬처웍스(<모가디슈> <한산 : 용의 출현>) 같은 대기업 투자배급사의 라인업은 코로나19와 시장 상황을 관망하며 평소처럼 극장 개봉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두 회사의 공통점은 CJ CGV와 롯데시네마라는 극장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사 계열사인 극장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 쉽게 OTT 문을 두드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 특히 CJ ENM은 스스로 “한국 영화 산업을 이끄는 리딩 기업으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라인업을 OTT에 판매하는 거래는 일어날 가능성이 낮다. 물론 예외도 있긴 하다. 지난해 롯데 컬처웍스가 코미디 영화 <차인표>를 넷플릭스에 판 결정은 사실 의외였다. 개인적으로는 자금력이 부족하고, 막대한 제작비를 쏟아부은 메리크리스마스가 <승리호>를 넷플릭스에 판 것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아마도 <차인표>가 제작비가 높지 않아서 가능했던 거래인 것 같다. 어쨌거나 <외계인> <모가디슈> <한산 : 용의 출현> 같은 제작비가 높은 CJ ENM과 롯데 컬처웍스의 라인업은 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여름, 겨울 시장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이 대작들을 올해 극장가에서 만날 수 있을지는 방역 상황에 달렸다. 시장이 커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내년 개봉도 배제할 수 없다.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되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 배급을 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만추> 이후 김태용 감독의 10년 만의 상업 영화이자 박보검, 수지, 공유, 최우식, 정유미, 탕웨이 등의 출연으로 영화계 안팎에서 화제가 된 <원더랜드>가 그런 방식을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아인과 박신혜가 출연했던 영화 <#살아있다>를 떠올리면 된다. 지난해 <#살아있다>는 극장에서 개봉해 1백90만 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의 관객을 동원했고, 3개월이 지난 9월 넷플릭스에 공개돼 이틀 만에 한국 콘텐츠로는 처음으로 넷플릭스 영화 부문 1위에 오른 바 있다. 극장에서 먼저 선보인 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 극장 산업이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개별 국가별로 해외 극장 판권을 판매하기보다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하는 편이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 밖에도 메가박스는 임순례 감독의 신작 <교섭>의, 쇼박스는 한재림 감독의 항공 재난 영화 <비상선언>의 극장 개봉을 염두에 두고 있다. 5월 개봉을 고려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오지만 정확한 개봉일은 그때 가봐야 정해질 듯하다.
1년 중에서 가장 파이가 큰 성수기는 여름, 추석, 겨울 시장으로 한정되어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언제 어떻게 확산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개봉일 잡기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 개봉 준비를 사전에 철저하게 하고 시장 상황을 재빠르게 판단한 뒤 누구보다 빨리 결정하느냐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올해 별들의 전쟁을 관전하는 주요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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