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이후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레나>와의 마지막 만남도 약 3년 정도 되었고. 그간 작품도 많이 했더라. 그 시간을 돌이켜보면, 기억에 남는 게 무엇인지 궁금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주 바빴다는 거다. 그간 드라마 3편을 했고, 예능 프로그램 2편을 했다. 영화의 디졸브 장면처럼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했다. 일들의 오버랩.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하하.
듣기만 해도 엄청났을 것 같다. 과거 인터뷰를 보면 이제 혼자의 삶을 즐기겠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작품 수를 들으니 그 삶은 없었겠다.
진짜 혼자 있었다. 일하고 집에 와서 혼자 있고. 잠깐씩 운동하고. 또 나가서 일하고. 그래도 혼자만의 시간을 조금 더 마음 편하게 보내긴 했다. 과거에는 부모님이나 가족이 걱정할까 싶어 연락도 종종 드렸다. 이제는 그런 면에서 조금 편해졌다. 가족 각자의 생활이 더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홀로 있는 휴식 시간에 좀 놀아야 했을 텐데, 맘껏 놀았나?
아, 이제는 그냥 집에 있는 게 편하더라. 일주일 정도 쉬면 여행 가는 것도 좋겠지만, 집에 늘어져 있는 게 참 좋더라. 지난 몇 년간 나는 거의 아이돌처럼 지냈다. 그들은 1년 내내 워낙 바쁘지 않던가. 앨범 발표, 공연 준비뿐만 아니라 그들은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도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너무 기뻐요’라고 하는 말들이 진정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하게 됐다. 내가 딱 그랬으니까. 가끔 소속사 대표님하고 이야기하다가 “아우, 스케줄이 무슨 아이돌급이냐. 지금 내 나이가 있어서 이렇게 하면 힘들다”고 토로하기도 했으니까.
<도깨비> 이후 진짜 그런 삶을 살았다. 인기가 엄청 났으니까.
맞다. 2017년에는 아시아 투어도 7개국 정도 다녔다. 공항 가면서 꽤 재미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나라에 가는지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내일 출발이다”라고 하면 차 안에서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지?”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많은 나라를 정신없이 다니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 같더라.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 바쁨이 고마움으로 다가오더라. 휴식, 재충전도 좋지만 내가 바쁘다는 건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고, 찾아주기 때문이니 말이다.
이동욱이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만 보면 간격이 있어서 여유로운 삶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음을 오늘 깨닫게 됐다.
2019년은 정말 매우 바쁜 해였다. 드라마 <진심이 닿다>를 촬영하면서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X 101> MC를 맡았다. 방송 진행을 하면서 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를 시작했고, 끝날 때 즈음 토크쇼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를 준비했다. 이게 끝나자마자 <구미호뎐> 준비와 촬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뷰 당일인 2월 6일 전날) 어제 영화 <싱글 인 서울>의 촬영이 끝났다. 헉헉.
2019년은 진짜 배우로서의 일정만으로도 꽉 찬 한 해였네.
그랬었다. 특히 지금은 드라마 촬영 환경이 과거와 많이 달라져서, 예전처럼 밤새워가며 3개월 딱 찍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이는 표준근로계약과 주52시간 업무 준수 등으로 제작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제작 일정이 길어졌다. 이제 드라마 한 편을 들어가면 6개월 정도 소요되기도 한다.
최근 드라마 제작 과정을 보면 완전 사전 제작, 반 사전 제작 정도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더라. 배우 입장에서는 이 시스템이 어떤가?
사실 점점 그렇게 변화해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옛날 사람이잖나. 1999년부터 이 일을 해왔으니까. 얼마나 많은 밤을 새고, 얼마나 가혹한 일정을 겪었겠나. 어떨 땐 드라마를 하는 게 겁나는 순간도 있었다. 4개월간 무수히 밤을 지새겠구나. 그 기간 동안 하루 2~3시간만 자면서 산다는 건 진짜 고통이거든. 그런데 시스템이 변화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쉴 수 있고, 잠도 6~7시간은 자면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더 고생하는 스태프들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개선되어가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동욱은 토크를 하고 싶어서>를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신선했다. 배우 자신의 이름을 걸고 토크쇼를 했다는 건 큰 도전이었을 거다.
도전이었다.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일 측면에서) 긁어 부스럼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잘하면 본전이고, 또 얼마나 많은 평가를 받을 것이며, 말실수 한 번에 얼마나 많은 포화를 받을 것이며 등등. 그런데 내가 토크쇼를 좋아한다. 우리 어릴 때 기억나지 않나? 주병진, 이홍렬, 자니윤 등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들 말이다. 나도 그런 걸 보면서 자랐고, 또 미국 토크쇼들을 보아왔다. 너무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에 대한 꿈도 꾸곤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내게 제안이 온 거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어느 순간 바쁨이 고마움으로 다가오더라.
휴식, 재충전도 좋지만 내가 바쁘다는 건
누군가 나를 인정해주고, 찾아주기 때문이니 말이다.”
그럼 토크쇼라는 버킷 리스트 하나를 지운 셈이네.
맞다. 꿈 하나를 이룬 셈이다. 물론 토크쇼는 어렵다. 배우들만 게스트로 나오면 그나마 수월할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어렵다는 거다. 정치인, 바둑 기사, 복싱 선수 등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시간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굉장히 의미가 깊은 프로그램이었다. 게스트 한 분을 만나기 위해 100~150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를 읽는다. 그리고 스태프들과 회의를 한다. 스튜디오 촬영, 야외 촬영 등 할 일이 많다. 쇼 1회를 내보내기 위해 거의 3~4일 이상 할애해야 했다. 힘들지만 의미도 크고 재미있었다.
인터뷰 준비를 하면서 <도깨비>를 다시 한번 정주행했다. 다시 봐도 웃기고 슬프더라. 이동욱의 캐릭터에 더 중점을 두고 봤는데, 당신이 맡은 저승사자를 보며 이동욱의 연기 스펙트럼이 확장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캐릭터 속에 로맨스 코미디, 스릴러, 멜로, 사극 등 다양한 장르가 융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깨비> 속에서 내가 연기한 캐릭터만 세 가지니까. 과거의 왕, 저승사자, 환생 캐릭터. 이게 결국 순발력과 연결되더라. 드라마 촬영은 순서대로 쭉 진행되는 게 아니고, 저승사자를 하다가 갑자기 사극 분장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캐릭터 변화에 대처를 하다 보니 내게 큰 도움이 됐다.
이동욱에게서 영화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생각보다 영화 필모그래피가 별로 없더라. 이제 막 촬영이 끝난 작품이지만, 이 때문에 영화 <싱글 인 서울>이 꽤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떤 영화인가?
누구나 살면서 겪어봤을 법한 사랑 이야기다. 조금 지질한 20대 남자의 이야기도 있고, 30대의 현실을 살아가는 남자 이야기도 있다. 마치 성장 드라마 같다고 할까?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예전에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 현장의 차이가 꽤 많이 났었다. 그래서 배우들이 영화 매체를 더 선호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어떻든가? 오랜만에 영화 현장에 가니까 말이다.
물론 오랜만에 영화 촬영을 해서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드라마 현장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일단 두 매체에서 사용하는 장비들이 거의 동일했다. 장비 뿐만 아니라 제작 환경도 거의 비슷하다. 이런 변화들이 가속화되면서 영화와 드라마를 굳이 구분하는 게 점차 무의미해지는 것 같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면서 느낀 점이 이런 것들이었다.
그 변화는 사실 한국 드라마의 수준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인 듯하다.
맞다. 과거에는 분명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조금 더 분명했다. 하지만 현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 OTT 서비스들이 생겨나면서 제작비 자체로는 영화를 추월한 지도 오래되었고.
그래도 영화만의 장점이 있을 거다.
완벽히 다 만들어서 두 시간짜리 이야기를 관객에게 내놓는 것과 약 10회 분량쯤 촬영하고 방송이 시작되어 끝날 때 조금 힘이 부치는 상태로 마무리되는 것. 후반 작업의 시간과 완성도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는 듯하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드라마도 16부작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10부 또는 12부작 정도로 줄이면 더 좋은 결과물을 시청자에게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제작 기간은 같더라도 10개 에피소드를 방영하는 것과 16부작 편성을 하는 것은 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영화 촬영 현장에 있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됐다. 시스템적인 것들에 대한 생각.
만일 다음 작품을 다시 한번 영화로 선택한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나?
그간 다양한 캐릭터를 해봤지만, 다른 데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조금 거친 액션을 해보고 싶다.
왜 액션인가?
<구미호뎐>을 하면서 액션에 대한 편견을 깼다. 과거에는 ‘내 몸만 힘들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액션을 통해 느껴지는 어떤 서사가 있더라. 단순히 주먹질하고 발차기하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던 차에 끝까지 가볼 수 있는 거친 액션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금 액션’ 말이다.
액션 장르에도 여러 범주가 있다.
진짜 몸으로 전부 다 해야 하는 액션을 해보고 싶다.
2020년을 거치며 우리는 정말 삶에 있어 생경한 변화를 맞이했다. 본인에게도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한 변화가 있나?
일단 촬영 일정의 불투명함이 지속적으로 생겨났다. 촬영 장소 섭외의 어려움이 굉장히 커진 걸로 안다. 과거에는 협조, 협찬 등이 잘되었던 공공기관, 다중시설 같은 곳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봉쇄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음 촬영 장소가 아파트 단지라 치자. 과거엔 쉬웠던 협조가 이제는 주민들의 반대 등으로 인해 힘들어졌다. <싱글 인 서울>도 애초 일주일 전에 끝났어야 하는데, 로케이션 장소를 못 찾아서 조금 밀린 거다. 당연히 접근하기 쉬웠던 남산공원, 한강공원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법원, 경찰서, 공항 등도 어려워졌다. 대체 장소를 찾는 게 일이 되어버렸다.
현장 상황으로 인한 일정 조절 문제 때문에 배우 일정에도 문제가 발생했을 듯하다.
맞다. 평상시 같으면 언제 개봉하고 언제 홍보 활동하면 된다고 알고 있으면 되었다. 하지만 팬데믹으로 개봉 자체가 미뤄지면서, PR 관련 일정도 어떻게 될지 불투명해졌다. 그래서 계획 및 일정에 대한 불투명함이 가져온 변화가 크다. 내 직업에 팬데믹이 영향을 미친 가장 큰 변화가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사건이나 사고 없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어제와 같은 오늘.
내일도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게 아주 소중함을 깨닫고 있는 지금이다.”
그럼 개인적 변화는 없나?
연기할 때 마스크를 벗을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분장할 때는 마스크를 쓴다. 촬영장에서 화장실을 갈 때도 써야 한다. 지금 우리가 인터뷰하는 중에도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나. <아레나>와의 화보 촬영 현장에서도 카메라 앞에 선 나를 제외하고는 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사소한 것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현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말. 바로 “여행 가고 싶어 죽겠다”다. 그만큼 운신의 폭이 좁아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금 더 자유로운 시기가 온다면 이동욱은 뭘 하고 싶나?
굳이 해외가 아니어도 낚시를 하러 가고 싶다. 제주도쯤으로. 물론 지금은 현지인이 외지인이 오는 걸 싫어하실 수도 있어서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다. 사실 2월 말까지가 낚시하기 참 좋을 때인데 아쉽다.
과거에도 자신의 삶은 단조롭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은 무지하게 바빴다. 이런 와중에 당신의 삶에 대한 접근 또는 생각은 어떤가?
예전에는 그랬다. 쉴 때는 꼭 뭔가를 해야 하고, 취미 하나쯤은 즐겨야 하는 것 아니냐고. 최근 내게 즐거운 삶이란 뭘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아주 바쁜 와중에 그냥 평범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아주 소중함을 느꼈다. 별 탈 없이, 어떤 사건이나 사고 없이,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어제와 같은 오늘. 내일도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게 아주 소중함을 깨닫고 있다. 어떤 다이내믹, 액티비티한 일들을 내 직업 특성상 많이 겪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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