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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주택은

나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여섯 살 어린 시절로의 회귀라고 답하겠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의 작은 한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너른 마당의 토담집에서 닭의 부리를 피해 종종걸음 치던 그때로 말이다. <br><br> [2007년 7월호]

UpdatedOn June 21, 2007

 성화를 밝힌 올림픽 대교와 그 밑을 흐르는 검은 아가리의 한강 물이 사각의 유리창 속에서 나의 동공을 희롱하는 새벽이다. 여러 겹의 탯줄을 감은 아기의 모습을 한, 침상 위의 어머니에게 나는 눈물로 수유를 한다. 문득 악몽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차라리 몸뚱이를 차곡차곡 접어 서랍 속에 넣어둘 수만 있다면, 그리 하고 싶다. 때가 되면 그 누군가가 나를 꺼내 ‘탁 탁’ 바람 소리 내어 잘 편 후  햇살에 뉘이고 먼지와 곰팡이를 털어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독자에게 전할 편지를 쓰지도 않았는데… 한마디 단어도 그 어떤 초성도 떠오르지 않는 새벽이다. 그저 속이 훤히 비치는 습자지 하나 건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이달, 날 비겁한 안성현이라 불러도 좋다. <아레나> 편집부에서 가장 늦은 원고 마감을 하고 가장 초라한 변명을 하는 중이므로. 부끄럽지만 이렇게 고백하는 건 그나마 이게 최선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된 어머니를 품은 나의 가슴엔 세상-의료진과 병원을 포함한-에 대한 분노가 강을 이룬다. 마음은 비탄에 젖어 흐느적대고 몸은 눈물에 젖어 허우적거린다. 이성과 지성은 원초적 분노 앞에 힘을 잃는다. 나의 분노는 내 안의 지독한 폭력성을 일깨운다. 시퍼런 도끼 자루를 휘둘러 누군가의 뒷덜미를 두 동강 내고 싶은 열망에 신열이 날 지경이다. 나의 분노는 아직 세상 앞에 냉정하지 못한 탓이다. 어젯밤 나는  세상에서  날 가장 무식한 인간으로 취급했던 새파란 레지던트의 뒤통수에 비수를 내리꽂는 꿈을 꾸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환상을 보았고, 순간 매캐한 최루탄 냄새 비슷한 게 느껴졌다. 코끝이 저릿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하루에도 이러한 수십 가지의 환상을 넘나드니 건강한 편지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겠다. 죄송할 따름이다.  밤마다 말코비치의 뇌 속을 유영하듯 혼란에 빠진 다중인격의 나를 너그러이 용서하길 바란다. 낮과 밤이 극단으로 이분화되면서 시차 적응을 못하는 여행자처럼 떠돌고 있을 뿐인데… , 선선한 편지 대신 실연녀의 일기장 같은 너덜거리는 속내를 들이미는 부끄러움을 어쩌지 못하겠다. 하지만 아직은 논리의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편집부 기자들에게 돌아가며 대필시키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손끝에 몰리는 피의 중력으로 자판을 누른다.

나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여섯 살 어린 시절로의 회귀라고 답하겠다.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의 작은 한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너른 마당의 토담집에서 닭의 부리를 피해 종종걸음 치던 그때로 말이다. 다식판에 콩기름을 먹여 목면으로 윤을 내던, 한입 가득 베어 문 찬물을 순백의 옥양목 이불보를 향해 잘게 쪼개어 내뿜던 어머니의 등 뒤로 돌아가겠다고 말이다. 어차피 꿈이고 기적이라면 내 인생 최고의 날로 돌아가고 싶다. 그도 아니라면 지난밤 꿈에서처럼 작은 한옥 하나 얻어 살고 싶다. 어머니와 함께 겹매화, 금어화, 참나리가 흐드러진 마당을 산책하고, 진분홍색 분꽃의 설익은 꽃씨 주머니와 꽃술로 귀고리 만들며 농치고 싶다.

꿈에 그리는 집은 천국에 이르는 문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그곳엔 마당이 있고 꽃이 있고 시간은 천천히 흐르며… 가족이 있다. 이달 <아레나>의 몇몇 칼럼엔 우연히도 집에 관한 달달한 이상이 녹아 있다. 제목부터 노골적으로 주택을 예찬하는 ‘주택에 살으리랏다’, 이상적인 집과 그 안에 놓여야 할 가구와 그리고 그 드림하우스가 있어야만 할 곳을 친자연적인 화보로 꾸민 ‘Big Match-up’이 그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7월호 대표 칼럼인 ‘펜션 내비게이터’ 역시 같은 맥락이다. 거대한 호텔이 최신식 아파트와 같다면 펜션은 손맛 진한 주택과 같은 느낌이다. 펜션이 아무리 모던하고 스타일리시하다고 해도 그 단출하고 가족적인 속내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불볕더위로 향하는 길목에서 <아레나>의 이정표는 사랑하는 자들과 공유하는 시간으로 향한다.

천개의 혀를 가진 <아레나>는 이달 ‘주택’이라는 화두로 퍽퍽한 나를 잠시 위로했다. 이 책은 늘 이런 식이다.

p.s  <아레나> 7월호엔 앙리 특집 화보와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앙리는 이번 방한 기간 중 두 개의 거대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건 바로 모 오락 프로그램 녹화와 <아레나> 인터뷰였다. <아레나>와의 만남은 국내 잡지와의 유일한 인터뷰였으며 그가 온전히 하루를 할애한 성의 있는 프로젝트였다. 이런 걸 특종이라고 하는 거다.

 

아레나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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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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