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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스키

감촉은 부드럽지만 끝 맛은 씁쓸한, 위스키에 얽힌 사랑 이야기.

UpdatedOn February 1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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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피딕 그랑크루와 발렌타인 글렌토커스 15년 싱글 몰트.

1 제 이름으로 킵해뒀는데 마셔도 될까요?

일곱 번째 소개팅에 나섰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을 기대했지만 그는 회오리 문양으로 워싱된 청바지에 오리털 패딩 재킷을 입고 나타났다. ‘이번에도 망했구나.’ 울적한 기분을 환한 미소로 포장하곤 그를 반겼다. 외모는 어느 정도 합격이었으니까. 소개팅 이틀 전부터 당일 만날 장소에 대한 대화를 줄곧 이어왔다. 결국 소개팅 날까지도 마땅한 장소를 정하지 못한 채 마주했다. ‘어디 갈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묻는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저 질문을 할 것 같아 미리 알아두었다. 소개팅 취지에 맞게 어두침침하고 고급스러운 일식집으로 향했다. 플레이트가 특이한 곳이었는데 눈에 들어올 틈도 없이 그는 호구조사에 돌입했다. 호구조사도 어이없었지만 나를 더욱 당황시킨 건 첫마디였다. ‘결혼은 언제 하고 싶어요?’ 무슨 소린가. 아직 결혼할 나이도 아닐뿐더러 하고 싶은 마음도 없는데. 참고로 너랑은 하기 싫다 말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내 의도를 잘못 파악하고 이 자리에 나왔나 보다. 아무튼, 형제 관계부터 부모님 유무 (이건 왜 물었던 걸까)까지 온갖 질문을 복싱 선수처럼 날렸다. 몇 차례 질문 펀치를 맞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집에 가야겠다 싶어 초밥을 우걱우걱 쑤셔 넣었다. 우아하게 보일 필요도 없었다. 길고 험난했던 디너가 끝난 뒤 그는 눈치 없이 2차를 가지 않겠느냐고 했다. 온갖 싫은 척은 다 했는데 실패한 건가. 안 볼 사람이지만 이왕 나온 거 최선은 다하고 싶어 함께 이동했다. 건대 입구 쪽에 위치한 바였다. 내 취향에 딱 맞는 위스키 바를 찾기 힘들었는데 그가 인도한 곳은 분위기부터 메뉴까지 모든 게 내 취향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바텐더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고 그는 자연스럽게 위스키 한 병을 주문했다. 2020년을 지내면서 당황스러웠던 일은 많았다. 하지만 40만원 상당의 위스키 한 병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덜컥 사주는 그의 모습이 제일 당황스러웠다. 이해가 안 되는 해프닝 1위로 꼽아도 손색없다. 왜냐면 남은 위스키를 내 이름으로 킵해줬기 때문이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가…. 절대 보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나를 붙잡아두려는 속셈이었다. 온더록스로 한 모금 들이켜며 생각했다. ‘잔을 비우면 한 번은 더 만나야 한다.’ 그렇게 세 잔을 마셨고 다음 날 또 만났다. 밝은 대낮에 보니 외모는 내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았고 이후 만남을 이어가진 않았지만 킵한 위스키는 잘 있는지 모르겠다. 미안하지만 그날 마셨던 위스키는 사무치게 그립다. WORDS 이지수(28세, 통역가)

2 사랑의 매

멋모르는 캠퍼스 커플이 반드시 과에 한 쌍은 있다. 그게 나다. 세 살 연상의 누나였는데 새내기인 나를 박력 있게 다루는 모습에 반해 패기 있게 고백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학업에만 열중하던 모범생이었던 터라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내게 그녀는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세상을 알려주었으니까. 맛깔 나는 소맥 제조법, 취하지 않고 술 많이 마시는 법, 칵테일 제조법, 숙취 없애는 법을 알려줬다. 프레젠테이션 잘 만드는 기술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음주 문화 하나는 야무지게 배웠다. 회식 자리에서 유용하게 활용 중이기 때문. 그녀가 알려준 것 중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지금까지 간직하는 건 위스키에 대한 정보다. 갓 스무 살 된 새내기가 위스키를 알 리 없다. 연상의 그녀는 술을 사랑했지만 그중에서도 위스키를 제일 사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도 고작 스물세 살이었다. 그런데도 위스키 마시는 방법을 꿰고 있었다. 간혹 칵테일을 화려하게 만들어주기도 했고 마시는 방법에 따라 잔도 다양하게 구비해뒀다. 그녀는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는데도 베이커리에서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일했다. 이유는 위스키 컬렉션을 위해서였다. 이른 아침부터 아르바이트하고 수업까지 듣느라, 또 밤에는 음주하느라 눈가가 새카매진 그녀가 안쓰러웠다. 물론 본인의 취미 활동을 위해 혹독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거라지만 남자친구로서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한없이 부족한 나라도 뭐든 해주고 싶었다. 어떤 선물을 해야 힘이 될까 고민하던 중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아버지가 거실장에 고이 모셔둔 발렌타인 30년. 아버지의 동태를 살핀 후 없는 틈을 타 잽싸게 챙겨 나왔다. 행여나 깨질까 두툼한 카메라 가방에 넣었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가 바쳤고 비록 반병밖에 안 남았지만 그녀는 행복해했다. 잠깐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언제 들어오냐는 아버지의 전화에 답하지 않은 채 발렌타인 30년을 두고 그녀와 밤을 지새우며 대화를 나눴다.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갔고 아버지께서는 아침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아무 말 없이 거실장을 가리키셨다. 그날 아버지의 골프채가 내 허벅지를 강타하는 화려한 이벤트 덕에 수업에 가지 못했고 그녀와 당장 헤어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버지의 바람은 이루어졌고 그녀에게는 여전히 미안하고 고맙다. 발렌타인을 마실 때면 베이커리 모자를 귀엽게 쓰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WORDS 황수석(32세, 웹 개발자)

3 막장이어도 괜찮아

당시 남자친구는 런던에서 만난 영국인이었다. 외국인과 연애하는 건 처음이었고 서로 다른 문화를 알아가고 적응하는 게 흥미로워 유쾌한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런던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컸다. 귀국을 앞둔 며칠 전 그는 조그만 자수정이 박힌 반지를 내밀었다. 참고로 내 탄생석이 자수정이다. 그는 나와 함께 한국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며 이미 일자리도 알아봐둔 상태라고 했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거의 오열 수준이었다) 손가락에 반지를 쏙 낀 채 한국으로 귀국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그는 옐로 피버다. 아시아인만 줄곧 만나왔다. 하지만 반지로 다져진 신뢰 덕에 그를 믿었다.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가 하루는 야근 때문에 데이트를 못할 것 같다고 전해왔다. ‘어쩔 수 없지’라며 데이트를 하루 쉬기로 했다. 방과후 수업을 준비하는데도 야근이 필요한가 싶었다. 방과후 수업은 참여 학생도 많지 않고 가벼운 수업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해했다. 그날 이후 야근은 주말을 제외하고 이어졌다. 지나친 야근은 내 안에 화를 쌓아갔다. 직접 학교로 찾아갔지만 그는 없었고 연락 두절이었다. 한국에 와 새로 사귄 그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내 남자친구 못 봤냐고 물었다. ‘네 남자친구 지금 압구정에 있는데?’ 당당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압구정에 위치한 파티 룸에서 파티를 즐기는 중이란다. 좌표 찍고 당장 찾아갔다. 그는 파티 룸 한가운데 앉아 있었고 여자는 볼 수 없었다. 주변에는 남자 여섯 명이 전부였다. 안심하기도 했지만 화는 났기에 그를 밖으로 불러냈다. 미안하다며 내게 무릎 꿇었고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그날 이후 더 큰 비극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 달 후 그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했다. 상상도 못한 말과 함께. 실은 한 달 전 파티 룸에 있던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만난 지는 두 달 정도 되었단다. 대체 나를 왜 만난 거냐고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용서를 구하는 말뿐이었다. 이 모든 게 다 꿈인 것 같아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저렴한 위스키 한 병을 샀다. 냄새만 맡아도 어지럽던 위스키가 달게만 느껴졌다. 반병을 마시고 숙면을 취했다. 다음 날 아침 마음이 개운했다. 그와 함께했던 추억은 위스키 반병과 함께 사라졌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네 마음 내가 모두 품겠다고 전했다. 전 남자친구가 되어버린 그, 그의 남자친구, 나. 우리 셋은 친구가 되었고 슬픔을 위로해줬던 위스키를 셋이 모여 함께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자수정 반지는 색다른 경험을 기념하며 여전히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다. WORDS 정윤정(29세, 미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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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GUEST EDITOR 정소진
PHOTOGRAPHY 박원태

2021년 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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