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화보에서는 다른 얼굴의 이연희를 보고 싶었어요. 단호하고 명료한.
그래서 좋았어요. 저는 그간 해왔던 것들 이외에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화려한 모습보단 중성적이거나 단단한 모습도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의 저는 치마보다는 바지를 즐겨 입는, 그냥 털털한 사람이에요.
20년간 몸담았던 SM을 떠나 배우 소속사에 새 둥지를 틀었어요. 기분이 어떤가요?
시원섭섭한 기분? 하하. 학교를 졸업하는 기분이랄까. 서로를 위한 아름다운 이별이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어린 저를 캐스팅해 함께해오신 분들이어서 이젠 새로운 곳에서 활동할 때가 되지 않았나 고민했어요. 배우만 전담하는 소속사에 들어가 긍정적인 자극도 받고 좋은 시너지를 얻고 싶었죠.
지난해 결혼했지만 남편 이야기는 일체 언론에 흘리지 않고 단 한 장의 손 편지로만 소식을 전했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전 공과 사를 구분하는 게 좋아요. 물론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생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대중이나 팬분들께는 제가 온전히 배우 이연희로 보이길 바라요. 어느 누구의 아내 혹은 누군가를 남편으로 둔 사람이라기보단.
2000년대 초반에 데뷔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우리는 이연희라는 사람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과 리얼리티 예능 <섬총사> 외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죠.
일을 일찍 시작했지만, 사람들이 나의 어떤 모습을 좋아할지 몰랐어요. 남에게 비치는 모습에 많이 신경 쓰고, 솔직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죠.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것만 의식했던 거예요. 그런 걸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게 제 숙제예요.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과감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는 리얼리티 예능 <섬총사>에서 그 실마리가 보이긴 했어요. 정 많은 사람이더군요.
평상시 제 모습이 많이 나왔죠. 하하. 저는 그런 게 좋아요. 생활감 있고, 손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꾸려나가는 것. 할머니 손에서 자라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말동무하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요. 전 주어진 상황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잠도 편하게 잤어요.
어린 시절엔 어떤 사람이었나요?
밝고 활발하게 뛰어노는 애. 어느 정도였냐면 부모님이 “해 질 땐 꼭 들어와야 해!”라고 하실 정도였죠. 밖에서 하루 종일 노니까. 놀이터에서 모래도 쌓고, 친구들과 자전거 타고 동네를 쏘다니며 이곳저곳 지리 익히는 걸 좋아했어요. 탐험하는 기분으로.
성장하면서 변화가 있었나요?
일을 시작하면서 낯을 가리기 시작했죠.
제게 배우 이연희의 첫 기억은 이명세 감독의 <M>이에요. 여름 뙤약볕 아래 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환상처럼 어른어른 뛰어다니던 모습.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무구한 얼굴. 많은 감독들이 배우 이연희에게서 첫사랑의 모습을 찾았죠.
어릴 때 저는 그런 것도 몰랐어요. 감독님들이 제게서 그런 모습을 잘 집어내셨고, 표현해주셨죠. 감사한 마음이에요.
가끔은 청순한 첫사랑의 모습을 벗어나고 싶진 않았나요?
벗어나고 싶다기보단 “내게는 이거 말고도 다른 모습이 있어요”라는 생각으로 다양하게 도전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렇게 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많은 분들께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 모습인 걸까요?
저는 <미스코리아>의 꼿꼿하고 줏대 있는 ‘오지영’,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서 칼을 품은 듯 힘 있는 ‘히사코’를 좋아했어요.
맞아요.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셨죠. 마냥 청순가련하지 않잖아요? 그런 캐릭터를 많이 좋아해주시고, 저도 그런 걸 더 해보고 싶어요.
최근작 노덕 감독의 <SF8-만신>에서 배우 이연희의 그런 갈증과 각오를 느꼈죠. 영화에서 헬멧을 확 벗는 순간, 주근깨 잔뜩 돋은 거친 피부에 부스스한 탈색모의 ‘토선호’가 등장해요. 예뻐 보일 생각이 단 하나도 없는, 토선호의 에너지가 느껴졌죠. 무척 반가웠어요. 같은 여성 감독이기에 끄집어낼 수 있는 배우 이연희의 모습이었을 것도 같았고요.
터프하고 누아르적인 SF 작품이죠. 감독님이 꼭 해보고 싶었던 장르였대요. 워낙 좋아하던 감독님이라 함께하는 게 더 즐거웠고. 감독님이 좋았던 건, 저를 바라보는 방식이었어요. 제 필모그래피를 보며 “분명 도전하고 싶은 게 많을 배우다”라는 걸 아셨대요. 그래서 “연희 씨는 토선호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거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보통의 감독님이라면 “연희 씨는 청순하고 예쁜 역할들만 해왔는데 이런 거 괜찮겠어?”라고 물어보셨을 것 같은데, 감독님은 그렇게 바라보지 않으셔서 정말 좋았어요. 첫 촬영 때 거친 피부 표현과 두꺼운 아이라인을 보고 ‘현타’가 약간 오긴 했지만, 하하하. 그런데 감독님이 첫 촬영 때 “너무 잘 어울리는데요?”라고 해주셔서 자신감이 생겼어요.
여자들의 로망이죠. <차이나타운>에서 배우 김혜수가 연기한 보스 캐릭터 같은 것.
맞아요. 너무 멋있잖아요.
이번에 개봉하는 <새해전야>에서는 <결혼전야>에서 호흡을 맞춘 홍지영 감독과 다시 함께했어요.
이야기를 되게 잘 들어주시고, 배우들이 좋아하는 감독님이에요. 여러 배우들이 나와 앙상블 연기를 할 때도 중심을 확실하게 잡아주시고요. 저는 감독님과 작업하는 게 참 재미있어요.
<새해전야>의 진아는 어떤 사람인가요?
진아는 청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예요. 미래가 불안정하고, 상황도 녹록지 못하지만 비정규직으로 열심히 일해왔고, 성실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 빛을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오랜 연인에게 차이면서 갑자기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헌신적으로 사랑해봤자 소용없구나” 생각하는 거죠. 딱 얻어맞은 것처럼. 그다음엔 “나 이제 마음대로 살래”라면서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나는 캐릭터예요.
진아에게 공감 가는 면이 있던가요?
과거에 진아 같을 때가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일에 매진해오다가 20대 중반쯤 번아웃이 왔어요. 열심히 일하며 살아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던 시기였죠. ‘난 아무것도 못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만 봐야 되나?’ 싶고, ‘아무도 날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라는 생각 끝에 혼자 무작정 파리에 갔거든요. 회사에선 혼자 떠나는 걸 말렸는데, “성인인데 왜요? 절대 오지 마세요” 하고선 혼자서 항공부터 호텔까지 예약 다 하고 떠나버렸어요. 대신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 하고. 겁나긴, 전혀요. 오히려 신났죠.
그렇게 무작정 혼자 파리로 떠나보니 어떻던가요?
사람이 막무가내일 때가 있잖아요? 그때 저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었어요. 이전에 화보 촬영하러 갔을 때 마음에 쏙 들어서 ‘나 여기 다시 오리라’ 점찍어둔 마레 지구에 호텔을 잡았죠. 상점과 주택가가 아기자기하게 밀집된 동네를 좋아하거든요. 처음에 지하철 티켓 열 장을 한 번에 샀는데 나중엔 길이 익어서 그냥 걸어다녔어요. 엄청 걷고, 미술관도 다녔죠. 테라스에서 사람들 오가는 것만 봐도 행복하고 즐거웠어요. 당시엔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렇게 혼자 재충전하니, 일을 다시 하고 싶다는 힘을 얻었어요. 그 후 해마다 파리에 한 번씩 갔어요.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진.
20대의 이연희처럼, <새해전야>의 진아는 아르헨티나로 떠났죠?
그 나라는, 깜짝 놀랐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갈 때까지는 흑백 영화 같았거든요. 그런데 들어가 보니 미국 서부 느낌도, 태국 느낌도 나고, 더 들어가니 유럽식 건물들이 많더라고요. 갑자기 컬러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었죠.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곳이었어요. 시차 적응을 위해 2~3일 먼저 떠나 유연석 오빠, 몇몇 스태프와 거리에 테이블 하나 놓인 식당에서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셨는데 참 좋았어요. 이런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촬영에 들어갔죠. 제가 파리 여행을 통해 자랐듯, 진아에게서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연희만의 여행 방식은?
사전 조사를 꼼꼼히 해요. 제가 좋아하는 건 전부 리스트업해두죠. 가고 싶은 데는 꼭 가요!
여행을 못 가서 아쉬운 사람이 여기 또 있었군요.
여행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는데, 다행히 가족이 생겨서 스트레스를 느끼진 못하고 있네요. 하하.
이연희에 대해 잘 몰랐어요.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버거운 시기를 겪기도 하고, 훌훌 털어내기도 하며, 여행처럼 삶을 뚜벅뚜벅 걸어왔다는 생각이 드네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날 내려놔야겠다라는 생각을 못했어요. 제 직업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했죠. 10대, 20대를 그렇게 보내왔기 때문에요. 하지만 이제는 보이는 거예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내가 움츠러들어 있었다는 걸. 이젠 그러지 말자.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 시기를 통과한 지금은 어때요?
더 안정적이고 좋은 나이죠. 10대, 20대를 지나 30대는 시선이 폭넓으니 고민이 깊어지기도 해요. 그런데 10대, 20대 땐 고민을 하는 게 스트레스였고 우울했는데 지금은 충분히 고민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좋아요. 이게 온전히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만의 것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잘 끝내고 나면 분명 내게 더 좋은 일이란 확신이 생겼거든요. 그래서 과정을 중시하게 됐어요.
이제부터는 뭘 하고 싶어요?
생활감 있는 배역을 하고 싶어요. 현실에 실제로 존재할 듯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거라 생각해요. 영화 <중경삼림>에서 쇼트커트를 하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는 ‘페이’ 캐릭터는 무척 매력적이면서도 정말 현실에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이잖아요? 혹은 남들 눈치 안 보고 오만방자하고 명료한, 부자 캐릭터도 해보고 싶네요. 하하하.
좋아하는 것 하나만 말해줄래요?
사실 딱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맛있는 음식에 와인을 마시는 것. 무척 행복감을 느껴요.
추천해주고 싶은 페어링은요?
너무 무겁기보단 와인에 어울리는 안주들을 좋아했어요. 원래는 음식도 프렌치를 좋아하는데, 프랑스 음식엔 빵을 제외하면 파스타나 피자 같은 탄수화물은 별로 없거든요. 문어 요리에 화이트 와인을 곁들여도 좋고, 요즘같이 추울 땐 레드 와인이 제격이죠. 그런데, 한식은 고추장 베이스에 양념이 강해 와인과 잘 어울릴 거라고 예상을 못했거든요. 파리에서 찾은 한식당에서 그 선입견을 깼어요. 갈비찜에 레드 와인, 정말 잘 어울리더라고요. 추천해요.
미식가네요. 와인은 어떤 걸 좋아해요?
피노 누아.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 꽃향기가 은은하게 올라오는 와인이 좋아요. ‘주브레 샹베르탱.’ 뭐냐고요? 부르고뉴 지역 와인 생산지인데, 부르고뉴산 와인 중에서도 이곳의 와인이 제일 좋아요!
역시 또 프랑스. 하나에 꽂히면 제대로 파는 성격이죠?
많이요. 하하하. 좋아하면 할수록 많이 알게 돼요.
이연희는 뭘 믿나요?
욕심을 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전 욕심이 많거든요. 그런데 욕심을 부리면 이상하게 손에 잡히질 않아요. 신이 준 걸 어떻게 해보려 하는 순간 잘 안 되더라고요. 가진 걸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요. 결국엔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다는 거예요. 가장 어렵지만, 그게 가장 좋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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