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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아서: 작가 정세랑

영화 한 편, 소설 한 권은 벽돌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쌓이며 성을 이룬다. 작가의 세계는 그렇다. 때로는 인상적인 작품이 성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벽돌의 배치에 따라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는 작가와 함께 그의 성을 투어하며, 작품의 토대가 된 벽돌들을 하나씩 뽑아 들었다. 지금 각 분야에서 가장 유별난, 돋보이는 작가들의 영감 지도다.

UpdatedOn September 11, 2020

작가 정세랑

 작가 정세랑 

지금, 가장 과감하고 가장 대중적인 작가.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동시대 젊은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자신의 소설이 원작인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 각본과 SM 제작 케이팝 드라마 <일루미네이션> 각본을 맡으며 매체마저 넘나드는 중이다. 디즈니랜드처럼 화려한 그의 취향 서랍장을 열었다.

3 / 10

 

R.R. 톨킨의 <호빗>

어린 시절, 어린이전집에서 보고 완전히 매혹된 작품. 책 속에 그렇게까지 커다란 세계가 들어있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신화, 역사, 민담, 언어에 조예가 깊은 작가가 언어까지 창조하며 광대하고 복잡한 세계관을 펼쳐낸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호빗>은 20세기 전쟁들을 떠올리게 했고, 선과 악이 이분법이 아닌 다면적인 접근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 작품의 영향으로 인물이 많은 이야기를 좋아하게 됐다. 50명의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피프티 피플>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넷플릭스 <나르코스>

마약을 둘러싼 복잡한 인간군상의 선과 악의 미묘한 경계를 보는 것이 즐거워 끝까지 완주했다. 인물이 많고, 호흡이 긴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영도 작가 <시하와 칸타의 장>

얼만큼 언어를 사랑하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말들이 힘을 가진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수수께끼 같고, 암호처럼 정교하다. 상징과 언어를 깊게 파고드는 작품에 늘 끌린다. 이영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지만 그의 본래 스타일이 있으면서도 변주된 이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발터 뫼어스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있을 법한 출판 도시를 말한 다음, 주인공으로 공룡을 내세우고, 지하에 내려가면 깨무는 책들을 등장시킨다. 황당한 전개에도 독자를 감쪽같이 끌고 가서 눈앞에 그것들이 진짜 있을 것만 같다. 발터 뫼어스는 그래픽 노블도 그리고, 애니메이션 감독도 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소스를 쓰는 전천후 작가다. 가장 제약 없는 작품들을 쓰는, 고유의 색깔을 가진 작가들을 보면 한층 성큼성큼 걷고 싶어진다.

클램프의 <마법기사 레이어스>

평범한 여자애들이 거대한 로봇을 움직이는 게 근사했다. 사실 무시무시한 반전이 있는 무거운 이야기인데도 빨강, 파랑, 초록, 아름다운 색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그려내서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생겼다. 작품은 예뻐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웨스 앤더슨 <문라이즈 킹덤>

빈티지한 파스텔톤 색감에 동화적인 웨스 앤더슨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건 <문라이즈 킹덤>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이해 받지 못하던 문제아와 외톨이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애틋한 이야기. 무거운 주제를 어렵게 전화면 소화가 잘 안 된다. 웨스 앤더슨처럼 쓴 약을 달게, 당의정처럼 코팅하는 창작자들을 좋아한다. 나도 작품을 쓸 때 그런 코팅을 선호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릴로와 스티치>

디즈니와 함께 자랐다. 보면서 가장 많이 운 작품은 <릴로와 스티치>. 디즈니 만화 주인공 중 가장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 든 캐릭터다. 가난한 자매와 말썽꾸러기 외계인이 서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부분이 애틋하다.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바라게 된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해피엔딩을 바라게 되었다. 인류애와 낙관의 시선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야기가 사람들을 더 다정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믿는다. 시대의 주류적인 아이디어들이 점점 더 진보한다는 것도 믿고.

디즈니랜드

단순히 놀이기구가 있는 놀이공원이 아니다. “이 세계로 들어와라”라고 말하는 듯한 곳. 디즈니 세계관 속에 일관된 이야기가 연결되는, 디테일 하나하나가 엄청난 공간이라 어릴 적 마음을 빼앗겼다. 가게에만 들어가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매드헌터의 모자가게가 있고, 애니메이션 등장 인물로 분장한 직원들은 역할에 한껏 몰입해있다. 허술한 부분이 없다. 콘센트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어른이 되어 다시 가보아도 마찬가지더라. 깊이 영향 받은 공간이라, 내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과 <목소리를 드릴게요>에도 놀이공원이 두 차례 등장한다.

아헨 루트비히 포럼

어느 도시에 가든 꼭 그곳의 현대미술관을 방문한다. 디즈니랜드의 다양한 어트랙션을 타듯 동시대의 작품을 보는 게 즐겁다. 독일 아헨은 정말 작은 소도시인데, 현대 작가들의 좋은 콜렉션들을 지니고 있더라. 청주 시립 현대 미술관을 갔을 때도 재미있는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지역에 미술관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멀드 와인

어릴 때 <캐드펠 수사 시리즈>를 읽고 허브를 넣고 끓인 멀드 와인(뱅쇼) 맛을 무척 궁금해했었는데 이제 겨울이면 부지런히 사먹거나 직접 끓여먹는 어른이 되었다. 궁금했던 맛을 확인하고 즐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고민이 있는 날이면 따뜻한 와인을 마시며 책 속 캐드펠 수사의 현명함을 빌리곤 한다.

게임 <창세기전3>

문학과 역사 속 인물의 이름들을 지닌 주인공들, 김진 만화가 그린 화려한 작화, 원대한 세계관 모든 것이 좋았다. 환상문학, 애니메이션, 게임을 좋아하는 어릴 적 취향은 나를 속절없이 판타지 작가로 이끌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가 현실 세계의 비유가 되는 게 좋다. 확대된 부분과 축소된 부분이 살짝 다른 거울 같아서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게임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자유로워지기 위해 당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게임. 스토리가 강한 인터랙티브 영화에 가깝다. 서로 상충하고 교차하는 선택이 이끌어내는 여러 엔딩이 매력적인 이야기다. 나 역시 창작자로서 결론이 하나로 지어지는 이야기보다 여러 결론이 있는 창작물을 써보고 싶다. 작가로서 책을 제일 좋아하지만 영상이나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 매체에도 호기심이 많다.

미야베 미유키 <미시마야 변조괴담>

이 시리즈의 신간이 나오면 밤새워 읽는다. 미야베 미유키는 구전되는 괴담을 현대 독자들에게도 어필되도록 문학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괴담 문학이라는 장르로 밀어붙인다.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정서를 많이 실어서, 괴담임에도 인물들이 이웃집 사람처럼 느껴지고, 그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든다는 게 흥미롭다.

고전 호러 무비

어릴 적 막내 삼촌이 틀어준 <사탄의 인형>, <오멘> 같은 클래식한 공포영화를 좋아했다. 공포영화 특유의 스트레스를 확 받게 한 후 확 풀어주는 게 좋다. 아드레날린이 확 치솟는다. 최근엔 <검은 사제들> 같은 한국형 오컬트 영화도 좋아한다. 명동의 가장 어두운 면을 그려내는 영화다. 한국 특유의 풍경 속에서 벌어지는 오컬트 사건들이 재미있다.

눈사람

겨울밤, 퇴근한 엄마가 아주 작고 귀여운 눈사람을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주었다. 그 눈사람에게 가졌던 애정과 젊은 엄마의 얼굴, 안경에 서렸던 김에 대해서 기분 좋게 추억하고 있다. 이렇게 별 것 아닌 작은 기쁨이 사람을 오래 지탱한다고 생각하고, 소설 속에서 친밀감에 대해 자주 쓴다. <시선으로부터,>는 그런 기억들을 만들어준 엄마에 대한 마음으로 썼던 소설이다.

비누

영원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애정이 있다. 눈을 돌리면 사라지는 것들. 잠시 피는 꽃, 아껴 쓰는 향초, 조각을 모아 만든 비누 같은 것을 좋아한다. 흔적이 남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한아조라는 브랜드의 비누가 알록달록 예쁘고 거품도 잘 나서 좋아하는데, 요즘 민음사에서 <보건교사 안은영> 사은품으로 주고 있더라. 내가 좋아하는 건 다른 사람들도 좋아하는구나.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오션 클리너

스노클링하는 걸 좋아한다. 아주 깊은 물엔 겁이 많아 못 들어가지만, 바다라는 아름답고 무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어 좋다. 스노클링을 하며 해양생태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요즘도 얕은 물에서 수영하며 비닐과 플라스틱을 건져서 나오곤 한다. 태평양 한 가운데 쓰레기섬을 청소하는 기술을 개발 중인 오션 클리너라는 벤처회사를 팔로하며 응원 중이다. 산호가 무너지면 물고기가 없어진다. 이 다양성이 하나만 무너져도 다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하다.

<잠금해제> 캠페인

얼마 전 씨셰퍼드 코리아와 함께 참여한 캠페인이다. 잠금해제 캠페인을 검색하면 돌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수리부엉이

야생 수리부엉이를 우연히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눈이 마주쳤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거리였다. 머리는 내 머리만 했고, 펼친 날개도 대단했다.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신화 속 존재 같더라. 원래도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았지만, 더 자주 기후위기와 멸종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게 되었다. 이런 경이로운 동물들이 지구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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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이예지
GUEST EDITOR 정소진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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