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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아서: 뮤지션 루피

영화 한 편, 소설 한 권은 벽돌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쌓이며 성을 이룬다. 작가의 세계는 그렇다. 때로는 인상적인 작품이 성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벽돌의 배치에 따라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는 작가와 함께 그의 성을 투어하며, 작품의 토대가 된 벽돌들을 하나씩 뽑아 들었다. 지금 각 분야에서 가장 유별난, 돋보이는 작가들의 영감 지도다.

UpdatedOn September 10, 2020

뮤지션 루피

 뮤지션 루피 

“루피는 루피다”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불가한 힙합신의 독보적인 캐릭터, LA에서 날아온 메킷레인의 수장. 힙합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뮤지션 루피의 번뜩이고 번쩍이는 우주적 영감 리스트.

3 / 10

 

타블로 ‘알고 보니’

어릴 적, 루피가 되기 전 이진용은 타블로 형의 가사를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건 ‘집’과 ‘알고 보니’라는 노래다. 인생을 알기도 전, 16마디 벌스 하나로 많은 걸 깨우쳤다. ‘약속은 새끼손가락만큼 쉽게 꺾인다’, ‘삶의 끝은 홀로 남은 병실’.

릴 웨인

롤 모델은 릴 웨인이었다. 힙합 하면 두껍고 마초적인 음색의 래퍼만을 생각했는데, 릴 웨인이 그 편견을 깼다. 특히 릴 웨인의 등장이 혁신적이었던 것은, 힙합이 미국의 억압된 흑인 역사를 무겁게 노래하던 시절, 직관적인 멋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릴 웨인은 ‘블링블링’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 화려한 악세서리, 시계, 그릴을 끼고 나와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 것이다.

전기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나, 자전적 영화를 통해 다른 아티스트의 삶을 보는 걸 좋아한다. ‘비슷한 일이 내게도 있었어’라는 기분이 들면 덜 외롭다. 나의 삶을 4등분해서 1구역은 A로, 2구역은 B로 산다고 했을 때, 누군가의 삶엔 그 영역이 겹치기도 없기도 하겠지. 나도 내 방식이 맞는지 흔들릴 때가 있잖아. 그럴 때 다른 아티스트들의 삶을 보면 4개 중 3개 정도는 비슷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128등분을 한다 해도, 어떤 조각들이 닮아있다는 걸 느끼면 “괜찮다”고 위로 받게 된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행위예술가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중에 강렬했던 것이 있다. 이별마저 하나의 퍼포먼스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각자 따로따로 만리장성의 양 끝에서 출발해 서로를 향해간다. 그렇게 마주치고, 그대로 이별한다. 자신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 행위예술에 한창 탐닉했었다. 나는 그 정도의 예술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뱅크시

뱅크시는 도망 다니는 게 좋다. 그림보다 그의 삶의 방식이 멋있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잖아. 정체를 감추고 도망 다니는 예술가라는 건 사실 클리셰인데, 그걸 영화가 아니라 진짜 삶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Bonnie avenue Pasadena CA, 91106

캘리포니아는 내가 힙합을 시작하게 된 도시이자, 영감의 근원이다. 그곳의 날씨와 여유로운 무드, 다양성을 인정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나로 하여금 힙합을 하게 만들었다. 캘리를 생각하면 내가 살던 골목이 먼저 떠오른다. 야자수가 늘어선 도로, 스트리트 파킹이 된 주택들. 서울에서는 내가 웃통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 물을 튀기며 세차를 할 순 없잖아. 썩 좋은 집에 살진 않았지만, 캘리에선 그게 가능했다. 자기 집 앞에서 세차를 하다가 달려 나온 강아지와 노는, 그것이 내가 지금 떠올리는 캘리의 가장 그리운 모습이다.

켄드릭 라마

캘리포니아 출신 뮤지션. 미국 합합에선 지역적인 유대감이 대단하다. 캘리에선 투팍 이후 캘리를 대표할 만한 이렇다 할 뮤지션이 없었다. 제이지, 칸예, 드레이크의 등장으로 한동안 남부나 동부에 뺏겨있었지. 그런데 조용하던 캘리에 켄드릭 라마가 나타난 거다. 그는 LA에서 찍은 영화 한 편을 보여주듯, 생생한 음악을 한다.

‘The Art Of Peer Pressure’

켄드릭 라마의 곡 중 제일 좋아하는 곡. peer pressure는 친구들끼리 주는 부담감이란 뜻이다. 술을 못하는데 친구가 “야, 한잔 해” 한다 치자. 그러면 “No peer pressure”라 답하면 된다. 친구끼리 부담주지 말자는 이야기. 켄드릭 라마가 유명한 게 친구들이 죄다 갱단에 있는데도 대마초를 절대 흡연하지 않는다는 거다. 이 노래는 싸고 튼튼한 토요타를 타고 집을 털다가 경찰에게 쫓기는 이야기다. 노래 속 등장하는 405번 프리웨이를 달리면 내가 이 곳에 있는 것이 신나고 즐거웠다.

Chill

난 뉴욕이나 서울 같은 도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조용하고 사람 없는 곳이 좋다. 내가 야행성이 된 것은 밤에는 마주쳐야 되는 영혼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가 좋았던 중 하나는, 내 차의 헤드라이트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는 것. 가장 좋아한 곳은 팔로스 버디스인데, 축구를 할 수 있는 잔디운동장이 있고, 옆 해변엔 서퍼들이 물개와 함께 헤엄친다. 밤이면 운전해서 이곳으로 와 바다를 보고, 별을 보고, 상쾌한 공기를 마셨다.

파랑

파란색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ICE’ 같은 무드의 우울감, 밤, 차분함, 고요함. 이번 앨범에서는 ‘NO FEAR'가 메탈릭 블루에 가깝다. 하지만 푸른 노래는 잘 안 팔리는 것 같다. 하하.

루이비통 애프터눈 스윔

작업공간에서 향기가 나는 게 좋다. 향수를 잔뜩 뿌려놓고 들어가서 일을 한다. 요즘 많이 쓰는 건 루이비통 ‘애프터눈 스윔’이다. 베르가못과 오렌지 향기가 달콤하게 퍼진다.

킴 존스

나는 스트릿웨어를 입었을 때 나답고 행동거지가 편안해서 좋은데, 그게 디자이너 브랜드였으면 좋겠다. 그게 루이비통이어서 사는 게 아니라 하필 이 옷이 있는 곳이 루이비통 밖에 없다. 그래서 사게 되는 게 좋다. 킴 존스가 그런 걸 루이비통에서 잘했다. 디올 맨 디렉터로 간 그가 또 어떤 룩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에디트 피아프

파리의 뮤지션들에 꽂혀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듣고, Bon Entendeur라는 뮤지션이 옛날 샹송을 재해석해서 낸 앨범을 듣는다. 이들의 공통점은 런웨이에 틀어도 이질감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패션’이라는 단어를 한국어로 치환하기 어렵다고 느끼는데(세련됨의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이런 파리 뮤지션들의 ‘패션’감이 갖고 싶다. 캘리포니아에 가서 살면서 그곳의 그루브를 익혔듯, 파리에 가서 살면 그게 나올까?

샤넬 1997 S/S 런웨이 쇼

작업할 때 샤넬의 1997년 S/S 런웨이 쇼를 틀어놓고 지금 내가 만드는 음악이 여기에 묻는지 본다. 옛날 패션쇼를 많이 보는데, 예전 걸 보는 이유는 시간과 역사가 묻어 나왔으면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가장 최신의 것을 찾는데, 가장 앞선 걸 따라가는 얇은 것보단 두껍고 단단한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왔던 것들은 다 과거의 것들이잖아. 시간이 흘러온, 때가 묻어있는, 그런 두터운 걸 만들고 싶어졌다.

릴 스눕

진짜 랩을 잘하는 래퍼인데, 카드놀이 하다가 이백 불 때문에 총 맞아 죽었다. 16살에. 살아있었다면 굉장한 뮤지션이 돼있을 텐데. 어쨌든 요즘 한국 힙합은 듣지 않는다. 요즘 래퍼들은 랩을 잘 안 하거든.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랩도 음악이어야 한다는 신조로 멜로디로 승화하기도 했지만, 요즘엔 모두가 싱잉랩을 해버리니 재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난 오히려 이걸 버리고 싶어졌다. “이거 알아? 요새 핫한 거?” 나는 몰라야 된다. 최대한 집에만 있는다.

우주

우주는 과학자들에게 있어 한 종류의 예술이다. 최근 김상욱 물리학자가 한 말이 내 인생의 궁금증 하나를 풀어주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살아있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아직까지 밝혀진 바로는 지구라는 곳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다. 죽어있는 게 정상적이고 살아있는 게 비정상적인 상태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있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살아있는 비정상의 상태를 잠시 체험한 뒤 다시 죽음이라는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간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죽음

죽음 이후의 삶이 있는가? 우주가 존재하는 한 원자는 계속해서 존재할 거고, 우리가 죽으면 어떤 형태를 이루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원자는 내가 좋아하는 나무가 될 수도, 별이 될 수도 있다. 우린 어떤 형식으로든 우주와 계속 함께 할 거다. 음, 하지만 우주에 가고 싶진 않다.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거든.

일론 머스크

“인간은 내일이 기대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후손에게 지구를 벗어나 살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과, 나갈 수 없다고 말해주는 것은 인류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지는 일일 것이라고.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일어나야지’ 하게끔 만드는 힘이 중요하다는 거다. 과학기술은 계속해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멈춰 있지 않고 퇴보한다고 한다.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이 우주산업을 경쟁했던 시대보다 지금의 기술이 퇴보해있다더라. 일론 머스크는 우주산업이 블루오션이니 한 밑천 땡기자는 게 아니라, 나라도 해야 인류가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비전을 그리는 거다. 그것이 멋지다.

AI

최근 트레비스 스캇이 AI 프로듀서가 만든 노래를 했다. 나쁘진 않은데 좋지도 않다. 뮤지션이란 직업이 아직까지 괜찮을 수 있겠다 생각했지. 200년 전 프랑스 사람들이 상상했던 미래의 그림을 보면, 날개를 단 우체부가 편지를 줬다더라. 마찬가지로 우리는 휴머노이드가 나와야지만 로봇의 시대가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상용화된 인공지능 스피커 구글 네스트도 이미 로봇이다. 벌써 우리의 삶에 침투해있는데, 사람의 모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감을 못하는 것일 뿐. ‘NEO SEOUL LOVE’도 AI가 인간의 감정을 따라 해 노래하는 이야기인데, 내 관심사는 AI가 아니라 인간이다. AI가 우리의 삶에 침투했을 때, 인간이 어떤 이야기를 할까에 관심이 있다.

디스토피아와 우울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난 행복한 사람 옆에서 행복하게 맞장구 쳐주는 게 어렵다. 겉으론 어떨지 모르겠는데 속으론 오작동하고 있다. 난 디스토피아와 거기에 놓여진 마음들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게 더 편한 사람이다. 남이 힘든 걸 보는 걸 좋아한다는 건 아닌데, 그게 더 익숙하다. 내 음악을 듣고 우울을 흘려 보냈다는 사람들의 말을 유독 많이 들어 진위를 의심했던 적도 있는데, 최근 누군가가 ‘goyard’를 듣고 마음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전해 조금은 믿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게도 위로가 되는 일이다.

뭉크의 ‘The Sick Child’

뭉크가 어린 시절 병으로 죽은 누나를 그린 그림이다. 슬픈 건 뭉크가 이 그림을 계속해서 몇 십 점을 그렸다는 거다. 병실에 누운 누나를 본 그 장면이 뇌리에 박힌 거지. 내게도 그렇게 뇌리에 박힌 작품이 있다. ‘WHY’라는 곡이다. 스물 한 살에 만나 스물 여섯 살에 헤어진 첫사랑이 있다. 5년 간 그 친구에게 온통 몰두했다. 그와 헤어지니 모든 것이 흔들리더라. 무얼 쫓아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몰랐다. 한국에 와서 루피가 되어 ‘WHY’를 썼다. 이 노래를 들려줌으로써 하나의 이야기를 끝내고 싶었다. 콘서트 세트리스트에 올리고, 초대했지만 오지 않았다. 두 번째 콘서트에도 오지 않았다. 그 친구의 결혼식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가 됐다. 그런데 어제 삼성동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는데 마주쳤다. 7초 정도 보고 있다가 안 되겠다 해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나갔다. 그는 날 오래도록 곡을 쓰게 만든 오랜 뮤즈였다. 나는 뭉크가 어떤 감정으로 이 작품에 사로잡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그림의 슬픔과 서글픔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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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이예지
GUEST EDITOR 정소진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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