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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찾아서: 시인 김승일

영화 한 편, 소설 한 권은 벽돌 하나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쌓이며 성을 이룬다. 작가의 세계는 그렇다. 때로는 인상적인 작품이 성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고, 벽돌의 배치에 따라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는 작가와 함께 그의 성을 투어하며, 작품의 토대가 된 벽돌들을 하나씩 뽑아 들었다. 지금 각 분야에서 가장 유별난, 돋보이는 작가들의 영감 지도다.

UpdatedOn September 07, 2020

시인 김승일

 시인 김승일 

어딘가 좀 이상하다. 이게 맞나 싶다. 그런데 그의 읊조리는 듯한 시를 읽기 시작하면, 공간을 뛰어넘듯 단숨에 다른 곳에 도착해있다. 시집 <에듀케이션>과 <여기까지 인용하세요>로 대체할 수 없는 개성과 캐릭터를 보여준, 이상한 시인의 기이한 수집 목록.

3 / 10

 

베르너 헤르초크

헤어조크는 ‘메타’ 영화를 만드는 광인으로, 그의 다큐엔 곰에 집착하는 기이한 환경운동가(<그리즐리 맨>)나 오랜 시간 막역한 애증을 나누며 서로 총부리까지 겨눈 다혈질 배우(<나의 친애하는 적 클라우스 킨스키>) 등의 광인들이 등장한다. 정글에서 헤어조크와 촬영할 때는 “이 딴 데서 어떻게 자냐”고 호통을 치다 패션지에서 인터뷰를 왔더니 우거진 나무에서 포즈를 취하며 “자연은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하는 등 이상한 장면의 연속이다. 헤어조크는 광인들을 놀리는데 실은 자신이 내리는 판단도 썩 이성적이지 않다. 그 모든 게 메타적이라 좋다.

<타이거 킹>

헤어조크라면 조 이그조틱에게 관심을 가졌을 것 같고, 이런 다큐멘터리를 찍었을 것 같은데, 난 <타이거 킹>을 좋게 보지 않았다. 헤어조크는 매체를 탐구하는 예술의 입장을 지니는데, <타이거킹>에선 그런 입장이 없으니 이 사람 편도 들었다가, 저 사람 편도 들었다가, 동정을 해선 안 되는 점까지 껴안아버리면서 조 이그조틱을 연민하게 만들잖아. 헤어조크라면 동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은 동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메타(Meta-)

난 항상 누가 어떤 영화를 찍었느냐 보다, 어떻게 찍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인터뷰를 보는 걸 좋아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인터뷰처럼. 영화에 대한 영화, 시에 대한 시, 비평에 대한 비평, ‘메타’적인 것. 메타는 할 말을 다 해서 더는 할 말이 없을 때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다가 멈추고 나와서 잠을 잔다. 그리고 다시 들어가면 새 시 같다. 시 한 편에 여러 시가 겹치는 형식 실험을 하게 된다. 내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엔 메타 시가 많다. 헤어조크에게 많은 빚을 졌고, 헤어조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내 시 속 ‘다큐멘터리 감독’이나 ‘영화 감독’은 다 헤어조크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헤어조크에게 헌정하는 시다. 헤어조크는 잘난 척하며 자신은 카메라처럼 객관성을 지닌 척 하지만, 모든 시선엔 화자의 주관이 섞여있지 않나? 판단하는 사람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유튜버 빠니 보틀

헤어조크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유튜버를 했을 것이다. 빠니보틀은 여행 유튜버다. 고생해서 여행을 한다. 유명해져도 계속 돈 없이 힘들고 어렵게 여행을 한다. 고생에 어떤 의미를 두거나 찬미를 하거나 희생이나 순례처럼 포장하지도 않고 그냥 고생을 한다. 고생은 아주 비논리적이고 무용하며 비효율적인 무언가이고, 나도 그 무언가에 대해 쓰려고 한다.

시인의 유튜브

요즘 문학계에서 유료 메일링 서비스를 많이 하는데, 나는 그걸 하지 않을 거다. 문학의 미래는 얼마나 넓게 배포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난 다다음주에 유튜브를 개설할 거다. 한 가지 콘텐츠는 구독자나 친구에게 즉흥적으로 시를 써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아서, 그 자리에서 바로 말로 시를 쓰는 거다. 이렇게 말로 쓴 시를 시집 지면에 실을 거다. 두 번째는, 정치인부터 아이돌까지 여러 분야의 인물들에게 시집을 보내고 나를 인터뷰해달라고 할 거다.

고생

코로나가 터지기 전 파리에 다녀왔는데, 모스크바에서 환승하다가 비행기를 놓쳐 이십 시간 정도 대기했다. 죽는 줄 알았다. 어릴 때 인도 여행, 오지 여행, 국내 국토 횡단 같은 고생 여행을 하다 처음으로 유럽에 쉬러 갔는데 똑같이 고생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이가 들었다고 너무 편하려고 했나? 이 여행 후 ‘나는 모스크바에서 바뀌었다’라는 시를 썼다.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안 하려는 나의 태도에 대하여. 헤어조크가 정글에 오페라를 지으려 하거나 그리즐리 맨이 곰과 함께 살려고 하는 쓸데 없는 고생을 생각해보면, 도움이 안 되는 일이 오히려 항상 재미있는 일이다. 예술의 무용성은 한 물 지나간 이슈다. 하지만 어떤 담론에서도 무용함을 견디지 못하면 유용함의 단계로 넘어갈 수 없다.

지하철 4호선

과천에 살아서 4호선을 많이 탔다. 지하철에서는 할 일이 없으므로 생각을 많이 한다. 책을 읽고 싶으면 종점에서 타서 책을 읽으며 다시 종점으로 돌아왔다. 2호선은 순환선이라 싫었다. 종점에서 잠든 사람을 깨우는 재미가 없잖아.

만년필과 워드프로세서

이 시대에 단 하나만의 기능을 가진 것은 실용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이 좋아서 만년필을 모은다. 테드 휴즈가 쓰는 워터맨 만년필을 따라 사서 써본다. 지금은 고가의 워드프로세서인 프리라이트라는 e잉크 패널 타자기를 갖고 싶다. 키보드와 잉크패널만이 있고 화살표가 없어서 편집할 때도 백스페이스로 일일이 지워야 하는 불편한 물건인데, 이런 멍청하고 터무니 없는 게 아직도 세상에 있다는 게 재미있다.

게임 공략집

어릴 때 게임을 하지 않고 공략집을 읽으며 게임을 상상하는 걸 좋아했다. <토르네코의 대모험>이라는 정태룡 기자가 쓴 게임공략집이 재미있었다. 공략집은 어떤 사람이 공략을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그 재미가 달려있다. 요즘엔 게임 유튜버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나는 시집 <이별의 능력>을 읽으며 시작법의 기초를 배웠고, 게임 공략집을 읽으며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위한 계획 정도만 쓴 다음, 그걸 시라고 우겨도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을 배웠다. 배웠다고 쓰니까 좀 싫은데, 그냥 영향을 많이 받았고,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

김행숙 <이별의 능력>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한다. 그런 시집은 많지만, 이 시집의 화자는 사랑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알기 위한 발버둥이 아니라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쿨하고 멋져서 동경했다. 처음 이 시집을 어떤 마음으로 읽었는지 헤아려보면, 화자가 사랑을 예찬하지 않고, “나는 무대를 만들어서 사랑을 상영할 수 있어” 그런 태도가 좋았다.

테드 창

나는 SF소설의 진행 속도를 좋아한다. 빠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해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부분 생략이 필요하고, 과학과 기술보다 인식과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게 이 장르다. 테드 창의 작품은 묘사가 별로 없다. 문장도 짧고, 시간의 흐름도 소설 상에서 굉장히 빠르다. 10년 정도는 3장 안에 해치울 정도다. 그 속도감이 종종 시처럼 느껴진다. 내 시는 빠른 진행 속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테드 창을 읽으면서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속도

어릴 때 달리기를 좋아했다. 어디든 빨리 가고 싶었다. 실제로 400m 달리기 선수이기도 했다. 난 금방 딴 생각을 하고 말도 빠르게 한다. 사주를 봤는데 나더러 소설을 쓰지 말라더라. 하다 보면 인내심이 바닥나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싶어 질 거고, 앞과 뒤가 완전히 달라지는 이야기를 쓸 거라고. 시가 왜 빠르냐고? 이제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말 안 해도 사람들이 다 안다. 내 시는 묘사가 없고 생략이 많고 여러 형식을 겹치는 실험으로 이어진다.

비디오 게임

게임은 이미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는 예술이고, 다른 매체에서 이룬 것을 보완해 자기 것을 만들었다. 비디오 게임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하는 체험이다. 게임의 세계는 앞으로 더 무궁무진하다. 이 세계엔 선택지가 있고, 여기서 내리는 선택은 다른 예술보다 더 큰 책임감을 요구한다. 문학은 서사에 몰입하는 정도로 체험할 수 있는데, 게임은 그 서사와 룰 속에서 유저가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며 서사를 이끌어나간다. 책임 지는 걸 싫어하는 시대에 책임을 지게 하는 예술이다.

게임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

게임하고 운 건 처음이다. 희망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려는 디스토피아물인데, 플레이어를 매우 괴롭혀서 엄청난 비판을 받는다. 1편에서 중요한 인물을 2편에서 죽이는데, 심지어 그 인물을 살해한 캐릭터로 한동안 플레이시키는 악취미적 구간이 있다. 팬을 괴롭히려고 만든 게임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이 세계관 안에 있으면 그 괴로움과 고통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보다 잘할 수 있을까 싶어 좌절감을 주는 게임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런 게임을 만드는 데는 돈이 아주 많이 들고, 나는 좌절감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좌절

부정변증법을 좋아한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어디가 문학이 좌절되는 지점인지, 그걸 알아야 다른 방식으로도 가볼 수 있다. 나는 한계를 좋아하고, 그걸 육체로 체험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헤어조크로 돌아가면,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기네스북의 종류가 더는 늘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 시대는 우리가 더 이상 이 세계에서 할 일도, 새로운 일도 없을 것 같은 세계다. 남은 일은 검열과 정치적으로 올바른 행동만을 찾게 되는 게 아닐까 싶은. 이제 예술은 새로운 좌절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한번도 맛본 적 없는 새로운 좌절을 맛 봐야 한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언제나 불가해한 자연에게 반발심을 느낀다. 자연은 이해가 안 되는 것인데, 과거엔 많은 시인들이 그걸 이해하는 척하면서 시를 써왔다. 현대 시인들은 자연에 대해 몰이해로 시작한다는 것이 여태까지와는 달라진 점이다. 지금의 시의 화자들은 많은 걸 모른다. 예전에는 다 안다고 하더니. 자의식 과잉을 검열하느라 결국 아는 게 없어진 화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천편일률적으로만 가고, 피하다 보니 결국 할 이야기가 남지 않는다. 내 시의 화자는 항상 결정을 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 오늘은 이걸 안다고 말해야 한다. 아무 것도 모르겠다고 해서 아무것도 결정하는 화자는 등장시키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결정하고, 책임지려 하고, 오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 그런 태도를 지닌 시를 쓰려 한다.

‘토니 로마스’의 벽돌 양파 튀김

정확한 명칭은 ‘브릭 어니언 프라이’였다. 한국에서 철수해서 이제 먹을 수 없다. 비슷한 레시피를계속 검색해보지만, 그것과 같은 것은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점이 좋다. 부모님이 좀 살았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자주 토니로마스에 갔다. ‘왜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린이날 선물을 받지 못하는가?’라는 내 시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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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EDITOR 조진혁, 이예지
GUEST EDITOR 정소진

2020년 0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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