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찬이 분데스리가 신흥 강호 RB 라이프치히로 이적했다. 한국인 스트라이커가 빅리그에, 그것도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의 강팀으로 이적한 적이 있던가? 아직 완벽히 주전을 꿰찬 건 아니지만 높은 이적료와 등번호 11번을 부여받은 점에 팬들의 기대가 높다. 황희찬은 황선홍, 안정환, 박주영의 계보를 이을 수 있을지 그리고 RB 라이프치히에서 필요한 무기와 수행할 전술적 역할은 무엇일까.
“축구는 22명이 공을 쫓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 잉글랜드 축구 영웅 게리 리네커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인 서독전에서 패한 뒤 남긴 말은 이제 명제가 됐다. 독일은 강하다. 지금처럼 유려한 축구를 할 때는 물론이고 ‘녹슨 전차’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때도 항상 우승컵 근처에 머물렀다.
만약 리네커가 일본 사람이었다면 “패스는 일본이 하고 골과 승리는 한국이 가져가는 경기가 축구다”라고 말했을 거다. 일본은 축구에 엄청난 투자를 하며 ‘탈아입구’를 실현하려고 했다. 세계가 인정하는 자신들만의 패스 축구도 구축했다. 하지만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국만 만나면 공만 돌리다 패한다.
역대 한일전 전적은 42승 23무 14패로 한국이 압도적으로 앞선다. 일본은 한국 축구가 상대적으로 투박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축구 전문가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축구는 골을 넣어야 이기는 경기”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과정보다 결과를 내는 축구를 했고, 그 중심에는 강력한 결정력을 가진 스트라이커가 존재했다. 조금 과장하면 일본은 황선홍, 안정환, 박주영 같은 한국의 최전방 공격수들을 경외했다. 한국은 아름다운 축구는 구사하지 못해도 앞서 언급한 거물급 스트라이커를 계속 배출했다. 하지만 근래에는 이렇다 할 에이스가 없었다. 손흥민은 세계적인 득점 감각을 지녔으나 측면 공격수에 더 가깝고, 김신욱은 아시아에서는 높이 날았지만 세계에 매운맛을 알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던 와중 어린 송아지가 붉은 황소로 거듭나 거물급 스트라이커 반열에 오르려는 모습이 포착됐다. 1996년생인 황희찬은 7월 초에 오스트리아 리그 레드불 잘츠부르크를 떠나 독일 분데스리가 신흥 강호 RB 라이프치히로 이적했다. 계약 기간은 5년. 황희찬은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측면에서 뛰었으나 잘츠부르크에서는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RB 라이프치히의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은 첼시로 떠난 공격수 티모 베르너의 대체자로 황희찬을 선택했다. 황희찬의 대표팀 활약만 본 이들은 의아할 수도 있다. 과거 황희찬은 힘과 스피드를 지녔으나 정교함과 득점력이 떨어져 손흥민과 황의조처럼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지난해 10월 3일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디펜딩 챔피언 리버풀을 상대로 넣은 골이 그 증거. 0-3으로 지고 있던 전반 39분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패스를 받아 속임수를 써서 왼발로 피르힐 판 데이크를 쓰러뜨린 뒤 골을 터뜨렸다. 누구도 넘지 못했던 세계적 수비수인 판 데이크를 넘어선 폭발력에 전 세계가 놀랐다. 황희찬은 그날 측면으로 빠져서 크로스로 도움도 기록했다. 황희찬과 미나미노 다쿠미가 골을 합작하자 위르겐 클로프 리버풀 감독은 ‘이 어린 녀석들 보게’라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주목할 만한 성장세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단 나겔스만이 구사하는 축구를 빨아들이고 주전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베르너의 등번호를 받았다고 그의 자리에서 뛸 자격을 받은 건 아니다. 나겔스만이 이끄는 RB 라이프치히는 스리백과 포백 전술을 혼용하는데 최전방에는 주로 2명의 공격수를 둔다. 높은 점유율(54.1%, 리그 4위)을 바탕으로 상대 수비수 사이로 침투 패스를 계속 넣으며 슈팅을 양산(평균 16.2개, 리그 2위)한다.
그렇기에 2명의 공격수는 중앙과 좌우를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다 수비수 사이 틈을 파고들어 도움과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신장이 180cm인 공격수 베르너는 나겔스만이 바라는 걸 모두 해냈다. 지난 시즌 리그에서 33경기에 출전해 28골과 도움 8개를 기록했다. 경기당 슈팅 3.6개, 키패스 1.6개, 드리블 1.7회를 성공했다. 베르너는 193cm의 장신 스트라이커 유수프 포울센과 함께 뛰며 주로 침투와 마무리를 맡았다. 포울센이 수비수들과 경합하면 폭발적인 스피드로 그 틈을 파고들어 골문을 갈랐다.
황희찬은 베르너와 체구가 비슷하다. 엄청난 에너지와 속도 그리고 넓은 활동 반경은 베르너를 대체하기에 충분하다. 관건은 전술 이해 능력과 정교함이다. 황희찬이 예전보다 세밀해진 건 사실이지만 분데스리가처럼 수준 높은 무대에서는 더욱 침착하고 오차 없는 결정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겔스만 감독은 8~9가지 포메이션을 쓰며 선수들에게 많은 걸 요구한다. ‘수습 기간’에는 가능성을 끌어내려고 하겠지만 이후에는 가차 없는 평가를 할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골을 넣지 못하면 출전 기회와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베르너는 팀 득점의 34.5%를 책임졌다. 황희찬은 적어도 득점의 20% 정도는 기여해야 계속해서 최전방 스트라이커 자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공격수의 역할만 수행해서도 안 된다. 나겔스만은 공격수가 필드의 반쪽에만 머무는 걸 바라지 않는다. RB 라이프치히는 상대방 진영에서 주로 뛰노는 팀이다. 많은 선수가 높은 지역에 있기에 공을 빼앗겼을 때는 위험하다. 실점 양상을 보면 역습당해 내준 골이 10%에 달할 정도다. 유럽 상위권 팀들은 모든 공격수에게 ‘최전방 수비수’ 역할을 요구하지만, 나겔스만은 더 적극적인 역할을 바랄 게 분명하다. 아마도 지시는 이런 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뛸 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공을 빼앗기면 이런 지시를 했다고 밝힌 바 있다. “파울을 해서라도 끊어라.” 레드불 잘츠부르크에서 RB 라이프치히로 가는 길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 있었다.
황희찬은 많은 기대와 거액을 받고 분데스리가로 간다. 홀로 포항에서 잘츠부르크로 날아가 증명했던 것처럼 라이프치히에서도 능력을 보여야 한다. 정상급 감독과 동료는 더 많은 걸 바라기 마련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면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잊힌다. 아직 겁먹을 건 없다.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다. 황희찬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많이 달라졌다. 이제 한 단계만 올라서면 붉은 황소는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 것은 물론 선배들의 업적을 넘어설 수 있다. 황희찬이 ‘한국은 패스는 몰라도 확실히 골을 넣는 팀’이라는 표현을 이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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