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은 언제 탄생하는가? 한 인물이 공식적인 플랫폼에서 정색을 하고 무언가를 진지하게 행하였으나, 그 이면에 어처구니 없이 웃긴 구석이 있을 때. 그 갭은 바로 가공하기 쉬운 떡밥이 된다. 가수 비가 더 이상 진지할 수 없는 얼굴로 무대에 올라 ”They call it! 왕의 귀환”이라 엄중히 선언할 때, ‘펀쿨섹좌’ 고이즈미 신지로 의원이 공식석상에서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표정을 지으며 “하겠습니다. 그것이 약속이니까”라고 말한 것이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밈은 그러니까 아주 직관적인 웃음 코드는 아니다. ‘깡’의 영상 댓글에 이 노래의 놀릴 거리에 대한 천하제일 드립 대회와 1일1깡 하는 패러디 영상들이 속출하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비는 지금의 ‘비룡’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밈은 ‘이건 알아듣는 사람들끼리만 낄낄댈 수 있다’는 일종의 소속감을 제공하는 소재이자, ‘이것도 웃기지만 이걸 이렇게 패러디하는 나도 웃기다’는 자의식을 만족시키는 행위이다.
참여와 공유, 2차 창작으로서 끊임없이 변주되고 변형되며 비로소 ‘웃기다’는 맥락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유행이 될 때쯤이면 이미 원작 혹은 원래 상황에서 이 대사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맥락은 없다. 그냥 그것 자체로 웃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손쉽게 재가공할 수 있는 ‘밈’이 넘쳐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최초에 필수 합성 요소가 있었다. 한국이 대 인터넷 시대를 맞이한 근 이십 여 년 전, 디씨 갤러리가 만들어지고 ‘엽기’니 ‘즐’이니 하는 용어가 유행하던 시절, 인터넷 유저들은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공중파 콘텐츠를 물고 뜯고 씹고 즐기며 필수 합성 요소들을 가지고 놀았다.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사딸라”, ”내가 고자라니”, <태조 왕건>에서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같은 대사를 쪼개 어떤 맥락이든 갖다 붙여 2차 창작을 시작했고, 빠삐코 CM송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영화 OST를 섞어 ‘빠삐놈’ 같은 밈을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인터넷 서브컬처에 푹 빠진 ‘오타쿠’들의 유희 거리였던 이 필수 합성 요소들은 질기고 창창한 명맥을 이어나가 ‘드립’, ‘짤방’, ‘밈’으로 점점 더 세를 불렸다. <야인시대>의 “사딸라”와 <타자>의 “묻고 더블로 가”는 최근 광고에서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시대에 밈이 더 왕성해진 까닭은 뭘까? 주류 플랫폼이 분산되고, 공중파라는 말이 무색해지며, 잰 체하는 모든 기성의 것이 낡게 느껴지는 시대에, 대중문화가 서브 컬쳐였던 인터넷 문화로부터 역으로 유행을 수혈 받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스브스뉴스’의 <문명특급> 같은 빼어난 콘텐츠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 B급 정서와 케이팝 문화를 정확하게 겨냥한 <문명특급>은 ‘숨어 듣는 명곡’ 시리즈로 비를 살려냈다. 반면 <놀면 뭐하니> 같은 기성 매체는 ‘깡’ 밈으로 주목 받은 비를 데려와 매우 익숙한 기성 연예인인 유재석과 이효리와 함께 늘 하던 방식대로 이 유행에 손쉽게 탑승했다. 이 시대에서 유행을 만드는 게 어떤 채널이고, 따르는 게 어떤 채널인지 민망스러울 정도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주류미디어에 편입되는 순간 밈의 생명은 거기서 끝이다. 우리끼리 알던 걸 공중파 뉴스에서도 말하는 순간, 흥미가 싹 가시는 그 심리. 여기에 어떤 자본의 의도가 개입하는 순간? 잔치는 끝난다.
그러니까, 촌스러운 걸 촌스럽다 놀렸을 뿐이다. ‘놀리는 행위’가 재미있는 거지 놀림 당한 대상이 새삼 대단해진 게 아니라는 거다. 밈에 대한 열광을 뜯어보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놀리는 행위’, ‘패러디’, ‘2차 창작’의 적극적인 향유에 대한 애정이다. 고승덕 의원의 “정말 미안하다!”와 김무성의 ‘노룩패스’가 훌륭해서 웃긴 건 아니다.
더 이상 패러디 할 재미가 없어진 밈은 폐기된다. 그 수명과 주기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틱톡이며 인스타그램이며 트위터며 온갖 SNS로 이어진 세계는 쉴 새 없이 웃길 거리를 쏟아내고, 눈 밝은 기획자들은 밈이 될 만한 콘텐츠들을 ‘디깅’해 들이민다. <문명특급>은 ‘숨듣명’ 시리즈에 이어 ‘백쪼의 호수’라는 콘텐츠로 케이팝 속 ‘쪼’라는 새로운 놀이거리를 대중에게 던질 준비 중이다. ‘쪼’는 또 어떤 연예인들을 재조명시킬까? ‘숨듣명’처럼 ‘쪼’ 역시 웃긴데 멋있는, 웃김의 대상은 의연할 수밖에 없는, 그 아슬아슬한 맥락을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있다.
이런 것이다. “너도 알지, 그거 있잖아, 웃긴데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댓글 놀이와 패러디 영상, 주류 미디어 진출과 폐기.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진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더 많은 밈이 빠르게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요점은 이제 정말 미디어의 주류와 비주류가 뒤바뀔 때가 되었다는 것. 밈을 ‘디깅’하는 쪽과 ‘팔로우’하는 쪽, 어느 쪽이 앞서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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