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처럼 인면수심의 세계관을 가진 연출가는 본 적이 없었다.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 <사이비> <서울역>까지는 말이다. 사기꾼, 포주, 성노동자, 사이비 교주, 가출 청소년, 노숙자가 등장해 비정한 인간 사회의 맨 밑바닥까지 까뒤집어 보여주며 단 한 톨의 희망도 순수도 몽땅 몰살시키는 자비 없고 냉소적인 세계. 오른뺨을 주면 왼뺨마저 갈기는 세계. 그러나 우화처럼 위장한 그것이 위악 아닌 날것의 현실이라 커터 칼에 저미듯 통증이 느껴지는 작품들. 연상호 감독이 좀비물을 찍은 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였다. 좀비 디스토피아는 현대 사회에 대응하는 극단적이고 가학적인 은유이므로. <서울역>은 역시나 가차 없이 훌륭했고,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실사 영화 <부산행>은 한국에서 좀비를 보편적인 장르로 만든 첫 주자였다. 달리는 기차에 좀비 한 마리를 풀어놓은 아이디어와 총 없는 맨손 육탄전, 사파리 신 등 액션 장면들은 여전히 기막힌 솜씨였지만, 갸우뚱한 지점도 있었다. 비정한 그의 세계에 놀랍게도 한국형 신파와 희망이 틈입한 것이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눈물을 짜내는 시퀀스와 ‘분유 광고’라 회자되는 배우 공유의 부성애 신이 이어지고, 결국 아이와 임신부만은 살린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이기에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타협이었을까? 혹은 그의 세계관이 조금 밝아진 걸까?
다음 실사 영화는 <염력>이었다. 용산 참사를 소재로 ‘비극의 날, 철거민에게 초능력이 있었다면?’이란 엉뚱한 가정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주인공이 철거민을 염력으로 구해내는 장면은 말초적인 위로를 주지만, 장르적 환상은 결국 상업 영화식 가족 복원의 서사에 복무하며 실재하는 비극을 착취한다. 머쓱할 정도로 안이한 꿈과 희망에 찬 이 작품에 평론가들은 대체로 혹평을 퍼부었지만, 한편으론 궁금하기도 했다. 아니, 정말 사람이 바뀐 걸까? 아무리 독립 애니메이션과 상업 영화의 입장이 다르기로서니 어떻게 <사이비>의 감독이 이렇게 꽃밭인 작품을 만들 수가 있나? 연상호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그가 처음 각본을 쓴 드라마 <방법>을 봤다. 다시 연상호의 팬이 됐다. 본격적인 오컬트물로서 <방법>은 서사 외적인 어떤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순수하게 이야기의 재미만을 좇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비로소 그가 보였다. 스토리텔러로서 그의 왕성한 재능을 다른 플랫폼에서 확인한 것이다. (실사 영화가 제작 예정이고, 드라마 시즌2가 예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반도>는 어떤가? 코로나 시대에 여름 텐트폴 영화로서 승부수를 둔 <부산행>의 속편은? 좀비물보다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라 부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이 세계에서 주적은 좀비만도 못한 인간들이고, 좀비들은 카체이싱의 방해물 정도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시체들의 새벽>보다 노골적인 <매드맥스>다. 인간이 어디까지 나빠질 수 있을지 보여주는 연상호 특유의 장기는 여전하지만, 이번에도 가족애와 신파는 포기하지 못했다. 틀에 박힌 듯한 어린이와 노인이 나온다. 실제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이런 캐릭터들은 왜 한국 재난 영화에만 등장하는지 궁금하다.
그 와중에 생각해 볼 만한 유의미한 질문도 있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야만 하는가?’ ‘인간됨이란 무엇인가?’ 영화 <반도>에서는 쥐덫 안에 놓아둔 치즈처럼 한 마리 쥐라도 이 답을 손쉽게 찾을 수 있지만, 이 질문을 연상호 감독에게 되묻고 싶다. 애니메이션 전작들의 연출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의 차기작에서는 그 답을 제대로 듣고 싶다.
싸우는 소녀들
연상호 감독이 최근 꽂힌 게 있다면 그건 분명 소녀 전사일 터다. <반도>의 준이(이레)는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는 터프한 카체이서이며, <방법>의 소진 (정지소)은 상대의 손가락 하나만 잡아도 몸을 뒤틀어 죽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신을 모신 강력한 무당이다. 둘 다 과묵하며, 깡총한 커트 머리라는 점도 닮았다. 연상호의 지난 세계에서 여자들은 성노동자, 순결한 딸, 임신부, 어린아이였지만, 최근 두 작품에서 소녀들은 전사가 되어 나타났다. 이들의 이야기가 가장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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