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이건 봐야 한다기에 봤다. 뻔한 불륜 드라마에 김희애라는 강력한 카드와 영화적 연출 기법을 얹어 사람들을 현혹시키겠거니 했는데, 웬걸 6화 만에 불륜, 임신, 고구마, 사이다까지 모든 클리셰를 때려 넣어 논스톱으로 후루룩 이혼까지 마무리해버렸다. 이게 6부작 드라마였던가? 이토록 빠른 전개가 당황스러운 건, 드라마 속 불륜과 이혼 이후의 세계에 대해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바리데기 같은 고난과 수모를 거쳐 악당을 시원하게 징벌한 후, 그 다음 세계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럼, 이제 볼 장 다 본 것인가? 하지만 이혼 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이제 <부부의 세계>는 이혼 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 드라마를 더 봐야 하는 이유를 들여다봤다.
시청률이 3주 만에 세 배로 뛰더니 18%를 기록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부부의 세계> 이야기를 한다. “김희애 연기신 내린 것 아니냐”고 흥분하며 시작한 대화는 뻔뻔한 남편과 불륜 상대에 대한 분노로 전환되어 자기가 겪은 배신에 대해 울분을 토하다, 결국 불륜이란 행위에 대한 원론적인 토론으로 번진다. 그때쯤이면 점점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분위기는 참담해지는데, 이 뻔한 대화들은 대부분 “아 이제 이런 얘기 그만 좋아해야 하는데”라는 차가운 이성의 소리로 마무리된다.
“두 사람을 다 사랑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사랑한 게 죄는 아니잖아.” 직업이 영화감독인 남편은 마치 지나간 불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들을 오마주하듯 진부한 변명을 내놓으며 자신의 외도를 합리화한다. 사전 협의 없이 부부간의 계약을 어긴 것에 대해 추궁을 하는데 갑자기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며 본질적인 접근으로 반문한다면 불륜 드라마만 다섯 번째 주인공을 맡은 김희애라도 제 정신으로 버티고 있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은 미련한 아내를 답답해하고, 뻔뻔한 남편 때문에 혈압이 올라도, 결국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을 처절한 응징과 스포츠적 쾌감을 위해 불륜 드라마를 본다. 그리고 <부부의 세계>는 그 모든 과정을 단 6화 만에 끝내버렸다. 원작 드라마의 시즌1에 해당하는 내용이 3주 만에 끝나버린 것이다. 서스펜스를 극대화한 촬영 기법, 감정을 격앙시키는 음악, 자동차 추격 신 등 스릴러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연출도 드라마의 인기 요인이겠지만, 짧은 영상에 익숙해진 요즘 시청자마저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급격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의 속도다. 그래서 불륜 드라마라면 모두가 겪는 ‘불륜 미화’에 대한 논란도 ‘이런 얘기 그만 좋아해야 하는데’ 같은 성찰도 전부 운을 떼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드라마는 언제나 여성을 중심으로 ‘부부의 세계’를 그려왔다. <청춘의 덫>을 비롯해 수많은 일일 드라마에선 남편의 외도와 가부장제의 악습으로 고통받는 아내가 주인공이었고, <거침없는 사랑> <위기의 남자> <밀회> 등 결혼 후에 찾아온 사랑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 또한 셀 수 없다. 전자는 시청자를 쉽게 이입시켜 남편과 외도 상대를 신나게 욕하게 만드는 하나의 오락 장르가 되었고, 후자의 경우는 윤리적인 고민을 하게 만들다가도 결국 금단의 사랑이 자아내는 낭만에 동요되도록 만들었다. <내 남자의 여자>나 <따뜻한 말 한마디>처럼 배신을 당하는 여자와 불륜 상대인 여자를 동시에 주목하는 작품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 캐릭터가 사랑과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의 세계’에 종속되다 보니, 남성 인물의 비중은 축소되고 두 여자의 대립으로 빚어지는 치정 싸움이 극의 전체적인 흐름을 차지한다. 이처럼 불륜 소재 드라마는 여성 인물들에게 싸움을 부추겨 누구든 한 남자를 쟁취해 ‘부부의 세계’를 사수하라고 종용해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제목이 <부부의 세계>인 이 드라마는 과거 치정극들이 갖고 있던 모든 전형성을 일찌감치 끌어 쓴 뒤, ‘자 이제 이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질문한다.
그 과정에서 도드라지는 건 ‘부부의 세계’가 아닌 김희애가 연기하는 ‘선우의 세계’다. 선우는 극의 주도권을 모조리 장악하며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1화에서 선우는 일을 하면서도 남편과 아들에게 헌신하는 아내로 등장하지만, 남편의 외도와 주변인의 배신을 알아차린 직후부터는 본인이 맺고 있던 모든 관계에서 서서히 독립한다. 동료이자 친구인 산부인과 의사, 늘 친절을 베풀기만 했던 환자들, 자신의 아이를 믿고 맡기는 가장 친한 이웃까지. 결혼이라는 관계를 기반으로 맺었던 모든 관계와,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믿었기에 유지될 수 있는 관계까지 모두 하루아침에 파괴된 선우는 자신의 상태 또한 변하고 있음을 수시로 자각한다. 그러나 선우는 원망과 복수심을 품는 것과 별개로 외도의 피해자로서 부서진 삶을 복구하기 위해 단단해지기로 결심한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관계들을 침착하게 정리하고 자신의 불안한 상태를 들여다보며 정확한 방향과 타당한 이유에 분노하고 자신과 닮은 듯 다른 민현서라는 인물을 도우며 성숙해진다.
현재까지 방영된 <부부의 세계> 에피소드는 남편과의 불화만큼이나 민현서와 지선우의 관계를 비중 있게 다뤘다. 현서는 무능하고 폭력적인 남자친구에게 수시로 돈을 빼앗기고 폭행을 당하면서도 ‘제가 꼭 정신차리게 만들 거’라 말한다. 계급도 처지도 다르지만 자신의 재산을 남편 명의로 돌리고, 집 안 경제를 혼자서 책임졌던 선우는 그런 현서에게서 자신을 발견한다. 선우는 현서를 폭행에서 구출하고 현서는 선우의 증거 수집을 도우면서 그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조언한다. 자신들을 괴롭히던 남성에게서 벗어난 두 사람은 다시 만나 힘겨운 시기를 함께 극복하고 서로 격려한다. 두 여자 모두 자신만의 세계를 되찾은 것이다.
앞으로 <부부의 세계>는 배신을 당한 여자는 평소 어떤 트라우마와 욕망을 갖고 있었는지, 남편이 중심이었던 삶이 이혼 후 어떻게 바뀌는지, 현서를 비롯해 절망 속에서 손을 잡아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될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부부인 두 사람만의 관계를 넘어 그 세계에 침입한 적과 동료들을 집요하게 취조하고 북돋으며, 이제껏 불륜 드라마가 갖고 있었던 좁은 영역을 확장하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아주 작은 균열이지만, 이런 시도가 치정극을 소비하던 시청자의 구태의연한 시청 태도에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 자극적인 소재와 인물 설정에 치중하기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존의 관습을 변형하는 시도 또한 활발해질 것이다. 지금은 2020년이고, 결혼 제도로 맺어진 ‘부부’가 관계의 종착역이라거나 다른 형태의 파트너십보다 완전한 관계임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통쾌한 복수보다 그 이후의 삶이 궁금한 지금, <부부의 세계>를 좀 더 봐야 하는 이유다.
<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