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커뮤니티에 ‘루피’를 쳐봤다. 반응이 뜨겁더라. 다들 ‘루피는 찐’이라던데.
선공개 곡들을 싱글로 내면 앨범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갈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지.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계획이 아니지. 하하하.
데뷔 5년 만에 첫 정규 앨범 발매를 앞둔 기분은 어떤가?
작년 여름부터 오래 준비했다. 자신 있다.
<ICE>나 <킹 루피>도 14개 트랙이었는데 EP라 의아했다. 정규 앨범에선 얼마나 어마어마한 걸 보여주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25개 트랙으로 꽉 채웠더라.
지금은 마이클 잭슨이 웰메이드 앨범을 들고 나와도 잘되지 않을 수 있는 시대다. 콘텐츠가 소비되는 패턴이 매우 빠르고, 곡은 2분대로 짧아지고, 사람들은 진지한 걸 참지 못한다. 요즘 시대에 앨범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정성을 쏟는 일이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난 어릴 때부터 웰메이드 앨범에 대한 경외심이 있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뤘다. 셰프라 하면, 예전엔 웍으로 요리할 수 있는 기술만 있었는데, 웍도 쓰고 회도 뜨고 수비드도 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춰 식당을 차리고 싶었던 거지. 내 목소리의 활용법을 다 찾아낼 때 정규를 내려 했고 그게 지금이다.
8곡이나 선공개한 건 어떤 전략이었나?
나도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기대하고 기다려보니,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그 앨범을 가장 사랑하고, 정작 나오고 나면 관심이 멀어지더라. 선공개 곡으로 기대치를 올리고, 앨범 단위로 발표했을 때 관심받지 못할 곡도 하나하나 들려주고 싶었다.
타이틀 ‘Villain’은 어떤 곡인가?
‘Villain’은 애틀랜타 남부 흑인들이 사용하는 사투리 플로우를 팝 비트에 실어 만든 곡이다. 이 노래가 좋은 평을 받으면 놀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좋더라. 한국에 왔을 때, 미국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음악을 현지화해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Villain’에 대한 반응을 보며, ‘그건 내 역할이 아니구나. 한국 리스너들의 수준은 이미 높아졌구나’라고 생각했다.
히어로보다 빌런이 좋나?
아니. 히어로가 좋다. 하하. 빌런이라는 아이덴티티가 날 표현하진 않는다. 하지만 어느 날엔 내가 근면 성실하다고 느끼고, 어느 날엔 섹시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Villain’을 만든 건 어떤 순간이었냐면, 우리가 힙합 신에서 외면받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메킷레인은 외국에서 온 레이블이라 한국 힙합 안에 포함시키기 애매하다는 거다. 한국에 왔을 때 난 사랑이 충만했는데, 미움을 먼저 받았다. 온 지 3일 만에 디스 곡을 받았잖아. 난 사랑하는 마음으로 왔는데. 하하하. 그때 우린 빌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
무엇보다 루피를 한국 힙합 신에 각인시킨 ‘Gear2’의 후속, ‘Gear2020’에 대한 기대가 높다.
난 ‘Gear2’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남들이 원하는 기준에 끼워 맞춘 듯한 트랙이거든. 보여주려는 태도가 촌스럽다고 말하면서도 보여주는 트랙이고. 하지만 그건 여전히 날 대표하는 곡이고, 사랑해주는 분들에게 잘못은 없다. 그 곡을 사랑해주는 분들께 다시 선물을 할 때 얄팍한 만족감을 드리고 싶진 않았다. 랩을 빠르게 해서 스킬만 보여드리기보다는, 트렌드를 담아내 새로움을 보여주려 했다. ‘Gear2’보다 빠른 랩이 아니라, 새로운 걸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Gear3’가 아닌 ‘Gear2020’이라 했다.
스킬뿐 아니라 루피의 매력은 독특한 톤에 있지.
사실 콤플렉스였다.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거든. 루피란 이름으로 노래 부르기 시작했을 때 “루피는 목소리가 좋다”라는 말을 듣고 단점이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목소리를 왜 매력적으로 느끼는지 객관화해 들어보려 했고, 그 부분을 증폭시키려 했다.
이제 본인 목소리를 좋아하나?
흠. 여전히 나는 배우 이병헌 같은 목소리를 좋아한다. 그런 목소리이고 싶은 순간이 아직도 있다. 가령 진지하게 사랑 고백을 해야 한다거나. 하하하.
이번 앨범에서 특별히 애착 가는 곡은?
‘Love Letter from Sad Boy’. 내가 만든 곡 중에 가장 완성도가 높다.
루피의 음악엔 ‘Love letter from sad boy’ 같은 외로움이 늘 있다. 외로움과 친한가?
익숙하다. 즐기는 편이기도 하고. 우울함에 빠지면, 끝까지 내려가서 잠영을 한다. 그리고 마무리할 때 잠을 잔다.
그 노래를 들을 때 루피 안의 외로움을 본 것 같았다. 어떤 소년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천성이 말을 잘 듣고 조용한 아이였다. IMF 때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말수가 적어졌다. 아버지도 입을 다무시고, 나도 분위기에 눌려 말을 안 했지. 친구들이 놀자고 하는 전화를 못 받았다. 지금도 전화가 많이 불편해서,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낸다. 군대에서도 말하기보단 생각하는 시간이, 유학 가서도 말하기보다 관찰하는 시간이 많았다. 내면에 침잠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우울과도 친해졌다. 창작에도 도움을 줬고. 하지만 내가 창작하는 일을 해서 외로움이 증폭돼 보이는 거지, 다른 직업이었다면 그런 면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나보다 힘든 기억을 가진 분들이 많으니까.
음악으로 우울을 흘려보내는 법도 알게 됐나?
가슴에서, 여기 이 부분에서, 욱하고 끓어오르듯 울컥하는 감정 있잖아. 나는 그게 배출이라고 생각한다. 카타르시스지. 슬픈 노래를 만들고 다시 들었을 때 우울감이 해소되더라.
지금의 루피가 그 시절의 어린 당신을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건가?
공감이 가장 큰 위로라고 생각하지만 타인에게 완벽히 공감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내게는 온전히 공감할 수 있잖아. 그러니 난 네게 공감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공감이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인가 보다.
내가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20층에 산다고 하자. 그래서 19층에 사는 사람을 보면 미소를 짓는다. 너도 무섭지, 하고. 그런데 200층에 사는 사람을 보고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감히? 각자 떠안은 감정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 거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공감할 수 있는 면이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의 입장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메킷레인 수장으로서 책임감이 크더라. 어떤 리더인가?
좋은 리더일 수는 있지만 좋은 보스는 못 된다. 공감해주는 리더로선 백 점이지만, 〈삼국지〉로 보면 실패한 사람이지. 하하. 유비보단 조조 같은 사람이 사랑받는 시대니까. 하지만 이젠 내려놓았다. 그 무게를 내려놓지 않으면 정규 앨범을 낼 수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다.
루피에겐 어떤 그루브가 있다. 지금처럼 말할 때 제스처, 몸짓 같은 것에도.
2백 퍼센트 캘리포니아의 영향이다. 그곳에 있을 땐 날씨 예보를 몇 년간 안 봤다. 왜냐면 내일도 이럴 테니까. 야외 활동을 계획할 때도 날씨를 고려하지 않는다. 항상 좋으니까. 시간이 흐르는 게 느껴지지 않으니 나이를 확인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오자마자 ‘너 나이 서른 살’ 이러면서 디스해서 놀랐다. 하하하.
교포 같다는 말 많이 듣지? 군대까지 다녀오고 LA로 떠난 걸 알고 놀랐다.
내가 누구여야 하는지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군대에서 전역하고 일주일도 안 돼 미국에 갔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가 전 지구의 주인이라고 느끼더라. 하하하. 특히 힙합 문화 안에서 당당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경쟁하지 않고 다양성을 나누는 태도가 좋았다. 그런 모습을 닮고 싶어 힙합을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는 어디에 살든 지구에 살고 있다고.
루피다운 건 뭔가?
기대어 있는 것. 실제로 몸에 힘이 없어서 기대 있어야 해. 하하하. 한 발짝 떨어져 여유 있게 보는 것. 그리고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는 것. ‘레이 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침 재즈도 좋아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기 자신을 마주할 때 어떻게 하나?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 모습도 괜찮다. 난 다른 사람을 우상화하기도 했고, 남들이 우상화하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둘 다 경험해보니 결국 우상화되는 사람과 우상화하는 사람은 다를 게 없더라. 모든 이는 불완전하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요즘처럼 진실보다 이미지가 중요한 시대엔 더욱 그렇다.
루피의 페인킬러는?
애드빌. 문제다. 세 알 먹어야 듣는다. 하하. 사실상 나의 페인킬러는 예술인 것 같다. 예술은 모든 이에게 그럴 거다.
노래 ‘I Gotta’를 좋아한다. 돈만 쫓는 시스템을 고민하며 나는 졌다 한다. 그러다 “야 너희들은 그걸 왜 해?”라는 말이 꽂혔다. 당신은 이걸 왜 하나?
마치 오늘 뭐 먹지 같은 질문인데. 처음 루피로 눈을 떴을 때는 위대한 목표와 꿈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현실에 부딪히고 <쇼미더머니>를 선택한 내 행위가 너무 뻔했다. 멋이 없는 걸 넘어, 남들이 만들어놓은 인프라 안에 들어가는 건 지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야망이 컸다. 그런데 이 인프라가 내가 몸담은 것보다 크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만 좇다가는 팀이 무너질 것 같아서 <쇼미더머니>에 나가자고 했다. 그때 출사표처럼 만든 곡이다. <쇼미더머니>를 택했던 건, 결과적으로는 좋았지만 스스로는 패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찾았고?
글을 쓰는 직업도 마감에 쫓겨 일할 때도 있지만 설렐 때가 있지 않나? 우리도 그렇다. 돈을 버는 것 이상의 복잡한 이유가 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내 능력의 한계를 아는 게 좋을까, 모르는 게 좋을까? 난 모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겁이 없거든. 지드래곤이 되고 싶으면 지드래곤 발끝도 못 본다. 하지만 칸예 웨스트가 되겠다고 생각하면 지드래곤은 지나쳐 있겠지. 미국에 있을 땐 켄드릭 라마처럼 노래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내 한계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음악을 하는 건… 그런 거다. 정말 내 노래였으면 좋겠다는 명반이 있잖아. 그런 곡을 만들고 싶어서 계속하는 거다.
한국 힙합 신에서 한계를 느끼기도 하나?
힙합을 하나의 장르로 묶어버리는 사람이 절대 다수라는 것. 어떤 디테일이 있어도 한 카테고리 안에 넣어버린다. 가망 없는 싸움 같기도 하다. 한국은 힙합 신을 들여다보지 않고, “요즘 힙합 하는 애 누구 있지?” 하고 지나간다. <쇼미더머니> 때문에 내가 대한민국을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들 하는데, 한국에서 힙합은 아직 소수 문화다.
힙합이 뭐냐는 질문에 ‘생각, 스타일, 태도, 어떤 것이든 멋있는 것’이라고 답한 적 있다. 멋지다는 건 뭔가?
남들과 달라야 하는 거다. 나랑 같다면 멋지다고 느끼기 쉽지 않을걸. 누군가를 닮고 싶다면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힙합은 세상을 아름답게 할까?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생각해보자. 먹고 살고 죽는 인간의 문제를 벗어난 게 뷰티다. 힙합에도 힙합만의 뷰티가 있다. 자기 할 말을 하고,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힙합의 아름다움이다. 이 도시에 필요한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루피 말고 이진용은 어떤 사람인가?
집에서 속옷 바람에 게임하는 게 내 진짜 모습이다. 하하. 난 수많은 척을 하는데, 척을 하는 순간조차 내 모습인 거지. 월요일의 나와 화요일의 내가 수없이 반복되는데 다 나잖아. 우리가 친구가 된다면, 그렇게 알게 된 나도 나일 거다. 다들 그렇지 않나? 위켄드가 이런 가사를 썼다. ‘취했을 때가 진짜 모습’이라고.
취했을 때의 루피는 어떤데?
일찍 죽는다. 그냥 잔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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