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미술관이 ‘힙’을 입은 지 오래됐다. 대중에게 미술의 문턱을 낮추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성공적인 전시도 있었지만 실패도 많았다. 작년 ‘하이메 아욘’ 전시가 그 예시. 오는 3월 12일 구찌와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 전시를 개최한다. 구찌는 지금 세계적으로 힙한 브랜드 중 하나. 재작년에는 구찌와 깊은 연관이 있는 코코 카피탄의 전시가 인기를 끌었다. 이번에도 대박 흥행을 이어갈 수 있을까? 특정 패션 브랜드에게 미술관을 통째로 내준 대림미술관의 속내를 알아봤다.
대림미술관은 또 한 번 홈런을 칠까?
2014년부터다. 히피 아버지를 둔 장발의 무명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구찌는 패션 잡지와 방송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2019년 총매출은 약 80억 유로(한화 약 10조7천억원). 샤넬보다 높은 수치다.
구찌의 패션 키워드는 ‘럭셔리 히피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도마뱀, 새, 나비 프린트를 화려하게 수놓고 사자와 악어가 등장하는 영상은 그 옛날 반전과 평화, 자유와 사랑을 외치며 공원과 동산에 집결하던 히피를 연상시킨다. 단 허름하고 해진 옷자락의 히피가 아닌 스포츠카를 끌고 다니고 화려한 파티를 즐기는, 그러면서도 개념을 장착한 히피.
브랜딩의 확장과 마케팅에도 능한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계속해서 새로운 계획을 내놓는다. 그중 하나가 ‘구찌 플레이스’다. 구찌의 방향과 철학, 디자인에 영감을 준 장소를 소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곳을 방문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작년 초 서울의 대림미술관이 그 핫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미국 뉴욕의 대퍼 댄 아틀리에 스튜디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포에버 묘지, 이탈리아 피렌체의 구찌 가든과 보볼리 가든, 이탈리아 로마의 안티카 리브레리아 카시아넬리가 함께 이름을 올린 ‘동문’이다.
오는 3월 12일부터 대림미술관에서는 구찌에 의한, 구찌를 위한 전시를 선보인다. <이 공간, 그 장소 : 헤테로토피아(No Space, Just a Place. Eterotopia)>라 타이틀을 붙인 전시는 올해 가장 기대되는 전시로 꼽힌다. 헤테로토피아는 가상의 개념인 유토피아와 달리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 지상낙원을 의미한다. 성별과 나이, 국경에 제한받지 않는 적극적인 자기표현과 자유로운 예술이 있는 곳. 국내외 아티스트들은 가까운 미래 혹은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설치 미술을 선보인다. 성소수자와 퀴어 문화까지 다룰 예정이다.
럭셔리 브랜드 한곳에 미술관 전체를 내주는 꼴이지만 이상할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2013년에도 대림미술관은 <스와로브스키 : 그 빛나는 환상>전을 통해 스와로브스키의 작업물과 미학을 조명한 바 있다. 오늘날 대림미술관이 힙스터의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2011년 칼 라거펠트의 사진전 역시 커튼 뒤 주인공은 칼 라거펠트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있던 샤넬과 펜디였다.
국내 한 마케팅연구소에서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15~34세 남녀가 가장 선호하는 패션 브랜드가 구찌다. 대림미술관 역시 20~30대 고객 점유율이 전체 방문객의 90%에 이른다. 한국의 청춘은 구찌의 아트가 다른 곳과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있다. 2018년 큰 인기를 끈 <나는 코코카피탄 :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는 2017년 구찌가 영 아트 스타로 선정한 작가의 전시였다. ‘Tomorrow is Now Yesterday(내일이 이미 어제가 됐다)’를 포함해 코코 카피탄이 직접 쓴 손글씨로 장식한 티셔츠는 품귀 현상을 일으킬 만큼 인기를 끌었다. 당시 그가 선보인 ‘수영장’도 화제가 됐다. 전시장 한가운데 수영장 모양으로 푸른 타일을 깔고 그 위에 영상과 글귀를 쏜 작품. 글의 내용은 ‘나는 수영장 한 가운데 떠 있다. 유일한 사실은 난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였다. 삼포세대라 할 만큼 포기할 것이 많은 젊은 세대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 그 글귀, 그 느낌, 그 위안, 그 다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다시 대림미술관을 찾을 것이다.
운영 방식도 대림미술관과 구찌는 비슷한 점이 많다. 구찌는 2016년부터 전 세계 곳곳에 산재하듯 자리하던 오프라인 매장을 과감히 정리하고 방향타를 온라인 판매 쪽으로 돌렸다. 오프라인에서는 구매할 수 없는 온라인 전용 제품도 많았다. 20대가 비교적 쉽게 살 수 있는 액세서리 라인도 대폭 강화했다. 스냅챗과 인스타그램도 공격적으로 활용했다. 2020년 1월 기준 구찌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4천만 명에 이른다. 대한민국 인구수와 비슷한 규모다.
대림미술관 역시 마케팅의 중심에 ‘청춘’을 올린 지 오래다. 2014년 국내 미술관 중에서는 최초로 인스타그램 채널을 오픈했고 ‘핫’ 뮤지션, 아티스트와 함께하는 파티와 콘서트, 강연도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뉴욕현대미술관 등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던 특별 야간 개관 콘서트와 전시에 한해 ‘페어웰 위크, 일요일은 미술관에서!’ 같은 프로그램도 몇 년째 진행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의 인스타그램 팔로어 수는 약 15만 명. 국립현대미술관의 13만4천 명보다 많다. 사진 촬영을 허락한 것도 ‘청춘을 위한 전시’라는 맥락에서 신의 한 수가 됐다. 셀카봉까지 갖고 다니며 촬영을 하는 이들 때문에 미술관 같지 않다, 관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의견이 있지만 사진 촬영 자체는 문제가 안 된다. 해외에서도 사진 촬영을 허락하는 곳이 점점 늘고 있고 모든 미술관이 고고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중시한다면서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퀴즈. 대림미술관이 언제쯤 개관했고, <칼 라거펠트의 사진전> <핀 율 탄생 100주년> 등 소위 터지는 전시를 개관하기 전엔 어떤 전시를 선보였는지 기억하나? 대림미술관이 지금의 자리에 오픈한 때는 2002년이고 개관 전시로 사진과 패션모델의 변천사를 선보였다. 만 레이, 모리스 타바르, 사라 문, 배준성 같은 스타 사진가 32명의 대표작 1백75점을 소개한 자리. 그때부터 이미 대림미술관은 패션과 사진 중심의 사립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해왔다. 이후의 전시들이 터질 수 있었던 것은 7~8년 가까이 실전을 계속해왔기 때문이고 그 마디마디 노하우가 쌓였기 때문이다. 한창 잘나가는 구찌가 대림미술관에 ‘구찌 플레이스’란 빛나는 명찰을 붙인 데는 이런 이력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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