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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배우 정재광을 <버티고>의 관우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지금은 그렇다. 앞으로는 어떨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작은 체구로 다양한 인상을 품었다. 우리에게 어떤 인상을 남길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규정할 수 없기에 그의 미래는 무한하다.

UpdatedOn December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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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 무늬 수트와 터틀넥 톱은 모두 에트로 제품.

이 남자, 신기하다. 스튜디오에 들어올 땐 인터뷰하기로 한 그 배우가 맞나 싶었다. 배우라기보다 동네에서 흔히 보는 청년에 가까웠다. 낙낙한 점퍼에 부스스한 머리, 그게 또 어울렸다. 카메라 앞에 서니 달라졌다. 카메라를 멍하니 쳐다볼 땐 순수한 소년 같다가 살짝 각도가 바뀌니 뱃속에 구렁이 품은 사기꾼처럼 보였다. 옷 바꿔 입고 서자 또 달라졌다. 금융 종사자처럼 차갑게 보이다가도 신입사원 같은 반듯함이 풍겨 나왔다. 의상마다, 포즈마다 조금씩 다른 인상을 내비치는 배우. <버티고>에서 사연 품은 눈동자를 보인 청년 같았는데, 그것만으로 정재광을 얘기하긴 힘들었다. 인터뷰하기 위해 마주 볼 때 또 달랐으니까. 신인치고는 무척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가 인터뷰 내내 떠다녔다. 이 남자, 모르겠다. 신인에게 모호하다는 말은 칭찬일까. 그 말을 칭찬으로 만드는 건 정재광이 앞으로 해나갈 역할이다. 그건 나도 정재광도 알고 있다.

잡지 인터뷰는 처음인가?
맞다. 처음이다. 프로필 찍을 때 생각이 나더라. 항상 스튜디오 같은 곳에 들어가면 긴장한다. 연기하면 좋은데, 사진 찍는 건 좀. 앞으로 촬영할 때 나만의 흐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찍고 싶다, 하하.

안 해본 걸 많이 해보는 시기를 보낸다. 예전에 하정우 선배님 인터뷰를 <아레나>에서 봤다.
그걸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인터뷰하는 날이 올까 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하니 믿기지 않는다. 이것뿐만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에 간 거라든지, 내가 출연한 상업 장편 영화가 개봉한 것도 그렇고. 요즘 정신없는 상태다. 앞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충무로 기대주’ ‘라이징스타’ 이런 수식어가 제목으로 등장한다.
잘 써주셨구나, 하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배우로서 처음 날 알리는 계기가 됐으니까. 동시에 부담도 있다. 어떠한 작품으로 보여줄지, 기대하면서도 걱정스럽다.

덤덤하게 말하는데, 사실 혼자 있을 때 엄청 좋아하지 않았나?
하하하, 휴대폰 매일 봤다. 네이버에 기사 올라왔나 보고.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즐거운 일이다.

관심을 받았을 뿐 아직 시작 단계다.
나만의 마음의 소리라고 할까. 내 루트를 천천히 밟아나가자고 생각한다. 확, 변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배우는 그냥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면서 평생 하고 싶은 직업이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타이타닉>을 본 후로 배우를 하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더라. 고등학교 2학년이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중학교 때까지 춤을 계속 췄다. 팝핀, 힙합 같은 춤. 사실 당시 꿈이란 게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청소년수련관에 있는 DVD방에서 친구 셋과 심심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친구 한 명이 영화를 좋아했다. 그때가 가을이어서 멜로나 보자고 해서 <타이타닉>을 골랐다. 남자 셋이서 <타이타닉>을, 하하. 그때 문득 스크린 안에서 저렇게 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인생 한 번인데 다양하게 살면 좋겠다 싶었다. 저 안에 있는 고생까진 몰랐지만. 그러면서 안 하던 공부도 하면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대학 중에 제일 유명한 중앙대를 목표로 입시학원 찾아가 최선을 다했다. 그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던 애였는데.

결심만 한다고 중앙대 연극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잖나.
모두 나에게 떨어진다고 얘기했다. 날 가르치는 선생님조차 재광아, 여긴 너무 높으니 지방 가서 연출 전공한 다음에 나중에 연기해라,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그 말이 내겐 에너지가 됐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더 열심히 했다.

뒤늦게 시작해서 난다 긴다 하는 연극학과 동기에게 위축되진 않았나?
난 아웃사이더였다. 조용히 있었다. 그래야 내 걸 챙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관례상) 1학년은 워크숍 때 연기하지 못했다. 난 학과장님에게 가서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 1학년 때부터 연기했다. 욕 많이 먹었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연기했다. 그렇게 빠져든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서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하고 지원해주셔서 더 절실했다. 그게 살길이었다. 이거라도 안 하면 그만두고 돈 벌러 나가야 했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동안 오디션을 한 3백 번 넘게 봤다고 했다. 힘들어서 흔들린 적은 없었나?
다른 생각은 안 하려고 많이 걸었다. 신기하게 하정우 선배님도 걷는 걸 좋아한다. 실제로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나도 계속 걷고 그림 그리면서 잡생각을 안 하려고 했다. 오디션 때문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디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오디션 잡는 것조차 쉬운 게 아니다. 주위 친구들은 오디션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그 자체를 짧은 연습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막상 붙고 나서 카메라에 담긴 내 연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두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만족한 적이 전혀 없다.

 

“그게 살길이었다.
이거라도 안 하면 그만두고
돈 벌러 나가야 했을 상황이었으니까.”

 

독립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전계수 감독이 연기 보고 섭외했는데도 조금이나마 만족하지 않았다고?
불러주셨을 때, 날 왜? 하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왜 뽑으신 거예요? 하고 물어봤다. 그때 감독님이, 재광이는 결핍 연기를 잘하는 거 같아, 하시더라. 그렇게 알게 되는 거 같다. 나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역할을 맡으면 상상한 연기의 어느 정도까지 이르러야 만족할 거 같은데 항상 도달하지 못한다.

그 정도가 어디쯤인가?
예를 들어 최근에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보인 연기 같은. 로버트 드 니로처럼 연기하고 싶다. <택시 드라이버>에서처럼 완전히 그 인물이 되는 연기. 언젠가 그렇게 연기를 표현하고 싶은 게 목표다.
 

카키 그린색 터틀넥 울 스웨터와 팬츠는 모두 코스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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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 연기가 나아지는 기분은 드나?
역할을 맡을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느낌은 든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넓이는 잘 모르겠다. 작품을 많이 해봐야 넓어지는 거니까. 반면 깊어지는 건 확실히 느껴진다. 인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는 이성적으로만 계산해서 연기했다면, 점점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상황 때문에 마음이 그랬구나, 하면서 본질을 바라보는 눈, 관점이 조금씩 더 깊어지는 거 같다.

처음 상업 장편 영화를 해낸 경험도 도움이 됐겠다.
그 작품은, 뭐라 해야 하지, 나한테는 남다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2주 뒤에 출연하기로 확정됐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 힐링했다. 인간적으로. 이걸로 잘되고 성공해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 당시에 나 스스로 작품에 빠져서 힐링하는 기분이었다.

<버티고>에서 주목받아 유하 감독의 <파이프라인>에도 출연하게 된 건가?
그전에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버티고> 개봉하기 전부터 유하 감독님 작품 오디션 보고 미팅했다.

<버티고>가 전환점이라기보다는 천천히 밟아가는 단계인 셈이다.
그러면 좋겠다. 갑자기 바뀌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거 같다. 내 그릇에는, 확 바뀌면 지금은 버겁지 않을까 싶다. 최근 바빠진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인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천천히 내 그릇의 크기만큼 해나가고 싶다.

욕심이 없는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안 요소를 배제하고픈 마음으로도 읽힌다.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내 위 크기에 맞게끔 먹고 소화시키고 싶다.

 

“본질을 바라보는 눈,
관점이 조금씩 더 깊어지는 거 같다.”

 

실제로 보고 선이 옅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고 할까. 이런 말이 장점이지만 신인에게는 단점일 수도 있다.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신인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있다. 어느 순간 딱 내 옷 같은 역할이 오거나 아니면 여러 작품 하다 보면 쌓여서 나중에 탁 만들어지지 않을까. 내게 맞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요새 촬영과 촬영 사이에 여유가 있는 시기라고 들었다. 보통 뭐하나?
걷거나 운동하거나 혹은 친구 만나서 내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바빠진 일이라든가, 배우로서 느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나 스스로도 겪은 일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잘 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두근거리는 시기 아닌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있으니까.
그렇진 않다, 하하. 오히려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더 다양한 작품을 하면 조금 달라질까. 그래도 이런 상황을 바라던 때가 생각나긴 한다.

유하 감독 작품 이후 독립 장편 영화에 출연한다고?
<낫아웃>이라는 야구 범죄 영화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이다. 삭발하고 태닝하고 근육 좀 만들고. 오전에는 스카우터에게 관심받으려고 야구하다가 밤에는 돈 벌려고 몰래 폐주유소 가서 기름 훔치는 고등학교 3학년생 얘기다. 능동적인 역할이다. 유하 감독님 작품은 블랙 코미디라서 바보 같은 인물이다.

보는 이에게 계속 새로운 느낌을 주는 역할을 맡는다.
어쨌든 지루한 걸 싫어하니까. 연기는, 물론 일이지만 일로 느끼면 안 될 거 같다. 내가 먼저 즐겁고 재미를 찾아야 보는 분들도 재미를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재밌게 할 수 있는 면을 찾아야 한다.

인터뷰 끝나고 뭐할 건가?
밥 먹으러 갈 거다. <아레나> 화보 촬영한다고 다이어트했다. 한 5일? <파이프라인>에서 덩치 있는 역할이라 살을 찌웠다. 이제 양꼬치 먹으러 갈 거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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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옴므플러스>의 모든 기사의 사진과 텍스트는 상업적인 용도로 일부 혹은 전체를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링크를 걸거나 SNS 퍼가기 버튼으로 공유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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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INFO

CONTRIBUTING EDITOR 김종훈
PHOTOGRAPHY 이수환
STYLIST 배보영
HAIR&MAKE-UP 이현정

201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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