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신기하다. 스튜디오에 들어올 땐 인터뷰하기로 한 그 배우가 맞나 싶었다. 배우라기보다 동네에서 흔히 보는 청년에 가까웠다. 낙낙한 점퍼에 부스스한 머리, 그게 또 어울렸다. 카메라 앞에 서니 달라졌다. 카메라를 멍하니 쳐다볼 땐 순수한 소년 같다가 살짝 각도가 바뀌니 뱃속에 구렁이 품은 사기꾼처럼 보였다. 옷 바꿔 입고 서자 또 달라졌다. 금융 종사자처럼 차갑게 보이다가도 신입사원 같은 반듯함이 풍겨 나왔다. 의상마다, 포즈마다 조금씩 다른 인상을 내비치는 배우. <버티고>에서 사연 품은 눈동자를 보인 청년 같았는데, 그것만으로 정재광을 얘기하긴 힘들었다. 인터뷰하기 위해 마주 볼 때 또 달랐으니까. 신인치고는 무척 덤덤한 표정과 목소리가 인터뷰 내내 떠다녔다. 이 남자, 모르겠다. 신인에게 모호하다는 말은 칭찬일까. 그 말을 칭찬으로 만드는 건 정재광이 앞으로 해나갈 역할이다. 그건 나도 정재광도 알고 있다.
잡지 인터뷰는 처음인가?
맞다. 처음이다. 프로필 찍을 때 생각이 나더라. 항상 스튜디오 같은 곳에 들어가면 긴장한다. 연기하면 좋은데, 사진 찍는 건 좀. 앞으로 촬영할 때 나만의 흐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찍고 싶다, 하하.
안 해본 걸 많이 해보는 시기를 보낸다. 예전에 하정우 선배님 인터뷰를 <아레나>에서 봤다.
그걸 읽으면서 나도 언젠가 인터뷰하는 날이 올까 상상만 했는데 실제로 하니 믿기지 않는다. 이것뿐만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에 간 거라든지, 내가 출연한 상업 장편 영화가 개봉한 것도 그렇고. 요즘 정신없는 상태다. 앞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인터뷰 기사를 보니 ‘충무로 기대주’ ‘라이징스타’ 이런 수식어가 제목으로 등장한다.
잘 써주셨구나, 하면서 감사할 따름이다. 배우로서 처음 날 알리는 계기가 됐으니까. 동시에 부담도 있다. 어떠한 작품으로 보여줄지, 기대하면서도 걱정스럽다.
덤덤하게 말하는데, 사실 혼자 있을 때 엄청 좋아하지 않았나?
하하하, 휴대폰 매일 봤다. 네이버에 기사 올라왔나 보고.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즐거운 일이다.
관심을 받았을 뿐 아직 시작 단계다.
나만의 마음의 소리라고 할까. 내 루트를 천천히 밟아나가자고 생각한다. 확, 변하는 건 바라지도 않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배우는 그냥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면서 평생 하고 싶은 직업이니까.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뿐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타이타닉>을 본 후로 배우를 하고 싶었다고 인터뷰했더라. 고등학교 2학년이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중학교 때까지 춤을 계속 췄다. 팝핀, 힙합 같은 춤. 사실 당시 꿈이란 게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청소년수련관에 있는 DVD방에서 친구 셋과 심심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친구 한 명이 영화를 좋아했다. 그때가 가을이어서 멜로나 보자고 해서 <타이타닉>을 골랐다. 남자 셋이서 <타이타닉>을, 하하. 그때 문득 스크린 안에서 저렇게 살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인생 한 번인데 다양하게 살면 좋겠다 싶었다. 저 안에 있는 고생까진 몰랐지만. 그러면서 안 하던 공부도 하면서, 연기를 배울 수 있는 대학 중에 제일 유명한 중앙대를 목표로 입시학원 찾아가 최선을 다했다. 그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던 애였는데.
결심만 한다고 중앙대 연극학과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잖나.
모두 나에게 떨어진다고 얘기했다. 날 가르치는 선생님조차 재광아, 여긴 너무 높으니 지방 가서 연출 전공한 다음에 나중에 연기해라, 이렇게 말했다. 오히려 그 말이 내겐 에너지가 됐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더 열심히 했다.
뒤늦게 시작해서 난다 긴다 하는 연극학과 동기에게 위축되진 않았나?
난 아웃사이더였다. 조용히 있었다. 그래야 내 걸 챙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관례상) 1학년은 워크숍 때 연기하지 못했다. 난 학과장님에게 가서 연기하고 싶다고 해서 1학년 때부터 연기했다. 욕 많이 먹었다. 그때부터 정신없이 연기했다. 그렇게 빠져든 이유가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 사업이 부도나서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런데도 아버지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하고 지원해주셔서 더 절실했다. 그게 살길이었다. 이거라도 안 하면 그만두고 돈 벌러 나가야 했을 상황이었으니까.
그동안 오디션을 한 3백 번 넘게 봤다고 했다. 힘들어서 흔들린 적은 없었나?
다른 생각은 안 하려고 많이 걸었다. 신기하게 하정우 선배님도 걷는 걸 좋아한다. 실제로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기도 했다. 나도 계속 걷고 그림 그리면서 잡생각을 안 하려고 했다. 오디션 때문에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오디션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오디션 잡는 것조차 쉬운 게 아니다. 주위 친구들은 오디션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그 자체를 짧은 연습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막상 붙고 나서 카메라에 담긴 내 연기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그만두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만족한 적이 전혀 없다.
독립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전계수 감독이 연기 보고 섭외했는데도 조금이나마 만족하지 않았다고?
불러주셨을 때, 날 왜? 하고 생각했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왜 뽑으신 거예요? 하고 물어봤다. 그때 감독님이, 재광이는 결핍 연기를 잘하는 거 같아, 하시더라. 그렇게 알게 되는 거 같다. 나 스스로는 잘 모르겠다. 역할을 맡으면 상상한 연기의 어느 정도까지 이르러야 만족할 거 같은데 항상 도달하지 못한다.
그 정도가 어디쯤인가?
예를 들어 최근에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보인 연기 같은. 로버트 드 니로처럼 연기하고 싶다. <택시 드라이버>에서처럼 완전히 그 인물이 되는 연기. 언젠가 그렇게 연기를 표현하고 싶은 게 목표다.
하면서 연기가 나아지는 기분은 드나?
역할을 맡을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느낌은 든다. 서서히, 시간이 지나면서. 넓이는 잘 모르겠다. 작품을 많이 해봐야 넓어지는 거니까. 반면 깊어지는 건 확실히 느껴진다. 인물을 바라보는 통찰력이라고나 할까. 예전에는 이성적으로만 계산해서 연기했다면, 점점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상황 때문에 마음이 그랬구나, 하면서 본질을 바라보는 눈, 관점이 조금씩 더 깊어지는 거 같다.
처음 상업 장편 영화를 해낸 경험도 도움이 됐겠다.
그 작품은, 뭐라 해야 하지, 나한테는 남다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2주 뒤에 출연하기로 확정됐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 힐링했다. 인간적으로. 이걸로 잘되고 성공해야지 하는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 당시에 나 스스로 작품에 빠져서 힐링하는 기분이었다.
<버티고>에서 주목받아 유하 감독의 <파이프라인>에도 출연하게 된 건가?
그전에 출연하기로 돼 있었다. <버티고> 개봉하기 전부터 유하 감독님 작품 오디션 보고 미팅했다.
<버티고>가 전환점이라기보다는 천천히 밟아가는 단계인 셈이다.
그러면 좋겠다. 갑자기 바뀌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거 같다. 내 그릇에는, 확 바뀌면 지금은 버겁지 않을까 싶다. 최근 바빠진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인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냥 천천히 내 그릇의 크기만큼 해나가고 싶다.
욕심이 없는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불안 요소를 배제하고픈 마음으로도 읽힌다.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많이 먹으면 배탈 나니까. 내 위 크기에 맞게끔 먹고 소화시키고 싶다.
실제로 보고 선이 옅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고 할까. 이런 말이 장점이지만 신인에게는 단점일 수도 있다.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듣긴 했다. 하지만 신인에게는 별로일 수 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있다. 어느 순간 딱 내 옷 같은 역할이 오거나 아니면 여러 작품 하다 보면 쌓여서 나중에 탁 만들어지지 않을까. 내게 맞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요새 촬영과 촬영 사이에 여유가 있는 시기라고 들었다. 보통 뭐하나?
걷거나 운동하거나 혹은 친구 만나서 내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보낸다. 갑자기 바빠진 일이라든가, 배우로서 느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나 스스로도 겪은 일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잘 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지금은 두근거리는 시기 아닌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있으니까.
그렇진 않다, 하하. 오히려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더 다양한 작품을 하면 조금 달라질까. 그래도 이런 상황을 바라던 때가 생각나긴 한다.
유하 감독 작품 이후 독립 장편 영화에 출연한다고?
<낫아웃>이라는 야구 범죄 영화다. 전과는 완전히 다른 역할이다. 삭발하고 태닝하고 근육 좀 만들고. 오전에는 스카우터에게 관심받으려고 야구하다가 밤에는 돈 벌려고 몰래 폐주유소 가서 기름 훔치는 고등학교 3학년생 얘기다. 능동적인 역할이다. 유하 감독님 작품은 블랙 코미디라서 바보 같은 인물이다.
보는 이에게 계속 새로운 느낌을 주는 역할을 맡는다.
어쨌든 지루한 걸 싫어하니까. 연기는, 물론 일이지만 일로 느끼면 안 될 거 같다. 내가 먼저 즐겁고 재미를 찾아야 보는 분들도 재미를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재밌게 할 수 있는 면을 찾아야 한다.
인터뷰 끝나고 뭐할 건가?
밥 먹으러 갈 거다. <아레나> 화보 촬영한다고 다이어트했다. 한 5일? <파이프라인>에서 덩치 있는 역할이라 살을 찌웠다. 이제 양꼬치 먹으러 갈 거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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