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가는 길은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연상케 하고, 프랭크 다라본트의 <미스트>를 떠올리게 할 법한,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과도 같았다. 새벽녘 한 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찾아간 곳. 새벽 1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경기도 일산 외곽의 한 장소는 그렇게 <동백꽃 필 무렵>의 까멜리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곳은 사방에 뚫린 창문이 존재했다는 것 정도. 약속한 시간에 강하늘은 밝은 얼굴로 등장했다. 직전까지 드라마 촬영을 했고, 우리와의 만남 이후에 다시 마지막 촬영을 위해 충남 보령으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강행군임에도 그는 그렇게 미소 띠며 <아레나>와 만났다. 피곤하지 않냐는 인사말에 더욱 씩씩한 얼굴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배려라곤 단 10~20분이라도 눈을 붙이게 해주기 위해 분장을 하고, 옷을 입는 동안 인터뷰를 하는 게 전부였다. 헤어드라이어 소음이 커질 때면 녹음기를 입에 가져다 대며 “<아레나> 독자 여러분, 이건 드라이어 소리입니다”라는 너스레를 떤다. 구찌의 멋스런 재킷과 바지를 걸치고선, 괜히 “여기 노규태가 왔어야 하는데!”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강하늘과 기분 좋은 새벽을 보내며, 동녘에서 피어오르는 아침 햇살을 함께 맞았다.
올 5월 전역 후 하반기는 <동백꽃 필 무렵>(이하 ‘<동백꽃>’)으로 쉼 없이 달려왔다. 더욱이 반응이 너무 뜨겁다. 기분은 어떤가?
지금 인터뷰하는 시점이 거의 마지막 촬영이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하는 친구들이 많다. 다 <동백꽃> 보고 연락했다. 이것만 봐도 드라마를 ‘진짜 많은 분들이 봐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 <동주> 때는 그리 연락이 많지 않았고?
그때도 많이 오긴 했다. <동주>는 개봉관 수에 비해 흥행이 잘됐다. 영화 보고 연락한 사람은 대부분 동료들이었고, 이번에는 일반 친구들이 많다.
<아레나> 12월호에는 ‘황용식’뿐만 아니라 ‘노규태(오정세 분)’ 인터뷰도 있다. 그에 따르면 현장 분위기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
진짜? 현장 분위기는 진짜 좋다. 군 복무를 마치고 와서 그런지 모르겠다. 이렇게 헤어지기 어렵고, 이별에 마음이 헛헛해지는 작품은 진짜 오랜만이다. (한 스태프를 지칭하며) 오늘 스타일리스트 동생 한 명이 울었다. 아쉽다고.
여하튼 <동백꽃>은 강하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작품일 것 같다.
드라마가 흥행해서만은 아닐 거다. 물론 시청률이 높은 건 너무 좋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을 통해 많은 분들을 만난 게 전역 후 내게 온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나는 내가 출연한 작품들의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나 자신을 다시 보는 게 불편할 때가 많아서다. 하지만 <동백꽃>은 진짜 재미있어서 본다. 모니터링을 하는 게 아니라 시청자 입장에서 보는 것이다. 그중 내가 제일 많이 돌려보는 장면이 (오)정세 형 장면들이다. 나, 진짜 정세 형 사랑한다.
과거 인터뷰 때 오정세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저 안면인식장애가 있어요. 나중에 못 알아봐도 잘 이해해주시기 바라요”였다.
나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하하. 나는 그럼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되려 ‘저는 형이 좋아요’라고 말해주겠다고.
<동백꽃> 속 황용식은 강하늘이 연기한 <스물>의 경재, <청년경찰>의 희열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든, 그러니까 강하늘 캐릭터의 집대성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임상춘 작가의 대본에서 이미 그렇게 구축되었던 건가?
많은 부분에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어 캐릭터를 구체화하기 쉬웠다. 임 작가님이 어느 정도냐면, 웃음소리조차 대본에 쓴 경우도 있다. 이리 웃으면 이 장면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셨나 보더라. 그런데 그렇게 하면 진짜 잘 어울린다. 그 외 비어 있는 공간은 대본을 모티브로 내가 만들어나갔다.
대본에 대사 한 문장, 한 마디가 아주 완벽하게 쓰여 있었다고 들었다.
정세 형이 현장에서 딱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많은 고민 속에 다듬어진 말들. 그래서 대사 하나하나가 철저한 계산 속에서 쓰였음을 느꼈다. 거기에서 어긋나거나 벗어나면 되려 어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 황용식은 전 국민이 다 아는 열혈 청년이 되었다. 그 역을 수행한 강하늘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남은 대사 또는 장면은 무엇인가?
여기에 오기 직전에, 종영 소감 인터뷰를 했다. 기억에 남는 대사를 꼽아달라고 하더라. 하지만 보신 분들은 다 알 듯, 하나를 뽑는 건 너무 어렵다. 주옥같은 대사가 너무 많으니까. 이렇게 답했다. 그러나 <아레나>를 위해 하나를 꼽아보겠다. 대사보다는 장면이다. 매번 아들의 해진 티셔츠, 신발을 입고 신는 엄마(고두심 분)에게 그런 건 버리고 당신이 예뻐 보일 새 걸 사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대본을 읽을 때도, 촬영할 때도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고 짠했다. 고두심 선생님이 진짜 엄마처럼 연기해주시니 더 그랬다. 기억에 많이 남는다.
많은 이들이 황용식의 ‘(뒤집는) 눈 연기’에 대해 궁금해한다. 그것조차 대본에 있었나?
반 대본, 반 애드리브다. 대본에는 눈까지 어떻게 뜨라는 디렉션은 없었다. 상대방의 대사에 “눈이 왜 그래?”가 있다. 내 숙제는 이 반응을 도출할 눈을 만드는 거였다. <동백꽃> 준비하면서 제일 많이 고민한 것 역시 이 부분이었던 듯하다. 대체 내가 어떤 눈을 해야 상대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올까? 시청자 또한 내 눈을 보고 그래야만 했다. 고심한 끝에 한 건데 감독님이 아주 좋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 눈이 아니었을 텐데.
여러 가지 있었다. 억지로 쌍꺼풀도 만들어봤다. 흰자만 보이게도 했다. 게슴츠레하게도 했다. 용식의 캐릭터에 맞는 게 그 눈이 아닌가 싶다. 하하.
그래서 <동백꽃>은 강하늘에게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은가?
엄청난 시청률을 얻은 작품. 이렇게 기억되진 않을 것 같다. 빈말이 아니다. 많은 동료와 재미있게 지낸 시간들로 기억될 거다. 변 소장 역을 맡은 전배수 선배가 현장에서 이런 이야길 했다. “하늘아, 나 이번 작품 스트레스 한번 안 받고 찍은 것 같아”라고. 나 역시 그랬다. 어떤 아이디어든 다 같이 웃으며 받아주고, 촬영한 작품이었다.
<아레나>에 당신과 인연 있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다음 달에는 (<스물>을 함께한) 이병헌 감독을 만날 예정이다.
이 말 좀 꼭 전해주면 좋겠다. “형, 너무 보고 싶어요”라고. 또 “너무 축하한다”고. 요즘 너무 바쁘셔서 전화도 잘 안 받던데. 하하. 감독님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데, 진짜 형이라 부르며 따르는 분이다.
참, 임상춘 작가는 <청년경찰>의 동료 박서준이 출연한 <쌈, 마이웨이>도 집필했다.
그래서 서준 형이 한번쯤 카메오로 출연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하.
<동백꽃>을 살짝 뒤로 미뤄두자. 그리고 강하늘이라는 배우를 살펴보자. 지금껏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아주 다양한 장르 속으로 잘 흡수된 배우였다고 판단된다. 자신을 어떤 배우라고 생각하나?
모든 장르에 잘 묻어난다고 말해주는 건 매우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작품을 선택하고 임하는 태도는 딱 하나다. ‘무조건 재미있게 하자!’라는 것.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누구와도 얼굴 찌푸리지 않는 현장이길 바라서다. 작품을 할 때마다 다짐하는 목표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재미없는 현장은 없었다. 아, 질문에 답하자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싶어 하는 배우가 아닐까?
모든 작품이 다 그랬겠지만, 특히 영화에서 꼭 한 작품을 꼽으라면?
딱 말할 수 있다. <동주>가 가장 재미있었다. 아시다시피 <동주>는 저예산 영화였다. 이준익 감독 이하 모든 이들이 합심해서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이제는 말하지만 비가 내리는 장면도 에피소드가 있었다. 살수차를 불러야 할 돈이 없었다. 카메라 앞에 양동이로 물을 뿌리고 있고, 우리는 그냥 몸을 흠뻑 적신 채 비 맞는 듯한 연기를 했다. 이런 식으로 합심해서 모자란 부분을 메웠다. 그래서 뜻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개인적으로 <기억의 밤>에서 진석 역도 좋아한다. 강하늘이 스릴러 장르 연기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단 한 번도 장르를 가리며 작품을 선택해본 적이 없다. 그게 나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않을까. 나는 무조건 대본을 끝까지 쭉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판단되면 선택해왔다. 배우 강하늘 아니 인간 김하늘로서 그 대본에 동요가 일면, 하는 식이다.
연극, 뮤지컬, 드라마, 영화. 미디어 플랫폼을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배우다.
이미 말했듯, 나는 무조건 재미있으면 한다. 내 선택이 무조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만 하는 분들 역시 자신의 선택이다. 연극만 하고, 영화만 하는 길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 단지 그 선택으로 행복을 느끼면 된다. 참,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이 인터뷰는 군 전역 후 처음 하는 거다. 어디서라도 이 말은 하고 싶었다. 많은 분들이 ‘군대에서 얼마나 연기를 하고 싶었으면 <동백꽃>에서 저리 열심히 할까?’라고들 하신다. 그런데 나는 군에 있던 시간이 너무 좋았다. 솔직히 연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군대란 남자에게 힘들기도 한 곳이다. 그럼에도 연기 생각이 딱히 나지 않을 정도로 홀로 고민하고, 책 읽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게 너무 즐거웠다.
<동백꽃>에서 용식의 순애보는 애틋하고 멋스럽다. 현실에서 강하늘의 사랑 방식은 어떤가?
‘나는 연인에게 아주 잘해줘요’라고 말하는 건 굉장히 이기적인 것 같다. 나는 연애할 때마다 드라마, 영화에서 봤던 로맨틱한 장면들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좋아하는 드라마, 영화 장면의 오마주를 잘하는 편이다. 연기를 하는 건 아니고, 소소한 이벤트로서 말이다.
그럼 강하늘의 연애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랑 오마주는?
하하하. 와! 이런 이야기 좀 민망한데. <라붐>? (주제곡 ‘Reality’의 가사 ‘Dreams are my reality~’를 흥얼거리며, 굉장히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거, 그거. 와, 헤드폰 그거. 하하. 그런 장면을 오마주하고 싶기도 하고, 나와 함께한 시간이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길 바라서이기도 하다.
영화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는다고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아니 반복적으로 계속 보는 영화는 무엇인가?
너무 많은데… 최근에는 세 작품이 있다. <어바웃 타임> <덩케르크> <가버나움>. 어린 시절부터 <쉰들러 리스트> <아름다운 비행> <포레스트 검프> <쇼생크 탈출> 등을 몇번이고 봐왔다. 에드워드 노튼의 연기 때문에 <프라이멀 피어>도 계속 본다. <덩케르크>는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내 개인적으로 뽑는 2017년 최고의 영화였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혼자 쓴 작품인데, 그 감독은 계속 놀라게 하는 것 같다.
영화를 언제 많이 보나?
사실 나는 ‘집돌이’ 경향이 강하다. 캔 맥주 몇 개 사서 집에서 책, 영화, 다큐멘터리를 본다. 이 세 개만 한다.
그럼 책도 한두 권 추천해주면 좋을 것 같다.
리처드 파워스가 쓴 <오버스토리>. 숲을 지키는 아홉 명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정말 잘 썼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요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승려 아잔 브라흐마가 쓰고, 류시화 시인이 옮긴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마음속 108마리 코끼리 이야기)>다. 언제 읽어도 좋은 책이다.
2019년 남은 시간과 내년 계획을 알려주면 좋겠다.
익히 아시다시피 올해는 <동백꽃>으로 마무리될 것 같다. 곧장 연극 준비를 해야 한다. <환상동화>라는 작품이다. 12월 21일부터 막이 오르는데, 나는 늦게 연습에 합류하게 되어 내년 1월부터 무대에 오른다. 3월까지 하니 많이 보러 와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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