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는 부지런히 날았다. 작은 날개를 열심히 움직여 지구 곳곳을 다니며 27개의 상을 받았다. 얼마 전엔 노르웨이의 베르겐 국제영화제에서 공동 대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선 12만 이상의 관객이 들었다. 관객 수는 지금도 늘고 있다. <벌새>의 주인공 ‘은희’를 연기한 박지후는 영화 촬영이 시작되던 2017년 가을에 열다섯이었다. 촬영을 마치고 <벌새>로 유수 영화제에 다니고 ‘트라이베카 필름 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대단한 여정을 보내는 동안 박지후는 열일곱이 됐다. “어느 날에는 ‘엄마, 나 이 일이 너무 즐거워!’라고 말하면서 울었어요. 엄마도 울었고요. 짜릿함, 희열. 연기에서 그런 걸 느껴요.” 우당탕거리는 촬영장 스태프들 사이에서 박지후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사뿐사뿐. 신발 밑창이 보드라운 융단이기라도 한 것처럼. 낯을 꽤 가린다는 열일곱 소녀는 자신을 “경주마, 나서기 좋아하는 편, 무조건 반장이 되고 싶던 아이”라 소개했다.
<벌새>가 참 잘됐어요.
영화를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이런 영화는 상영관을 찾고 상영 시간을 맞추는 일이 무척 힘들잖아요. 기대를 안 했거든요. ‘10만 관객’이라는 꿈의 숫자를 보게 되어 정말 기뻤어요. 가슴이 벅차고요.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의 감상 평은 어땠나요?
친구들이 아주 수준 높게 말하진 못했지만…(웃음) 엄마랑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모두 영화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큰 울림을 느낀 것 같아요.
영화가 잘되어서, 개봉 후에는 여러 활동을 하느라 바빴어요. GV도 여러 차례 했고, 인터뷰도 하고, 영화제에도 참석했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GV 할 땐 관객들이 질문하면서 많이 울었어요. 저도 따라 울고 김보라 감독님도 울었어요. 영화로 소통한 것 같아서 감동적이었어요. 마음을 나눈 것 같았거든요. 질문의 내용도 ‘왜 이렇게 했어요?’라기보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면서 속마음을 드러내는 식이었어요. 영화가 누군가의 마음을 열 수 있구나, 생각했어요. 영화제에 참석한 것도 좋았어요. 부산국제영화제와 베를린 영화제에 갔거든요. <벌새>로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았어요.
GV에서 어떤 질문을 받고 울었어요?
어떤 관객이 감독님에게 힘든 일 있으면 어떻게 견뎌내는지 물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상처에 관해서 말하고 <벌새>를 보고 치유받았다고 했어요. 울컥하더라고요.
<벌새>에서 은희와 가장 깊게 소통했던 영지 선생님은 그럴 때 손을 펴고 열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본다고 했죠. 본인은 어때요? 힘들 때는 어떻게 견뎌요?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속으로 위로에 관해서 생각했어요. 누군가를 위로하고, 스스로 위로하는 방법에 대해서요. 저는 보통 저에게 상처가 된 상황을 계속 떠올리지 않고 다른 일을 해요. 음악을 듣는다든가, 일기를 쓴다든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요. 그러면 어느 순간 가라앉더라고요. 마음이 조금 잠잠해진 다음에 그 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요.
일기를 쓰나요? 손으로 써요?
네. 헤헤.
언제부터 썼어요?
지난해 6월부터요.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사진첩 보면서 추억 곱씹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사진에는 당시의 감정까지 다 담기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짧은 문장으로라도 감정을 표현하고, 남겨보고 싶었어요. 나중에 보면 ‘그땐 이런 생각을 했었지’ 하고 회상할 수 있게요. 어른이 되어서 다시 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자기 전에 엉뚱한 상상들을 많이 해요.
학교에 좀비가 나타났다거나.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잠도 더 잘 와요.”
일기에 <벌새>와 관련된 내용으로는 어떤 이야기가 적혀 있나요?
간단하게 썼어요. ‘벌새 1만 돌파’ ‘2만 돌파’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거의 매일 기록했어요. 보라색 펜으로 썼어요. 감독님 이름이 김보라라서요.
김보라 감독과 처음 만난 순간을 기억해요?
1차 오디션장에서 처음 뵈었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나요. 라이더 재킷 같은 걸 입고 들어오셨는데, 저는 배우인 줄 알았어요. 포스가 남달랐어요.
이제는 두 사람 이 꽤 돈독한 관계인 건가요? 김보라 감독과 지후 씨가 행사에 함께 참석한 모습을 보았는데, 지후 씨를 보는 감독 눈에서 꿀이 떨어지던데요. 아끼는 친동생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어요.
반은 가족이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워낙 많은 것을 함께하고 많은 감정을 나눠서요.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이제 감독님은 제 모든 걸 아는 것 같아요. 서로 그런 관계임을 느껴요.
김보라 감독의 디렉팅이 궁금해요. 연기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주던가요?
감독님과 함께 대본 분석을 많이 했어요. 대화도 계속 나누고요. 현장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지시를 별로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혼자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감정과 움직임의 틀만 어느 정도 잡아주셨어요. ‘이 공간에서 이런 감정으로 해보자’고 하셨죠. 감독님 덕분에 즉흥적으로 이것저것 해볼 수 있었어요. 그런 현장을 만들어주셔서 기뻤어요.
상상력이 풍부한 편인가요?
네. 주로 자기 전에 엉뚱한 상상들을 많이 해요. 학교에 좀비가 나타났다거나. 그런 상황을 떠올리면서 잘 때가 많아요. 그냥 재미있잖아요.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잠도 더 잘 와요.
은희 역을 연기하면서 많이 상상했을 거예요. 은희의 성격이나 여러 특징들이요. 그런 점들 중 장면에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것도 있나요?
유리가 은희에게 다가왔던 장면에서 은희는 굉장히 으쓱했을 거예요. 은희라면 한번쯤 주목받는 행세를 해보고 싶었을 테니까, 잠시 거만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으쓱하면서 센 언니처럼 구는 거죠. “유리? 이름이 예쁘네”라면서. 감독님이 그 장면 촬영할 때 엄청 웃으셨어요. ‘이름이 예쁘네’라는 대사를 너무 자연스럽게 잘한다고요.
<벌새>에서 은희는 학교와 집에서의 성격이 조금 다르잖아요. 지후 씨는 어때요?
학교에서는 나서기를 좋아했어요. 지금은 약간 덜한데 원래 그런 성향이 강했어요. 발표도 나서서 하고, 리더가 되고 싶어 하고. 그런데 집에서는 막내거든요. 언니가 있어요. 집에서는 어리광부리고 뭐든 도와달라고 하면서 가족에게 의지해요.
나서는 성격이라고요? 예상치 못했어요.
초등학교 때는 무조건 반장이 되고 싶어서 선거 때마다 나갔어요. 중학교 올라가서는 ‘가산점 준다’는 조건이 붙는 거라면 다 참여했던 것 같아요. 요즘도 그렇긴 한데 그때처럼 목숨 걸고 하지는 않아요. 하하.
은희와 영지 선생님은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잖아요. 지후 씨는 어떤 사람과 잘 통해요?
털털한 사람들과 잘 맞아요. 서로 눈치 안 봐도 되니까요.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하고 뒤끝 없는? 그런 사람들이요.
본인도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요.
2003년에 태어났잖아요. 1994년에 중학생인 은희를 연기했고요. 살아보지 않은 시절이기에 생소하고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그 무렵은 어떤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순수했던 것 같아요.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잖아요. 손 편지 쓰고, 삐삐로 암호 보내고.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시절이라니, 귀엽고 순수하다고 생각했어요.
연기는 언제부터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요. 대구의 연기학원에서 연기 한번 배워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요.
연기학원 직원이 길거리에서 지후 씨를 발견한 거예요?
네. 교보문고에서요.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네요.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뭔가를 다르게 보게 됐나요?
예전에는 드라마나 영화를 줄거리 위주로 봤거든요. 이제는 캐릭터를 보고, 연기를 봐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찍은 작품을 지금 보면 정말 국어책 읽는 것 같아요. 하하. 그렇게 국어책 읽듯이 연기하던 애가 영화제에도 가보고… 저는 정말 신기해요. <벌새>가 이렇게 훨훨 날아다니는 게.
연기는 지후 씨에게 즐거운 일이에요?
제가 못해본 경험들을 할 수 있잖아요. 다른 성격으로 살아볼 수도 있고요. 최근에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벌새>에서 연기하고, <벌새>로 영화제에도 다녀오고, 관객들과 대화하면서 영화 하나로 굉장히 큰 보상을 받는 것 같았어요. 감사하고, 소중한 순간들이 많아요. 언젠가 일정 끝나고 엄마와 함께 대구로 내려가는 길에 식사하면서 제가 그랬어요. “엄마, 나 이 일이 너무 즐거워!” 그렇게 말하면서 울었어요. 엄마도 울었고요. 짜릿함, 희열. 연기에서 그런 걸 느껴요.
요즘의 박지후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좋아하는 것만 말해도 돼요? 활동적인 거라면 대체로 좋아요.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은 금방 질려요. 공부도 시끄러운 곳에서 해야 조금 더 집중이 잘되고요. 또… 대화하는 것도 좋아해요. 얼굴 보고 하는 대화요.
“학교에서는 나서기를 좋아했어요.
지금은 덜한데 원래 그런 성향이 강했어요.
발표도 나서서 하고, 리더가 되고 싶어 하고.”
공부 좋아해요? 좋아하는 과목이 뭐예요?
공부 열심히 하려고 노력해요. 열심히, 만족스럽게 하고 있어요. 국어 좋아해요. 시 해석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화자의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게 재미있어요.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시라면 다 재미없다고 생각했어요. 괜스레 그랬었죠.
저도 교과서에 나온 시보다, 서점에서 산 시집의 시를 더 좋아해요. 특별히 좋아하는 시인이 있는 건 아니고요. 최근에는 ‘막강’이라는 작가의 문장집인 <욕설>을 읽었어요.
본인을 다른 것에 빗대어 말한다면 무엇이 좋을까요? ‘벌새' 말고요. <벌새>와는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골라볼까요?
경주마요. 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에요. 앞만 보고 달려가요. 경주마처럼.
경주마라고요! 예상치 못한 답변이에요.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그런데 친해지면 달라요. 친구들이 늘 그래요. 친해지고 나니 말이 너무 많다고요. 인사만 하는 사이였을 땐 무척 조용한 애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영화에서 은희가 왼손으로 글씨를 쓰더라고요. 실제로도 왼손잡이인가요?
왼손잡이예요. 영화에서 영지 선생님도 왼손으로 글씨 쓰잖아요. 영지 선생님을 연기한 김새벽 배우님도 왼손잡이예요. 보라 감독님도 새벽 배우님이 왼손잡이인 걸 사전에 모르셨대요. 심지어 감독님도 원래 왼손잡이였대요. 어른이 되면서 오른손잡이로 바꾸었대요. 재미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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