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감빵생활> 끝나고 <아레나>와 만났던 것 기억하나? 당시 인터뷰 제목이 ‘고행자 해수’였는데.
화보 인터뷰 많이 안 해서 다 기억한다. 너무 과분한 제목이다. 고행이라니. 열심히 살 뿐인데.
한동안 소식이 들리지 않아 궁금했다. 어떻게 지냈나?
결혼을 했고 영화도 찍었다. <사냥의 시간>과 <양자물리학>. 드라마도 하나 촬영 중이다.
<양자물리학>이 제일 먼저 개봉하지? 양자물리학과 박해수를 검색하면 곧장 나오는 게 ‘이빨 액션’이더라. 어느 정도로 이빨을 털면 액션이라 부를 수 있는 건가?
대사량이 정말 많았거든. 의학 드라마 수준이라고 말하면 맞으려나. 내가 맡은 캐릭터 이름이 이찬우인데, 말이 참 많다. 빠르고. 그래서 거의 이빨을 ‘터는’ 수준인 거지. 하하.
대본의 두께가 다른 배우들과 확연히 달랐겠다. 연필 좀 물었나?
어우. 대본 엄청 두꺼웠다. 연극 하던 시절, 고전 작품의 대사량과 맞먹었다. 연필도 많이 물었지. 연극에서 독백하듯 혼자 대사 연습을 정말 많이 했다.
말 많은 캐릭터를 연기할 땐 무엇이 가장 걱정되나?
나는 말들이 허공으로 흩뿌려지지 않았으면 했다. 이찬우가 이빨을 터는 건 분명한 의지의 표현이거든. 주문처럼 되뇌는 거다. 그 말들이 곧 이찬우의 관념이고 가치관이다. 이런 면이 잘 표현되길 바랐다. 물론 내 바람일 뿐, 관객에겐 그저 이빨 터는 걸로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대본을 받으면 그 안에 궁금한 사람이 있는가를 본다”고 말한 적 있다. <양자물리학> 대본을 보고 누가 궁금했나?
감독님. 대본에 뒤돌아보지 않는 느낌이 있었거든. 어쩌면 이렇게 앞으로만 직진하지? 어떻게 이렇게 순수하게, 거침없이 갈까? 망설임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 얘길 들으니 무척 보고 싶어진다. 홍보에 소질이 있는데?
극의 속도감이 엄청나다. 대본을 읽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쾌활한 극이다. 이찬우는 피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그러지 않는 남자다. 한 발씩 내디뎌 조금씩 이겨내려고 애쓰는, 건강한 사람이다. 감독님도 그런 분이다.
대본에서 감독의 캐릭터를 연상했다니 인상적이다. 배우에게 가장 필요한 힘 중 하나가 상상력이잖아.
정말 필요하지. 워낙 장난기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편이다. 상상이 딴 길로 샐 정도로 풍부하다. 망상 수준이지. 생각의 가지를 뻗느라 잠이 부족할 때도 있다. 양 세면서 자려다 그 양의 생김새, 털 색깔, 사는 곳, 그곳의 날씨까지 생각해버린다.
영화 예고편을 보니 ‘텐션’도 엄청 끌어올려야 하는 역할이던데, 잘 맞던가?
원래 낯도 가리고 조용조용한 편인데, 판 깔아줘서 신나게 놀았다. 그렇게 노는 날 보면서 스스로 너무 즐거웠고.
이찬우의 모토는 ‘생각은 현실이 된다’다. 박해수는 어떤가? 이찬우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사나?
비슷하다. 긍정적인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긍정적인 에너지와 사고가 결국 현실을 좋은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긍정적인 박해수는 어려움에 어떻게 대응하며 여기까지 왔나? ‘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젊었을 땐 부딪쳤다. 마주한 바위를 깨보려고 했다. 깨지지 않는 바위라면 뛰어넘으려고 하거나, 아예 그 앞에 멈춰 있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돌아간다. 넘어질 것 같으면, 그냥 넘어져버린다.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넘어지면 늘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다.
지나고 보니 포기해도 괜찮았던 것에는 뭐가 있나?
사람 관계. 예전에는 싫은 사람을 바꿔보려 했는데, 지금은 그냥 받아들인다. 좋아하려고 하는 건 아니다.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 대신 그냥 싫어하는 거지. 마음속으로….
어떤 사람이 싫은가?
예의 없는 사람. 일은 못해도 상관없다. 사람다운 사람이 좋다. 사람다운 사람을 완성하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특히 약자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정말 싫다.
상상이 딴 길로 샐 정도로 풍부하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불안에 떨거나 하지는 않는 편”이라고 했다. 연극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을까?
예전에 이런 말 많이 들었다. “자신감 좀 가져, 너 괜찮은 놈이야.” 지금은 다르다. 이제 자신감은 생겼는데 항상 떨린다. 기대되어 떨리는 거다. 과거에 자신 없어 하던 것도 교만이었던 것 같다. 주어지면 그냥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을. 잘했다며 인정받고 싶었던 거니까.
역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속도와 정도가 남다르다.
맞다. 이거 너무 멋있게 써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철학자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거든. 다시 말하고 싶다. 나, 뭐, 자신감도 없고 자주 불안에 떤다.
무대 연기와 비교한다면, 매체 연기의 매력은 무엇이던가?
무대 연기는 연습 때부터 수백 번 내뱉은 대사를, 그렇게 다 닳은 대사를 즉흥적으로 선보인다. 매체 연기는 세팅된 상황 속에서 상대방을 마주하고, 리얼하게 툭 나오는 호흡이 매력이다. 진짜 공간에서, 완전히 한 번밖에 안 나오는 감정. 한 번밖에 안 나오는 호흡.
연극 하던 시절에는 고전 작품을 많이 했더라. <오이디푸스>부터 <맥베스>까지.
고전을 좋아한다. 고전을 공부하다 보면 생각지 못한 다채로운 것들을 발견하거든. 보물상자 같은 느낌이다.
확실히 고전은 해석의 여지가 많지.
맞다. 사실 고전은 어려운 게 아니라, 해석의 여지가 많은 거다. 그래서 재미있다. 여러 가지 다른 감정으로 접근해도 결론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
고전 작품을 통해 트레이닝된 능력이 있을 거다. 그중 지금까지 잘 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써야 하는 부분이 쉽게 파악된다. 연극 대본을 많이 봐서.
연극 무대에서 지구력도 꽤 단련됐을 것 같은데.
맞다. 지구력, 많이 생긴다.
체력은 좋은 편인가?
체력? 기가 막히지. 여전히 잘 뛰어다닌다. 체력이 0이 되면 감정도 안 나온다. 사라진다. 그건 분명하다. 체력이 연기할 때 정말 중요하다. 감정도 체력이라는 생각이 문득 드네.
연기할 때 입었던 캐릭터의 기운이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미치는 편인가?
글쎄. 일부러 떨쳐내야 할 만큼 캐릭터가 내 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다. 그 정도의 능력은 없다. 장면 밖으로 나왔을 때, 대충 툭툭 털면 털리는 정도다. 하하.
연극 시절 팬들은 지금의 박해수를 어떻게 볼까?
그땐 내가 좀 거칠었거든. 수염도 길렀고. 매체에 등장하면서는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을 받으니까 그 당시 팬들은 늘 인물 났다고 말한다. 하하. 거의 놀리는 수준이지.
집에 가만히 있는 걸 못 견딘다면서? 생산적인 일상을 위해, 집에 있기보다 밖으로 나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살아 있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다. 근데 사실, 밖에서 하는 일만이 생산적인 건 아니거든. 그냥 하루 정도 살 기운을 주는 거지. 요즘은 집에서 보내는 차분한 시간도 좋아한다. 스스로 안식하는 시간도 생산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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