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얘기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의 실제 모습을 알기 어렵다. 특히 작품 속 캐릭터로 인식되는 배우는 더 그렇다. 그런데 배우 김예원을 만날 때만큼은 ‘실제로 만나면 어떨까?’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최소한 영화 <써니> 속 일진 여고생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은 라디오 <설레는 밤, 김예원입니다>를 들으면서 알게 됐다. 침착하고, 감성적이고, 때로는 수줍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 그녀 역시 라디오 속 모습이 진짜라고 말했다. 그리고 라디오 속 목소리로 천천히 자신의 얘기를 풀어나갔다. 한낮의 대화였지만, 그녀가 말하는 순간만큼은 고요한 밤 12시 같았다.
이틀 전, 라디오 <설레는 밤, 김예원입니다> 마지막 방송이 끝났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제도 종일 라디오 때 찍었던 사진이나 편지를 보면서 지냈다. 오늘 촬영을 마치고 좀 더 여유로운 휴식이 생기면 실감이 나려나.
이제 매일 밤 12시부터 2시까지 어떤 것을 하며 보낼 작정인가?
글쎄. 그런데 이전에도 그 시간대에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음악을 듣거나 영화나 책을 보면서 시간을 채워나갈것 같다.
배우라는 직업은 스케줄이 불규칙한데 그 반대로 라디오는 매일 규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두 가지 삶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라디오를 하면서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는 것에 대해서 안정감을 느꼈다. 내가 원래 원칙을 벗어나는 걸 기피하려고 하고, 옳은 걸 지키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라디오가 나에게는 원칙적인 느낌이라 좋았다. 그런데 드라마나 영화 작업과 생활 패턴이 부딪칠 때는 쉽지 않다. 특히 얼마 전에 마친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 2> 촬영 때는 규칙적인 시간과 불규칙적인 시간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일 꽉 채워서 생활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이런 식으로 침착하게 일상을 공유하는 캐릭터를 연기로 보여줘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다시 봤다. 장르는 멜로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느낌이 좋았는데, 나도 연기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캐릭터들을 많이 만났는데, 내면에 좀 더 감정을 품고 연기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꼭 해보고 싶다.
정말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캐릭터를 많이 맡았다. 최근작 <으라차차 와이키키 2>의 유리, 영화 <도어락>의 효주도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고 강단이 있었다.
얘기한 것처럼 어두움보다는 밝은 쪽, 조용하기보다는 활발한 캐릭터를 많이 만났는데, 실제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평소 나는 힘을 내려놓고 있는 편이다. 지금처럼.(웃음) 그래서 그런 캐릭터들을 연기하려면 철저히 나를 배제해야 한다. 여러 캐릭터들이 쌓여오면서 나만의 연기 방법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고. 방법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다. 그저 성실하게 연습하는 거지. 나는 즉흥적인 기운으로 연기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애드리브를 하더라도 미리 고민하고 준비를 한다. 최대한 많이 보고 세심하게 생각한 후 현장에 나간다.
혹시 계속해서 직설적인 성향의 캐릭터를 맡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나?
영화 <써니>가 그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그런 호흡으로 연기하는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예 내 카테고리 안에 없던 캐릭터였다.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여느 때처럼 최대한 그 역할에 맞춰서 공부를 하고 성실하게 준비를 해갔다. 오디션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 발동한 거다.
감독님께서 “너와 전혀 다른 캐릭터이긴 한데, 네가 가장 준비를 잘해왔고 캐릭터를 잘 표현해냈다”고 말해주셨다.
필모그래피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은?
<내 아내 네이트리의 첫사랑>이라는 단막극. 영화 <우리 동네>의 정길영 감독님 작품이다.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스무 살 네이트리 역할을 맡았는데, 그 캐릭터의 순수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처음 시나리오 볼 때부터 너무 애정이 간 작품이다. 책상에 놓여 있는 것만 봐도 너무 좋을 정도로.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촬영을 했던 기억이 있다. 감독님께서 돌아가셔서 이제 다시 함께 작업할 수없다는 것 때문에 애절한 마음도 들고.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인터뷰가 끝나면 배우가 된 후 첫 휴가가 시작된다고 들었다. 어떻게 보낼 생각인가?
그동안 끊임없이 일을 하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주위의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 마음은 있었지만, 직접 행동으로 옮겨서 챙기지를 못했다. 일단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거다. 그리고 3주 정도 미국 여행을 다녀올 거다. 거기서 마음의 짐들을 덜고 진정으로 행복한 것을 찾고 싶다. 항상 라디오에서 여러분이 편안해지시길 바란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을 하는 나는 늘 마음속에 불편함이 조금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을 해소해보고 싶다.
인생의 첫 휴가라 그런지 꽤 설레어 보인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너무 많은 것들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다시 잡고, 해소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좋아진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다음을 준비할 때, 자유롭게 작품을 고를 수 있다면 어떤 걸 해보고 싶나?
나만의 감성을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다. 그동안 해온 작품들은 사실 좀 치열했다. 연기를 하면서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당당하고 멋지게 해냈다고 말하고 싶지만 속에서는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이 있었다. 그래서 단막극 작업을 했을 때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해볼 수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그럼 배우 김예원이 용기 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사실 내가 뭘 하든 용기가 필요한 스타일이긴 하다. 하하.
설마 집 밖으로 나오는 것부터 용기를 내야 하는 스타일인가?
그렇다.(웃음) 그런데 용기를 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라면, 작품 안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것? 결국 사랑이 답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결국에 답이 되는 것은 사랑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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