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인터뷰에 앞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혼란하다고 해야 할까? 머릿속이 미세먼지로 가득했던 저녁, 유지태를 만났다.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유지태는 마지막 컷을 앞두고 있었다. 파란색 수트를 입고 긴 팔다리를 움직이며 유지태가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큰 키와 넓은 어깨,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유지태가 말한다. 현장에서 만난 배우 중 유지태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친절하다. 눈이 마주치면 웃어 보인다. 그 미소가 참 다정하다. 처음 본 서양인처럼 유지태는 웃었고,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파란색 수트 컷 촬영이 끝나고, 마주 앉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전에 질문지를 전달한 상태였다. 방영 예정 드라마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출연 이유와 캐릭터 설명 등이 끝나자 대화는 자연스레 업계, 그러니까 변화하는 콘텐츠 산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이 시대에 배우는 또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유지태가 명쾌히 답을 내놓자 나는 새 문서의 빈 커서처럼 눈만 깜빡였다.
“한국에도 히어로물 바람이 불 거라는 생각이었다. 외국 배우들과 경쟁하려면 액션감을 익혀야 한다.”
드라마 <이몽>에서 김원봉을 연기한다. 왜 김원봉이었을까?
<이몽>은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게 첫 번째 매력이었고, 더불어 김원봉이 주인공이라 궁금증과 기대감이 컸다. 나름 부담감도 있었다. 김원봉은 이미 영화에서 여러 차례 다뤘다. <밀정>에서는 정채산으로, <암살>에서는 조승우가 연기했다. 다른 작품에 등장한 김원봉을 보면서 상당히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느꼈다. <이몽> 소개글을 보니 첩보 액션 드라마라고 한다.
스케일도 굉장히 크다고 들었다.
50억짜리 규모였는데, 지금은 2백억이 됐다고 한다. 말을 타고, 액션도 좀 한다. 그래서 촬영 들어가기 전에 훈련을 열심히 해야 했다. 사실 내가 액션에 미련이 있다. 아시아 배우로서 액션을 멋지게 소화하길 갈망한다. 그래서 평소 크로스핏, 복싱, 킥복싱을 배운다.
평소에 킥복싱을 한다고?
그렇다. 그리고 크로스핏은 영화 <300>을 보고 시작했다. 배우들이 스파르타 전사처럼 몸을 만들어야 하는 시대가 올 거라 예상했다. 한국에도 히어로물 바람이 불 거라는 생각이었다. 외국 배우들과 경쟁하려면 액션감을 익혀야 한다. 몸도 좋아야 하고. 한국에서 활동하지만 외국 배우들과 연기를 겨룰 날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갑자기 액션을 하려면 어려우니 평소에 틈틈이 훈련을 받고 있다.
다시 드라마 이야기를 하자면, <이몽>은 독립투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풀어가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장르적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원봉은 이념적으로 이슈가 됐지만 그보다는 독립운동가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드라마 속 김원봉이 실존 인물 김원봉은 아니다. 의열단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다양하게 담았다.
작중 배경은 1920년대일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그 시대를 어떻게 그렸나?
일제의 억압을 당했으니 실제는 굉장히 우울한 시대였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뵀는데, 그때 인상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에게 왜 나라가 중요하냐는 질문을 우연찮게 던졌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자신의 배를 보여주셨다. 배에는 선명한 칼자국이 있었다. ‘일본놈들이 내 배에 칼을 넣은 자국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 나라는 정말 중요하다. 지금 시대는 전쟁과 억압을 겪지 않아 나라의 의미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할머니는 ‘나라를 잃으면 우리는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이몽>에도 ‘나라를 되찾는 데 무슨 이유가 있어 개돼지처럼 취급받는데 쪽팔리지도 않냐’ 하는 대사를 내가 넣었다. 과거가 반복되지 않도록 아픔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그 진정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최근 사전 제작 드라마가 늘어나는 추세다. <이몽>처럼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작품 외에도 다양한 작품들이 사전 제작된다. 사전 제작 드라마는 정교하다는 인상을 준다.
사전 제작 드라마가 늘어나는 현상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앞으로는 사전 제작 시스템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달라진 규정도 원인이 됐을 것이다. 주 52시간 근무를 준수해야 하는 규정이다. 또 스태프 권리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무척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의 퀄리티 또한 자연스럽게 높아질 것이다.
넷플릭스와 같은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도 한몫했겠지.
플랫폼의 변화 때문에 사전 제작 분위기가 형성됐고, 법 규정이 바뀌면서 사전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전처럼 쪽대본 나오기는 힘든 환경이다.
배우에게는 달라진 촬영 현장이 어떻게 다가오나?
드라마 제작 편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예전에는 영화나 방송 독점 구조였지만, 이제는 인터넷 기반 플랫폼이 늘어나면서 다양하게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기회는 많아졌지만 양질의 콘텐츠를 누가 만드느냐를 두고 차이가 생긴다.
봐야 할 것이 너무 많아 이제는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 콘텐츠 양이 너무 많아서 피로감을 느끼는 관객도 적지 않다.
콘텐츠가 넘쳐나면서 사람들은 유행하는 작가, 감독, 배우 등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작품 위주로 선택하려 할 것이다. 또 아주 짧은 시간에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들도 각광받을 테고, 1인 유튜버 중에는 스타 유튜버들이 자리 잡을 테고. 이미 그렇지 않나? 과거에는 영화를 문학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볼거리가 많으니 끝없이 ‘딴짓’할 수 있는 건 좋다. 물론 부작용도 있겠지.
그보다는 생각이 단순해지는 게 문제다. 동영상을 빨리 소비하고 생각이 없어도 살 수 있으니까. 과거에는 책을 읽고 글을 통해 상상을 했다. 요즘은 트렌드에 맞춰 무감각하게 순간을 살아가는 것 같다. <언더독>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그 작품에 ‘살면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대사가 있다. 상상력이 줄어든다는 소리를 들으니 진짜 생각을 놓칠 것 같았다.
진짜 생각을 놓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영상을 무작위로 받아들이다 보면 상상력이 줄어들 수 있다. 이것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집어 먹다 보면 비대해지는 것처럼.
요즘 그런 사람들이 많다.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 영상을 계속 본다. 과자도 콜라와 함께 먹으면서. 물론 내 얘기다.
아 그런가?(웃음) 유튜브에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긴 하다. 나도 유튜브를 좀 보는데, 영화 편집자가 자기 영화관을 이야기하는 영상을 주로 본다. 참 재미있게 잘하더라. 목소리도 듣기 좋고, 재치도 넘친다. 옛날에는 영상자료원 가고, 시네마테크 가야 볼 수 있던 고전 영화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편하다.
“생각은 인간 유지태여야 한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좀 고지식하지?”
배우이면서 작가이기도 하다. 콘텐츠가 넘치는 시대에 어떻게 콘텐츠를 전개해야 할지 고민이 있을 것 같다.
긍정적인 면이 있다. 넷플릭스에는 <로마>나 <7월 22일> 등이 업로드된다. <로마>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나 <7월 22일>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정말 자신이 하고 싶어 한 작품을 만들더라. 나는 이것이 새로운 플랫폼들의 장점이라고 본다. 감독이 대기업이 만든 배급 시스템에 맞춰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 그들의 취향에 맞춰 제작하는 것도 아니고. 흥행을 따라가지 않고, 돈에 구속되지 않으니 감독은 오로지 자신의 창의성, 자신의 영화관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내더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과거 <블러디 선데이>라는 페이크 다큐를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같은 영화라는 점에서 <7월 22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가 과거에 생존이나 경쟁을 위해 만들던 ‘본 시리즈’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하지만 넷플릭스가 망하면 어떻게 하지?
음, 넷플릭스가 망해도 다른 플랫폼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제작한 지 백 년이 지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오랜 세월이 지나도 고전은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아이피 싸움이 치열해질 것 같다.
지난번 <아레나>와의 인터뷰에서 기획 중인 작품이 다섯 개 있다고 했다. 진행 상황이 궁금하다.
만들고 싶은 영화가 다섯 개이고, 시나리오가 두 편, 하나는 쓰고 있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중 하나는 웹툰으로 개발하고 있다.
웹툰이라니 신선하다.
웹툰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제작은 예산이 크고 아이피를 빼앗기는 구조인데, 먼저 웹툰이나 웹소설로 콘텐츠를 만들면 저절로 아이피가 보존된다. 앞서 말했듯이 내가 만든 콘텐츠를 대우받고, 또 안정된 창작 활동이 가능한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런 구조가 내 이상이다.
새로운 콘텐츠 제작 모델을 확립한 것인가?
이렇게 길을 터놓으면 다른 감독들, 독립영화 감독들이나, 작가들, 신인들의 활동이 편해지리라 생각한다. 시나리오의 아이피를 시나리오 작가가 소유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일찍부터 나왔다.
지난 인터뷰가 3년 전인데, 그 이후로 작품 활동이 굉장히 활발했다. 드라마에도 얼굴을 자주 비치고 있다.
드라마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영화만 20년 해왔으니 드라마를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왜일까?
한 장르에 구속되지 않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리고 영화는 컷의 예술이다. 한 컷에 감정을 쏟아내는 작업이다. 그게 호흡이 긴 드라마와는 다른 점이다. 연기 기술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한국 드라마 현장을 경험하고 싶기도 했고. 또 드라마 배우, 영화배우 나누는 것도 싫더라. 이 배우가 영화도 잘하고, 드라마도 잘하고, 연극도 잘한다는 걸 입증하고 싶었다. 영화를 접근하는 방식도 그렇다. 나는 주연만 고집하지 않았다. 캐릭터에 집중해왔다. <올드보이>나 <뚝방전설>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영화는 공동 예술이라 생각한다. 주연만 잘해서 영화가 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빛나는 조연들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루트거 하우어가 기억에 남듯이 말이다. <올드보이>의 이우진, <뚝방전설>의 이지수, <매그놀리아>의 톰 크루즈도 매우 인상적이었지.(웃음)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바하>에도 출연했다.
그동안 악역을 자주 맡았다. 악역을 선택하는 데 다른 의도가 있었나?
악역만 하는 배우보다는 캐릭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나는 <동감> <봄날은 간다> 등 멜로 연기로 주목받았다. 반복해서 재생산되는 타입 캐스팅 그러니까 똑같은 연기를 계속하는 것은 배우에게 한계가 될 수 있으니, 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올드보이>를 선택한 이유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선택한 이유다. 캐릭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인기를 따라가고, 좇는 것을 어려서부터 기피하는 편이었다.
너무 일찍 깨달은 거 아닌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데, 삶의 가치를 인기나 명성에 두고 좇다 보면 불행해진다. 내가 높은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생각은 인간 유지태여야 한다. 땅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좀 고지식하지? 매 순간 인간 유지태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하루 중 언제 행복을 느끼나?
살다 보면 하루하루 행복을 느끼며 살 이유가 너무 많다. 그런데 이전에 누렸던 것들만 생각하고,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이 펼쳐진다. <보이후드>라는 영화를 예로 들면, 마지막 장면에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는 대사가 등장한다. <보이후드>는 16년 동안 찍은 영화다. 오랫동안 촬영한 영화가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 있다고 말하니 그 순간 무릎을 탁 쳤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이루고 싶은 궁극적인 목표로 배우, 감독, 복지사 세 가지 직업을 꼽았다. 각 직업이 인간 유지태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가 살았던 인생이지 뭐. 좋은 배우가 되고, 좋은 감독이 되는 게 어렵더라. 좋은, 아니 괜찮은 복지사 되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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