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낙원
사방팔방 줄기를 뻗은 야자수와 어우러진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해변, 그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에메랄드 빛깔 바다, 그 너머 소실점부터 타들어가는 석양을 마주하는 일. 다른 휴양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이 모든 장관을 한적하게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인도네시아 길리 아이르섬은 매달 3백 명 미만의 관광객만이 찾는 숨은 낙원이다. 아이르는 발리의 파당 베이 항구에서 스피드보트로 1시간 30분 정도 가면 닿는 길이 3km 미만의 작은 섬이다. <윤식당>의 유명세 덕에 길리섬에 대해 들어봤을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하면 <윤식당>의 배경은 아이르 주변 트라왕안(Trawangan)이다. 그리고 방송에 비친 것과 달리 트라왕안은 매일매일 시끌벅적한 파티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각종 환각제를 공공연하게 구할 수 있는 파티 고어들이 자주 찾는 환락의 섬이기에, 한적한 낙원을 찾는다면 트라왕안보다 아이르가 더 적합하다.
아이르섬엔 없는 다섯 가지가 있다. 모터 달린 차(오토바이 포함), 경찰, 개, 마약, 어부다. 이 중 있다가 없어진 것도, 없다가 생긴 것도 있지만 차와 경찰이 없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섬사람 모두 걷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길리의 상징과도 같은 조랑말이 끄는 마차 치모도를 이용한다. 어쩌면 걸어서 한두 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는 작은 섬에서 ‘빠른’ 교통수단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섬 자체가 범죄율이 극히 낮아 경찰도 주둔하지 않는다. 이 점이 위험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으나, 여행자에게 경찰이 없는 작은 섬에 간다는 건, 자유와 모험심을 자극하는 낭만적인 일로 치환되기도 한다. 바다 한복판에 점처럼 찍힌 작은 섬. 경찰이 없어도 될 만큼 안전하고, 인도네시아 로컬 그대로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동화 같은 마을. 휴양지의 낭만을 프라이빗하게 누릴 수 있는 숨겨진 낙원. 인도네시아어로 ‘물’이라는 뜻처럼 투명하고 자연 친화적인 길리 아이르는 외부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생하는 섬이다.
WORDS 양보연(프리랜스 에디터)
청춘의 여행법
남송강을 끼고 우림과 카르스트 산으로 둘러 싸인 방비엥은 우리에겐 <꽃보다 청춘>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심심치 않게 한국어를 발견할 수 있다. 바쁘고 혼잡한 서울을 떠나 굳이 라오스 산골까지 굽이굽이 차를 타고 가서 만나는 한국어가 그리 반갑지는 않지만, 어쨌든 맛있는 샌드위치나 음료수를 사 먹을 때는 조금 요긴하다. 방비엥은 굉장히 자유롭고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경찰이 없는 대신 마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치안을 유지한다. 사람이 많이 살지도 않을뿐더러 악한 행동을 하기에는 이곳을 둘러싼 산과 바다의 조화가 지나치게 아름답다. 그 경관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이며 자연스럽게 관광지가 된 곳이 방비엥이다. 방비엥은 태국 사람들과 유럽 백패커들의 여행지였다. 가진 건 젊음밖에 없는 청춘들은 날것의 자연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방비엥을 즐겼다. 물론 그 자유에 과하게 빠진 청춘들로 인한 사건 사고도 꽤 많았다.
과거의 라오스 사진을 찾아보면 남송강에서 다이빙을 하거나 그네를 타면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 많은데, 몇 번의 사고 이후로는 그보다 조금 덜 재미있는 것만 남게 되었다. 아쉬워할 것은 전혀 없다. 튜브에 누워 맥주를 허리춤에 꽂고 남송강을 따라 내려오며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과 물소리, 자연 소리를 함께 듣는 호사는 지금도 누릴 수 있다. 안전하게 놀려면 동네 여행사를 이용해 다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추천하고 싶은 방식은 외국인이 선호하는 여행사를 가는 거다. 투어 프로그램은 대개 하루 종일 진행되는 편인데, 일행이 모두 한국 사람이라면 여기가 라오스인지 강원도 계곡인지 모를 ‘현타’가 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오토바이를 빌려서 숨겨진 라군에 다녀오는 것도 좋다. 라군은 인스타그램을 검색하는 것보다 오래된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 할아버지나 간간이 만나볼 수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새롭고 재미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다. ‘이 정도 가다가 큰 나무가 보이면 오른쪽으로 꺾어 가라’는 식으로 알려줄 테지만, 그래서 더 찾아내는 재미가 있을 거다.
WORDS 박시열(포토그래퍼)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섬
작년 여름 인천에서 보홀까지 가는 직항 노선이 출범했다. 이로써 보홀은 서울에서 5시간 안에 당도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바다 중 하나가 되었다. 인천에서 팡라오 공항까지 4시간 30분, 그리고 숙소까지 택시로 30분(공항이 크지 않아 빠져나오는 시간이 길지 않다). 그러니까 인천에서 5시간이면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바다 마을에 도착한다. 보홀은 기념품을 살 만한 숍도, 액티비티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바다를 보거나 바다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보홀에 가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다이버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다이빙 포인트가 즐비하고 새하얀 백사장이 펼쳐지는 버진 아일랜드는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평화롭다. 사람이 많은 알로나 비치만 피하면 해변은 어딜 가나 감탄이 나온다. 휴식에 방점을 찍은 여행이라면 중심가와 떨어진 클래식한 분위기의 리조트에 묵는 걸 추천한다. 그래 봤자 툭툭으로 얼마 안 걸린다. 바다가 엄청난 탓일까. 보홀에서는 먹을 것들이 모자란 느낌이다.
필리핀의 특징인데 고유 로컬 음식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약한 편이다. 식도락 여행객에게는 아쉬운 여행지일 수도 있다. 술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해변에서 병째 들고 마시는 산미구엘 라이트는 끝내준다. 해변에 누워만 있어도 좋은 보홀이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다면 한 번쯤은 바닷속에 들어가볼 것을 추천한다. 스킨스쿠버를 배울 필요도 없다. 간단한 스노클링으로도 니모(흰동가리)를 포함해 1m가 넘는 대형 어종, 심지어 행운의 상징 거북이도 만날 수 있다. 실컷 물놀이를 마쳤다면 이제 바다를 바라볼 차례다. 참고로 보홀은 해변 산책 말고도 바다를 보는 방법이 하나 더 있다. 키세스 초콜릿을 닮아 초콜릿힐이라 불리는 작은 언덕을 등반하는 것이다. 등반이라는 말만 듣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바닷속에 퇴적된 산호섬들이 융기해 형성된 초콜릿힐은 이름처럼 산보다는 정말 작은 언덕에 가깝다. 가볍게 산책하듯 올라가면 초록으로 가득한 언덕 끝자락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감상할 수 있을 거다. 보홀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바다뿐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여행지다.
WORDS 박시열(포토그래퍼)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빠지다
코창은 직역하면 코끼리섬이다. 익숙하지만, 실제로 마주하면 그 거대함과 영적인 신비로움에 뒷걸음질 치게 되는 코끼리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공생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코창만의 놀라운 경험은 이뿐만이 아니다. 어떤 휴양지와도 다른 원시적인 면모와 휴양지다운 호화스러움이 어우러진 곳이며, 새하얀 해변의 모래와 울창한 밀림 등, 우리가 공상하는 휴양지의 이상향이 그대로 펼쳐진 섬이다. ‘휴양지에선 호핑 투어지’ ‘동남아에선 꼭 마사지를 받아야 해’ ‘왁자지껄한 비치 클럽에서 춤 한 번 시원하게 춰봐’ 등 널리 알려진 휴양지를 즐기는 방식은 코창을 여행하는 방식과 다르다. 원한다면 이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으나, 이 섬을 즐기는 방식은 휴식과 모험에 더 가깝다. 굽이진 산길과 수풀을 헤쳐가며 올라야 만날 수 있는, 땅이 꺼져라 쏟아지는 끌롱 플루 폭포에서 다이빙하거나, 이름만큼 한적한 론리 비치에서 태국 로컬 맥주를 마시며 폭발하는 석양을 마주하거나. 관광객을 위해 개발된 ‘여행 상품’을 따르기보다, 자연 그대로의 엔터테인먼트를 몸으로 경험하는 게 코창을 즐기는 알맞은 방식이다.
이 섬의 방문객 비율 중 가장 높은 인구인 느긋한 북유럽 사람들이 ‘고독한 청춘들의 휴식처’라고 붙인 별명은 이 섬을 다각도로 설명한다. 코창은 제주도 4분의 1 크기인 산호초 섬이다. 인천공항 출발을 기준으로 경유 대기 포함 최소 9시간 동안 두 번의 비행기와 배를 타야 다다를 수 있다. 비교적 가깝다는 동남아의 장점이 코창엔 해당 사항 없다. 게다가 차가 달릴 만한 포장도로는 해안을 따라 왕복 2차선밖에 없다. 그마저도 북쪽에서 끊겨 불편하게 온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으며, 도로 곳곳에 커다란 코끼리 발자국이 남아 있어 운전 또한 쉽지 않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갈 만큼 매력적인 코창의 매력은 무엇보다 자연이다. 같은 자리에서도 매일 볕과 바람과 날씨와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다른 멋을 뽐내는 그대로의 자연. 시간을 확인하는 대신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해를 시계 삼아 오늘의 여행을 결정하게 되는 마법 같은 일. 그렇게, 코창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WORDS 양보연(프리랜스 에디터)
우동과 미술관
틈만 나면 일본으로 도망친다. 현실에서 완전한 도피를 도모하기 위한 여정으로. 일본 여행을 마니아 수준으로 즐기는 이들은 대개 대도시파와 소도시파(?)로 나뉘는데, 사실 나는 전자에 가까웠다. 일본 소도시, 그것도 시골에 매료된 건 세계 어딜 가도 비슷한 풍경의 ‘힙’이 지겨워진 탓이다. 시골 특유의 적당한 촌스러움에서 오는 안도와 위안. “힙스터가 다 뭐냐!” 일갈하는 듯한 넉넉한 풍경이 현실 도망자에게는 진짜 힐링이었으니까. 최근에는 다카마쓰에 다녀왔다. 테마는 우동과 미술관으로 정했다. 다카마쓰는 소도시치고는 여행자를 바삐 재촉하는 도시다. 우동 성애자라면 말할 것 없다. 다카마쓰시가 속한 가가와현은 일본에서 가장 작은 현임에도 6백여 개의 크고 작은 우동집을 품고 있다(이마저도 몇 년 사이 수백 개 줄었다). 물이 귀한 지방이라 쌀 대신 밀을 재배한 것이 시작이라는데, 이 도시 사람들에게 우동은 그야말로 갓 지은 쌀밥 같은 존재다. 삼시세끼 우동을 먹어도 질리지 않느냐고 물으면 무척 의아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한다. “왜요?” 2천 엔을 내면 현지인에게 인기 높은 우동집을 종일 순례할 수 있다.
키 큰 나무 아래서 뚝딱 해치우는 가마아게 우동, 면의 각과 탄력이 살아 있는 자루 우동, 술 해장용으로 먹는다는 카레 우동…. 매일 우동 순례를 인도하는 가이드마저 일행 옆에서 자기 주머니를 털어 우동을 사 먹는 풍경이 새삼 정겹다. 우동집과 다음 우동집 사이는 귤나무로 채워진 시골 풍경이 차창 밖으로 기분 좋게 스친다. 다카마쓰 항구에서 30분이면 당도하는 예술의 섬 나오시마는 우동에 물릴 때쯤 방문하기에 좋은 대안이다. 한국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의 커다란 호박 조형물로 유명한 섬이지만 사실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지추 미술관을 비롯한 전시 공간들이 더 볼 만하다. 오래된 집이 근사한 전시 공간으로 변모하는 풍경이 짜릿한 볼거리를 제시한다. 안도 다다오의 건물 안에 제임스 터렐이 인간의 시각을 이용해 완성한 작품은 충격적이다 못해 가슴을 뻥 뚫리게 한다. 이토록 작은 도시에 또 오고 싶다고 다짐하게 되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그래서 다카마쓰는 좀 기묘한 도시다.
WORDS 전희란(여행 칼럼니스트)
거대하고 아름다운 회색빛 도시
공기가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머무르는 내내 도시는 전반적으로 희뿌연 회색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밖을 나가게 만들 정도로 상하이에는 숨어 있는 보물이 많다. 아기자기한 독립 서점부터 오래된 건물을 참신하게 활용한 미술관, 독일과 호주의 커피를 들여온 카페까지 흥미로운 공간투성이였다. 다만 영어로 묻는 것은 어려우며, 로컬들만 찾는 지역일수록 중국어를 하지 못한다면 물 한 잔도 사 먹지 못할 수도 있다.
상하이는 한눈에 봐도 빈부 격차가 심각하다. 도심 한가운데에는 미국의 재즈 뮤지션이 공연하는 바, 독일 가구가 진열된 숍이 있다. 조금만 벗어나면 과거의 중국을 보여주는 높고 좁은 아파트와 미개발 구역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그러나 진짜배기는 빈민가에 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고서적을 파는 간판 없는 서점이 있고, 구하기 힘든 바이닐을 파는 음반 매장도 있다. 다만 위챗페이나 알리페이가 없다면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다는 점은 함정이다. 누구나 다 아는 번화가도, 지도에서 찾을 수 없을 만큼 생소한 장소에 있는 상점도(상하이는 구글맵의 경우 VPN 우회나 로밍 시 사용 가능하다) 나름대로 봐야 할 이유가 있는 매력적인 도시가 상하이다.
WORDS 블럭(음악 칼럼니스트)
먹고 놀고 쉬기만 할 것
너무 전형적이라는 생각이 들겠지만, 막상 다낭을 가보면 남들이 다 하는 것을 해도 즐거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선 큰 브랜드의 리조트부터 나만 리트리트같이 베트남 문화를 잘 담아낸 곳을 고르는 것이 다낭 여행의 시작이다. 숙박비도 물가도 다른 휴양지에 비해 저렴한 편이라 오로지 취향만 반영해 장소를 고르는 재미가 있다. 리조트 내에서만 편안하게 놀고 쉬어도 좋지만, 도시를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호이안을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도 있다. 호이안까지 가기도 귀찮다면 바로 앞 다낭 시내를 갈 수도 있다. 다만 고요한 리조트 풍광에 마음을 내려놨던 이들이라면 전형적인 동남아의 대도시 분위기가 나는 풍경에 조금 놀랄 수도 있다. 오토바이가 좁은 골목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가고, 인도는 비좁아서 걷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곳곳에 꽤 재미있는 요소들이 많다. 베트남에 정착한 외국인들이 만드는 힙합 공간은 요즘 다낭의 모습을 보여주고, 맛집으로 알려진 카페와 레스토랑은 기다림을 감수할 가치가 있을 만큼 맛있다. 실컷 쉬다가 나와서 실컷 먹고, 다시 바다로 나가 실컷 노는 베짱이 같은 코스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다낭이 제격이다.
WORDS 블럭(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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