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은 기점이다. 의도하지 않아도 나의 세계는 달라진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소란스러운 상황들과 새로운 관계들이 거미줄처럼 펼쳐진다. 원인 모를 사건들과 뾰족해지는 감정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알 수 없는 관계들과 엮이는 나날들.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가슴은 답답해진다. 상황은 변하는데, 변화를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 생경하고 불편하기 때문이다. 30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서른한 살의 이종석과 30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로맨스는 별책부록> 비하인드 스토리를 주제로 한 인터뷰였지만 본질은 서른이 되며 겪는 갈등이었다. 이종석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불안한 심정이 느껴졌다. 책임감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다. 입대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필모그래피의 한 챕터를 덮고 있었다.
“불현듯 20대에 이토록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다른 것들로 나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30대를 맞이했다. 달라진 점이 있나?
달라진 점은 없지만 달라져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30대가 되니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어른스러운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회사를 설립했고, 직원도 늘었다. 자연스레 책임감이 커진다.
회사를 운영해보니 어떤가? 책임이 부담되지 않나?
음, 오너로서 행동하기보다 식구들 간에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소속 배우로서 임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회사 운영은 임직원의 몫이다. 다른 배우가 우리 회사에 왔을 때 과거에 내가 겪었던 고민들을 하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
회사를 설립한 이유도 궁금하다.
활동하다 보면 회사에 소속되지 않고 막연히 프로필 돌리며 연기하는 친구들을 보게 된다. 그들을 조금만 도와주면 좋은 환경에서 연기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계약 기간 동안 배우가 좋은 연기자로 성장하게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보니 힘든 점도 생긴다.
필모그래피가 빼곡하다. 일 년에 여러 작품을 한 적도 있고, 오래 쉰 기간이 거의 없다.
과거 다른 인터뷰에서는 꾸준한 활동의 원동력을 열등감이라고 했는데… 그저 연기를 잘하고 싶었다. 작품을 끝내면 새로운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받는다. 그중 연기에서 차별성이 두드러지는 것, 내 연기가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는 작품을 선택했다. 그렇게 부족함을 채워나갔다. 또 가능한 20대에 많은 작품을 남겨놓고 싶었다.
왜 20대에 일만 하려고 했나?
청춘이라는 단어를 자주 내뱉는다. ‘좋은 날 다 갔다, 청춘은 머물지 않는구나.’ 넋두리라고 해야 할까? 습관처럼 하는 말이다. 청춘은 찬란한 순간이다. 그래서 20대의 연기, 작품, 활동을 많이 저장하고 싶다.
김광석 노래 같다.
맞다.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는 감성이 있다. ‘서른 즈음에’는 20대에는 몰랐는데 서른 살에 접어들어 감상하니 묘한 감성이 느껴지더라. 20대에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연기에 대한 열망이 무척 컸다. 정말 잘하고 싶었고,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작품을 했고, 선배들을 보면서 배울 점을 관찰했다.
일기나 사진처럼 청춘을 박제하는 건가?
오래된 일기를 들춰보듯 과거 작품들을 다시 돌려 보는 습관이 있다. 내가 나온 장면을 보며 당시의 내 감정을 회상하는 식인데, 작품에 나온 장면의 비하인드를 그런 식으로 기억한다.
촬영 현장에서 캠코더로 자신이 연기하는 모습을 기록한다고 들었다.
일종의 모니터링이다. 나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연기하기보다는 학구파에 가깝다. 캠코더로 촬영한 내 연기를 보고 미흡하다고 판단되면 다음 장면에서 만회하려고 계산한다. 캠코더로 많이 찍고, 집에서 몇십 번 돌려 본다. 그다음 장면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고민도 하고. 가끔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분들이 무척 부럽다. 그런 연기는 정말 신기하다. 다른 연기자들은 이종석의 연기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질투를 많이 한다.
연기에 대한 질투인가?
나는 아직 미완의 존재다. 그렇다 보니 더 나은 연기를 갈망하게 된다. 연기는 내 일이고 본업이라 갈증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20대에 또래 배우들의 작품을 챙겨 본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많이 공부했고, 열심히 또 괴롭게 연기한다.
“3부작이라 짧아서 다시 시대극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서 사극도 이제 괜찮지 않을까”
너무 열심히 살면 지치는 순간이 온다.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사전 제작으로 촬영하고 작년에 1년 정도 쉬었다. 작품을 많이 남기고 싶었는데, 불현듯 20대에 이토록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다른 것들로 나를 채워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국내 여행을 했다. 거제도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힘들면 대구에서 며칠 지내고, 천천히 여유롭게 여행을 다녔다. 여행하면서 내 안의 곳간을 채우겠다는 생각이었다. 연기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많이 보고 느끼라고 하는데, 나는 그동안 매체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 나를 채워온 것 같았다. 직접 경험하려고 여행을 다녔는데, 지금은 여행한 시간이 후회된다.
반전이다. 왜 후회되나?
사실 여행하면서 많이 느끼지 못했다. 추억은 남겼지만, 차라리 작품을 하나 더 남기는 게 나았을 것 같다. 그런데 결과물을 보면 행복하지만 연기할 때는 괴롭다. 힘들게 찍은 작품이 방송되거나 스크린에 걸리면 무척 행복하다. 힘든 과정에 대한 보상이 된다.
이종석 드라마는 재미있다는 공식이 있다.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 뛰어나다. 비결이 뭔가?
그런 소리를 들으면 뿌듯하다. 나도 시청자로서 드라마를 볼 때가 많다. 그렇다 보니 매력적인 아이템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이전에는 내가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기도 했고, 드라마의 메시지가 좋아서 선택한 경우, 욕심나는 캐릭터를 연기한 적도 있다. 또 단조로운 작품은 안 하려고 하다 보니 출연한 작품들이 대부분 복합 장르였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은 팬들에게 로맨틱 코미디를
보여주고 싶어서 선택했다. 자극 없는 잔잔한 드라마인데 악역 없어도 이야기가 잘 풀린다. 정말 로맨스는 부록이고, 주된 내용은 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점이 좋았다. 대본을 읽으면서 조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다.
연기한 캐릭터들이 많은데, 애정 가는 캐릭터 하나를 꼽자면 누구일까?
지금 연기하는 <로맨스는 별책부록>의 차은호다. 모난 구석 없이 완벽한 캐릭터다. 동경하면서 촬영한 캐릭터는 차은호가 처음이다. 그동안 연기한 캐릭터들은 성장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시련을 겪고, 특정 사건을 계기로 회가 진행될수록 성장해간다. 하지만 차은호는 완성형 캐릭터다. 연기를 하면서 차은호를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애착 간다. 팬들에게 입대 전에 선물을 안겨주고 싶었는데, 내 인생 캐릭터를 전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연기한 캐릭터 중 가장 성숙한 인간이어서 너무 좋다.
영화 <브이아이피>의 김광일을 꼽을 줄 알았다.
음, 김광일은 연기에 대한 갈망과 갈증이 극에 달해서 선택한 캐릭터였다. 나는 나만의 장점과 무기가 무엇인지 잘 안다. <브이아이피>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 장점이 무기로 작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내 연기와는 결이 달라서 욕심이 났다. 그리고 박훈정 감독님을 굉장히 좋아하게 됐다. 함께 작업하다 보면 특별히 마음이 가고 또 작업하고 싶은 경우가 생기는데, <브이아이피>의 박훈정 감독님이 그런 경우다.
30대가 되면 도전하고 싶은 캐릭터가 달라지나?
<관상>을 하고 다시는 사극을 안 하고 싶었다.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해서 사극 장르는 절대로 건들면 안 된다고 단정 지었다. <관상>에서 내가 나오면 흐름이 끊기는 것 같았고, 작품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벌을 내려 다시는 사극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사의 찬미>라는 시대극을 촬영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그 시대가 멋스럽고, 정서가 현대극을 할 때와는 굉장히 달랐다. 묘했다. 3부작이라 짧은 느낌이 없지 않아서 다시 시대극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아가서 사극도 이제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는 과거부터 이상형으로 언급했던 배우 이나영과 호흡을 맞췄다. 이상형과 함께 촬영한 소감이 어떤가?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 나는 연기할 때 조급한 편인데, 나영 누나와 연기를 할 때는 그동안 해왔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미묘한 차이인데, 힘을 주고 대사를 뱉는 것이 아니라 무척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어떤 작품보다 편안했다. 이걸 끌어낸 사람이 이나영 씨다. 이렇게 설명하면 그 느낌이 이해될까?
좋은 누나?
맞다. 좋은 누나가 생긴 것 같다. 나영 누나는 작품 외적으로도 계속 내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뭐 좋아해?’ 이런 식인데,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내가 ‘사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넋두리를 하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내게 책 한 권을 건넨다. 극 중 배경이 출판사라 책이 많다. 책을 펼쳐보니 버지니아 울프가 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글이 있었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대신 사소한 일상이 있을 뿐이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한 질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답변을 제시하는 게 고마웠다. 나영 누나는 정말 좋은 어른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편집장을 연기해서 묻는데, 책을 많이 읽는 편인가?
사실 많이 안 읽는다. 팬들이 선물해줘서 읽기는 하지만 나는 시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시를 쓰던 시절도 있었다. 28세 때였는데, 사람이 우울하면 감성이 폭발하지 않나? 나 역시 그럴 때 글을 조금 써봤다.
시 쓰는 건 좋은 습관이다. 자신을 관찰하게 되니까.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함께했던 이기영 선배는 배우는 시를 잃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실제 나태주 선생님과 함께 시집을 냈다. 그 시집에 내가 쓴 글을 올리고 싶었는데, 사람들에게 내 글을 보여주는 게 무척 두려웠다. 내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덜컥 겁이 나더라. <로맨스는 별책부록>에서도 그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다. 작가가 몇 년에 걸쳐 글을 썼는데, 출판할 때가 되니 도망갔다. 글을 써보니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 쓸 때 자주 사용하는 어휘도 있나?
어휘보다는 부제라고 할까? 그런 건 있었다. 나중에 쓴 시를 모아놓고 보니 다 같은 이야기더라. 내가 너무 힘들다는 걸 좀 알아달라는 내용이었다. 나 자신이 아직도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나?
폭식한다.
엄청 말랐는데?
항상 내가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폭식하니 살이 찌더라. 그래서 관리를 한다. 관리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고, 폭식해야 하는데 못 먹으니까 또 스트레스 받고. 그러다 한 번씩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실컷 먹을 때가 있다.
지금 이종석을 괴롭히는 건 뭘까?
인간관계? 나는 고독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오늘이 입대를 앞두고 하는 마지막 인터뷰다. 2년 뒤 다시 인터뷰할 수 있을까. 행이 바뀌는 동안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하고.
행이 바뀌는 동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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